33장
知人者智, 지인자지, |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
自知者明. 자지자명. |
자기를 아는 자야말로 밝은 것이다. |
勝人者有力, 승인자유력, |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
自勝者强. 자승자강. |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 |
知足者富, 지족자부, |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
强行者有志. 강행자유지. |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
不失其所者久, 불실기소자구, |
바른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
死而不亡者壽. 사이불망자수. |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
1. 지(知)와 지(智)는 예전에 혼용되었다(知人者智, 自知者明)
이 장은 아주 평범한 진리를 설하고 있지만 너무도 그 뜻이 깊고 절실하여 평소 생활하는데 금언이 되는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지혜로운 말씀들을 다 합쳐도, 결국 이 한 장에 담긴 지혜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지혜로운 말씀들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혜란 본시 장황한 논리적 전개가 아니다. 모든 지혜는 평범한 삶의 문제에 대한 단순한 통찰 몇 마디에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지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장을 아주 귀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삶의 소중한 잠언으로 여겨왔다.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이 이 장을 읽고 깨달아서 지혜로운 삶을 실천할 수 있기를 앙망(仰望)한다.
이 장은 간본(簡本)에 없다. 그러나 백본(帛本)에는 고스란히 실려 있다. 백본(帛本)과 왕본(王本)은 대차가 없다.
타인을 잘 아는 자를 우리는 지혜롭다 말할 것이다[知人者智]. 그러나 지혜의 가장 철저한 의미는 타인을 아는 데 있질 않다. 그것은 곧 자기를 아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것이야말로 ‘밝음[明]’이다. 16장에서 ‘지상왈명(知常曰明)’이라 한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명(明)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명(明)은 전체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지혜의 가장 궁극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여기 텍스트상의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문자에 있어서 과연 지(知)와 지(智)가, 앎(Knowledge)과 지혜(Wisdom)로 분별되는 뜻을 내포하고 있을까? 물론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지(知)와 지(智)는 그런 엄격한 구분이 없이 혼용(混用)되었다. 백서(帛書)에 ‘지인지자(知人者智)’가 ‘지인자지야(知人者知也)’로 되어있는데, 백서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일 것이다. 왕본(王本)은 후대의 사람들이 ‘지인자지(知人者知)’에서 두 개의 지(知)가 혼동되는 것을 방지하여 후자의 지(知)를 ‘지(智)’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智)’에다가 ‘지혜’의 의미를 부가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변화는 인도불전의 한역과정에서 더욱 고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에 있어서는 ‘지(智)’는 결코 최상의 쁘라기냐(prajñā, 반야, 般若)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보통 ‘지혜’라고 부르는 그 지혜의 부정에서 노자의 사상은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2. 앎이란 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 속에서 완성된다
다음 내 마음에 항상 석연치 않은 또 하나의 문제는 ‘자지자(自知者)’라는 표현이다. 만약 이것이 ‘자기를 안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분명 ‘지인자(知人者)’에 짝지어서 ‘지기자(知己者)’로 표현되었어야 한다. 예
로부터 인(人, others)과 기(己, self)는 대(對)를 이루는 말이었다. 인(人)의 대(對)가 ‘자(自)’로 쓰인 예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사실 ‘자지자(自知者)’는 ‘스스로 아는 자’로 번역되어야 정확한 본래 문맥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왕주(王注)부터 그 아무도 이렇게 해석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그 원맥락은 ‘스스로 아는 자’일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런데 ‘스스로 안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남을 안다’는 것은 나에게 대하여 구분적으로 설정된 대상적 인격체에 대한 인위적 앎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스스로 안다는 것은, 저절로 안다는 것은 그러한 대상적 설정이 없다. 대상적 설정이 없는 앎은 결국 ‘나 스스로의 앎’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지자(自知者)’를 ‘나를 아는 자’로 번역했지만 그러한 번역의 배후에는 반드시 ‘자지자(自知者)’의 원래의 의미맥락이 명료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 것이다. 스스로 아는 것은 곧 전체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국부적인 대상적 앎이 아니다.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 自知者明)! 이것은 짧은 격언 같아서 암기하기도 좋다. 가만히 그 뜻을 한번 생각해보라!
인간의 앎이란 어려서부터 타인에 대한 앎으로부터 시작하게 마련이다. 갓난아기는 엄마부터 알게 되고, 이어 아버지를 알고, 장성하면서 형제자매를 알게 되고, 친구를 알게 되고, 선생을 알게 되고, 사회사람들을 알게 되고, 책을 통해 사상가를 알게 되고 과학자를 알게 되고 예술가를 알게 되고, 예수, 석가, 마호메트와 같은 종교적 지도자를 알게 되고…… 끊임없이 타인을 아는 과정 속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지혜를 터득하고 삶의 제문제(諸問題)를 인식한다. 그런데 이렇게 남을 통해 아는 것은 결국 스스로 아는 것, 즉 남의 전제가 없이 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 속에서만 완성되는 것이다. 삶의 지혜란 곧 자기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란 것은 자타(自他)의 대립적 구분이 말소된 나의 삶 그 자체요. 나의 체험 그 자체다.
3. 앎이 나의 삶속에서 체화되어야만 지식이 된다
타를 안다고 하는 것은, 곧 타를 통해서 얻는 지식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학문을 한다는 것도 결국 99%가 모두 타인을 통해서, 타인을 앎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로운 지식인이 되고 문명인(civilized man)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결국 불완전한 것이다. 나의 삶 속에서 체화(體化)되지 않는 것은 결국 진리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지식체계의 이동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저 사람으로 옮아갔다고 해서 곧 그 문명이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컴퓨터 시대의 큰 문제점도 이러한 지식의 이동현상을 곧 인간의 지혜의 확충으로 오인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내가 실천적으로 체득하지 않은 진리는 결코 진리의 자격이 없다. 나의 삶에 의미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한 지식은 지식의 자격이 없다. 나의 삶 속에서 자각되어지는 부분만이 곧 나의 지식인 것이다. 내가 체험해보지 않은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결국 지혜란 것은 타인을 아는 것이 아니요, 나를 아는 것이다. 나의 삶 속에서 체득되는 순간, 어둡고 애매하고 캄캄했던 것이 갑자기 명료해지고 명석해지고 밝아지는 것이다. 이 밝음을 노자는 ‘명(明)’이라 한 것이다. 이 명(明)은 곧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悟]이요, 해탈이다. 지(智)는 명(明)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지인(知人)을 부정하는 뜻이 아니요, 지인(知人)은 곧 자지(自知)의 단계에 와야만 곧 명(明)의 단계로 비약하는 것이다. 지인(知人)은 곧 자지(自知)의 계기를 위한 준비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학계가 이렇게 혼탁하고 방황을 거듭하는 것도 지인(知人)의 지(智)만 있을 뿐 자지(自知)의 명(明)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他人)의 지식을 전달하는 자는 있으나 자기의 깨달음을 토해내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동(感動, 느껴 움직임)이 없고 교감(交動, 서로 느낌)이 없는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타인을 아는 사람은 단지 지혜롭다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혜를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만 같지 못한 것이다.
知人者, 智而已矣. 未若自知者超智之上也.
어찌 명석한 주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
4. 진정한 강함이란 나를 이기는 것이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인간(人間)은 사이의 존재다. 공간(空間)도 사이의 체험이요, 시간(時間)도 사이의 의식이다. 이러한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결국 타인을 이기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자식들을 키워봐도, 자식들 사이에서도 성장과정에서 형제자매를 서로 이기고자 하는 충동에서 지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할 때가 많다. 그것을 보면서도 나의 삶도 결국 타인을 이기고자 하는 충동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반추해본다.
지식의 습득도 결국 타인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낄 때, 그를 이기려고 맹렬한 독서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지식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남을 이기는 자는 분명 유력(有力, 힘세다)한 자이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룹과 그룹의 관계, 사회와 사회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한 국가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궁극적 소이연은 타국가를 이김으로써 유력(有力)해지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세다[有力]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힘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함이 아니다. 진정한 강(强)은 남을 이기는 유력(有力)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이기는 것’ 곧 ‘나 홀로 이기는 것’, 즉 ‘나를 이기는 것’이다. 노자는 유(柔)를 포(褒)하고 강(强)을 폄(貶)하였다. 노자는 유약함을 좋아하고 강강함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강(强)이란 곧 유약을 포섭한 진정한 강함이다.
이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 인생의 행로가 반백년을 지나고 보니, 정말 이러한 노자의 말씀은 구구절절 뼈골에 사무친다. 타인을 이긴다 함은 힘이 있다[有力]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강함이 아니다. 진정한 강함은 나를 이기는 데만 있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유력(有力)함은 강(强)함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나의 클리닉에 얼굴에 꼬무락지가 자꾸 솟아 괴로움을 호소하는 젊은 여성이 많이 찾아온다. 아무리 얼굴에 피부과 약이나 비싼 화장품을 발라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을 얼굴에 덕지덕지 발라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 해답은 단순하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것이다. 더러운 것들을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상화(上火)가 되어 얼굴에 분화구가 분출하는 것이다. 저녁에 먹는 것을 삼가하고, 쓸데없이 냉장고를 열어보는 바보짓을 하지 않고, 화기(火氣)를 돋구는 음식들을 삼가하고, 피끓는 행동들을 삼가하면 얼굴에 꼬무락지가 돋을래야 돋을 길이 없다. 곧 상화(上火)가 가라앉고 얼굴이 차분하게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비만환자들만 해도 마찬가지다. 덜 먹기만 하면 해결이 되는 것이 비만증이지만, 그것 하나 해결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기와의 싸움이다. 성욕의 충동도 사정의 순간이 지나가면 후회만 남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색욕을 밝히지 아니하고 보정(補精)을 했더라면 보다 더 창조적인 에너지가 남아 돌아갈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것이 곧 가련한 인간의 일상이다.
5. 인생은 똥이다
여기 위대한 과학자가 한명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매일 매일 변비로 고생한다고 생각해보자! 사실 이 변비라는 놈처럼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없다. 똥 한번 눗는다는 것이 그토록 힘들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일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 해봐야 그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바에야 사실 평범한 수많은 우수한 인력의 한 명일 뿐이다.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 그가 일류대학교의 존경받는 석학으로 정년퇴임 했을지언정, 그의 모든 것은 똥을 누기 위한 인생이었을 뿐이다. 똥 눗기 위해 먹고, 똥 눗기 위해 운동하고, 똥 눗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강의하고, 체조하고, 약 먹고, 똥 눗기 위해 시간조절하고, 잠조절하고, 똥 눗기위해 성교하고, 똥 눗기위해 감정을 조절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인생은 똥 눗기위한 인생이었다. 그의 인생의 매일매일 닥치는 가장 심각한 문제상황은 미적분의 수학공식이 아닌 대변이었던 것이다. 과학적 탐구보다 똥 눗는다는 상황이 더 절실한 인생의 드라이브였을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모든 사람의 인생이 이러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생은 똥이다. 먹는 것, 똥 눗는 것, 성교하는 것, 이러한 식색(食色)의 문제상황 하나 하나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승자(自勝者)’를 발견하기 힘들다. 진정한 강자는 남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는 곧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 과식을 하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뱃속 나쁠 때 밥 먹으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그 욕구 하나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자가 우리 주변에 몇 명이나 있을까? 오호 애재로다! 너 가련한 자 너 인간이여 !
왕필은 말한다.
남을 이기는 자는 단지 힘이 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외부적 사물로써 자신의 힘을 손상시키지 않고 스스로 이기는 자만 못한 것이다. 지혜를 타인에게 사용하는 것은 그 지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힘을 타인에게 사용하는 것은 그 힘을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밝음(깨달음)을 자신에게 쓰면 사물이 나를 피할 바도 없이 자유자재롭다. 힘을 자신에게 쓰면 사물이 자기 주장만 하는 방해물로서 날 괴롭힐 바가 없는 것이다.
勝人者, 有力而已矣, 未若自勝者, 無物以損其力. 用其智於人, 未若用其智於己也. 用其力於人, 未若用其力於己也. 明用於己, 則物無避焉. 力用於己, 則物無改焉.
6. 돈을 더 벌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 그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우리는 누구든지 물질적 풍요로움을 원한다. 우리는 누구든지 재물의 충족을 바란다. 우리는 누구든지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가난은 괴롭고 싫은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가난과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부를 향한 드라이브였다. 부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노자는 여기 제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느 풍요로운 부자청년이 예수에게 다가와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는데 아직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에 예수는 “네가 참으로 온전하고자 한다면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명한다. 이 청년은 재물이 많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근심에 찬 얼굴로 되돌아 가버린다. 이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아마도 그 청년은 다시 예수에게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돈 많은 그 어느 누구도 오늘날 교회는 다 나가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의 말은 너무 과격하다. 실천가능이 없는 무지막지한 얘기를 지껄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상황에서의 ‘방편설법’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한다면,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돈을 벌고 있는 것일까? 사실 교회재정은 다 부자들이 유지하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도 위선적인 상황이 아닌가?
문제는 이러한 현실적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예수의 언급이 물질적 부의 부정과 정신적 선업의 긍정이라고 하는 어떤 심(心)ㆍ신(身) 이원론적인 시각에서만 부(富)를 바라보게 만드는 오류를 조장시켰다는 데 있다. 이것은 물론 막스 베버의 주장대로 건강한 직업 (소명, vocation) 의식과 자본의 축적을 가져오게 만든 서구정신사의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부(富)에 대한 현실적 처방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노가는 결코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대립 속에서 물질의 부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富)가 추구된다는 것은 당연한 인생의 가치다. 그런데 부(富)의 궁극적 가치는 자체의 논리에 내재하는 것이다. 부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돈을 한번 벌면, 돈을 끊임없이 더 벌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돈을 더 벌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부의 순간은 바로 족(足)함을 아는데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부의 확장을 추구하는 한에 있어서 부는 찾아올 길이 없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부 그 자체의 역설이다.
7. 부의 무비판적 팽창주의는 비극을 낳는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최고의 영수라 할지라도 사실 먹고 자는 것은 몇 그램과 몇 평에 불과하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대기업의 영수님들은 생각보다 빈곤하게 살고 있었다. 순수하게 물질적 풍요로움이나 인생의 감각적 쾌락만을 가지고 형량해도 그들은 매우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내가 많은 대기업가들을 만나보고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인생이라는 현실의 지고의 쾌락은 식색(食色)이다. 그러나 식(食)을 즐기려 해도 정말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체험의 깊이와 심미적 견식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모르면 식(食)의 즐거움을 느낄 길이 없다. 그리고 내 위장상태의 강건함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색(色)을 즐기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색(色)은 인간이 관련되어 있는 한, 그 인간성과의 전체적인 교섭이 확보되지 않는 한 그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소모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부자가 부러울 것이 무엇인가? 현금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질문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다. 2ㆍ30년 전만 해도 이런 질문은 연약한 자들의 자기기만적 자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웬만한 노동자도 좋은 음식점이나 세계적인 관광 명소를 다 다니고 있고, 쓸만한 자동차를 다 굴리고 있다. 도무지 부자의 삶이 평민의 삶보다 더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차별적 기반이 너무도 상실되어버린 기묘한 평준사회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대기업의 승계문제를 놓고 가족간에 추태를 벌리는 부끄러운 사태들이나,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대기업이 물거품처럼 도산되고 해체되는 상황을 우리가 깊게 반성해보면, 분명 부의 무조건적 팽창주의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살아온 우리 모두의 삶이 반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지족부(知足富)’라는 이 한마디의 실천이 우리사회의 부(富)를 더 건전하게 지켜줄 수도 있다는 역설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 족(足)함을 알고, 그 족(足)함의 평형을 유지했더라면 그러한 비극적 결말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족(足)함을 모르는 무조건적 팽창주의는 금융질서의 교란과 그것과 밀착된 정치권력의 부패만을 낳았을 뿐이다. 족(足)함을 모르는 끊임없는 부의 증가는 결국 부의 파괴를 불러올 뿐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그 경영방식에 있어서 일찌기 ‘지족(知足)’을 실천할 줄 알았더라면, 그리고 기업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그들의 삶의 가치 속에서 ‘지족(知足)’의 소박한 중용을 지킬 줄 알았더라면 우리사회는 보다 아름다운 사회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8. 깨달은 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칭송하며
‘강행자유지(强行者有志)’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매우 비노자적으로 들린다. 3장에 우리는 ‘약기지 강기골(弱其志, 强其骨)’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지(志)라는 것은 약화되어야 할 부정적인 사태였다. 그러나 여기서 ‘유지(有志)’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강행(强行)’도 마찬가지로 매우 비노자적인 표현같이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노자사상이나 유가사상을 어느 한 면의 특성때문에 고착적으로 규정해버리고 마는 모든 선입견에서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노자든 그들은 어느 학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한 삶에 관한 가장 진실된 이야기를 말했을 뿐이다. 학파가 먼저 있고 그들의 삶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먼저 있었고 학파는 후대에 형성된 것이다. 노자는 도가사상과 무관하고, 공자는 유가사상과 무관하다.
여기 ‘행(行)’이란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관념적 지식이 아닌 실천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앞서 말한 ‘자지(自知)’, ‘자승(自勝)’의 행(行)이다. ‘강(强)’이란 여기서 ‘자승자강(自勝者强)’의 강(强)이다. 그것은 행(行)을 관철시킨다는 뜻이다. 관념은 지속하기가 쉽지만, 실천은 지속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강행자(强行者)래야 비로소 뜻있는[有志] 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천적 삶을 사는 자에게만, 그 실천을 꾸준히 실천하는 자에게만 우리는 ‘유지(有志)’라는 말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이다. ‘지(志)’라는 것은 삶의 진정한 가치의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지(志)가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뜻[志]이란 바로 내가 깨달은 바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통나무의 소박함이요, 관념의 유희가 아니다.
9. 노자가 말하는 오래 산다는 것이란?(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불실기소자구(不失其所者久), 못 하나가 잘못 박히면 한 근도 못 들고 피식 힘없이 빠져버린다. 그러나 제자리에 제 모습대로 잘 박히면 천근을 버틸 수 있다. 여기서 ‘소(所)’라는 것은 제자리를 말하는 것이요, 곧 ‘근본(根本)’을 말하는 것이다. 근본(根本)이란 곧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제자리를 잃지 않아야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힘없이 빠져버리는 못대가리처럼 뒹굴어 사라질 뿐이다. 왕필은 말한다.
밝음으로써 자신을 살피고, 자기의 힘의 정도를 올바르게 헤아려 행동으로 옮기고, 그 자기자리를 잃지 않으면, 반드시 영구함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以明自察, 量力而行, 不失其所, 必獲久長矣.
사이불망자수(死而不亡者壽), 이 구절은 인간에게 과연 ‘오래 산다[壽]’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일깨워주는 위대한 교훈을 설하고 있다. ‘오래 산다’는 것이 과연 물리적인 장수를 의미하는 것일까? 노자는 결코 인간의 죽음의 시점에 따라 ‘오래 삼’ 기준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동일한 사태의 다른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오래 살아도 일찍 죽을 수 있는 것이요. 일찍 죽어도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壽]에 대해 근원적인 정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왕필의 주가 정채(精彩)롭다.
사람이 비록 죽지만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도 있다. 그 삶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곧 수명의 온전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몸이 없어졌는데도 그 도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몸이 살아 있고 도가 떠나지 않는다면야 더 말할 것이 뭐 있으리오!
雖死而以爲生之, 道不亡乃得全其壽. 身沒而道猶存, 況身存而道不卒乎.
인간의 삶의 영원함은 곧 삶의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도(道)가 자연(自然)에 합치되어 그 도(道)가 영구히 보전되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은 쉽게 말하면 인간세의 역사의 연속성을 통하여 보전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적(道的)이지 않은 삶의 지속은 수(壽)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자의 생사관(生死觀)을 물리적 장수로 해석한다. 그리고 특히 ‘기공’이니 ‘단전’이니 운운하는 자들이 장수의 상업적 프로모션을 위해 노자를 팔아먹는 얕은 수작들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하게 오래 산다한들 가치 없는 삶에 그 무슨 의미가 있으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삶, 신체가 사라져도 그의 도(道)가 지속되는 삶이야말로, 짧던 길던, 비로소 장수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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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31장 - 전승(戰勝)하면 상례(喪禮)로 처리해야 한다 (0) | 2021.05.10 |
노자와 21세기, 30장 - 무력으로 일어난 자 무력으로 망하리 (0) | 2021.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