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
大道氾兮, 대도범혜, |
큰 도는 범람하는 물과도 같다. |
其可左右. 기가좌우. |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
萬物恃之而生, 만물시지이생, |
만물이 이 도에 의지하여 생겨나는데도 |
而不辭. 이불사. |
도는 사양하는 법이 없다. |
功成不名有. 공성불명유. |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
衣養萬物而不爲主, 의양만물이불위주, |
만물을 입히고 기르면서도 주인노릇 하려하지 않는다. |
常無欲, 상무욕, |
그리고 항상 무욕하니 |
可名於小; 가명어소; |
작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 |
萬物歸焉而不爲主, 만물귀언이불위주, |
만물이 모두 그에게 돌아가는데 주인노릇 하지 않으니, |
可名爲大. 가명위대. |
크다고 이름할 수도 있는 것이다. |
以其終不自爲大, 이기종불자위대, |
끝내 스스로 크다하지 않으니, |
故能成其大. 고능성기대. |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1. 넘실거리는 물처럼 어디든 흘러가는 도(大道氾兮, 其可左右)
이 장은 간본(簡本)에 없다. 백본(帛本)은 존(存)한다. 백본(帛本)과 왕본(王本)은 그 내용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백본(帛本)에 의거하여 왕본(王本)에 애매했던 부분을 크게 수정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대도범혜 기가좌우(大道氾兮, 其可左右)’, 넘실넘실 넘치는 막막한 대해 와도 같은 거대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구절이 실감있게 느껴질 수 있다. 범람하는 물과도 같아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다 한 것은 도(道)의 무차별 경지와 함께, 만물과 더불어 내재하는 무소편재(omnipresence)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도(道)의 본질은 초월성(transcendence)이 아니요 내재성(immanence)에 있다. 왕필
은 말한다.
이것은 도가 범람하여 가지 않는 곳이 없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두루두루 돌며 작용하니, 이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言道氾濫無所不適, 可左右上下周旋而用, 則無所不至也.
시간과 공간이 먼저 선행하고 그 속에 도가 넘실거린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도 그 자체로 인해 동시적으로 우리는 시ㆍ공의 모습을 그려야 할 것이다. 도(道)ㆍ시(時)ㆍ공(空)! 그것은 한 몸[一體]이다!
2. 공을 이루더라도 공에 대해 소유하지 않는다(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만물이 이 도에 의하여 생겨난다. 도(道)는 곧 만물(萬物)이 생멸(生滅)하는 장(場)이다. 그렇지만 도는 사(辭)하지 않는다.
여기 ‘사(辭)’에 관해서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잔소리 한다’, ‘일일이 간섭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사양한다’, ‘밀어낸다(推辭)’의 뜻이다. 그러니까 ‘불사(不辭)’는 ‘마다하지 않는다’, ‘포섭한다’, ‘포용한다’, ‘만물과 항상 더불어 한다’, ‘모른 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사실 백본(帛本)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다. 아마도 백본(帛本)의 모습이 원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王本 |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功成不名有. |
帛乙 | 成功遂事而弗名有也. |
이 구절은 2장에 ‘萬物作焉而不辭’로 기출(旣出)하였던 것인데, 그 2장의 경우에도 작은 ‘萬物作而弗始’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2장의 ‘불사(不辭)’는 ‘불시(不始, 자기가 주관하여 무엇을 시작하지 않는다)’의 오사(誤寫)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본(王本)의 ‘萬物恃之而生, 而不辭’는 후대의 삽입일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을 삽입하면서, 백본(帛本)의 ‘成功事遂而弗名有也’를 ‘功成不名有’로 압축시킨 느낌이 든다. 백본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다 포괄하고 있다.
공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공에 따르는 이름[名]이 생긴다. 그런데 그 이름을 소유하지 않는다[不名有]는 뜻이다. 2장의 ‘성공이불거(功成而弗居)’와 그 뜻이 대차가 없다. 공을 세우고 그 공에 대한 자기 이름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 겸양과 무아, 무소유의 미덕만 사회의 지도자들이 발휘해도 우리사회는 보다 편안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사회가 될 것이다.
3. 상무욕(常無欲)에 대한 왕필과 고명의 해석 차이(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 而不爲主, 可名爲大)
처음 시작하는 ‘의양만물이불위주(衣養萬物而不爲主)’가 백본(帛本)에는 그 다음 구절과 동일한 모습인 ‘만물귀언이불위주(萬物歸焉而弗爲主)’로 되어 있다. 아마도 백본(帛本)의 모습이 보다 정확한 원래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여기 재미있는 해석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萬物歸焉而弗爲主, | 則恒无欲也, | 可名於小. |
萬物歸焉而弗爲主, | 可名於大. |
위의 표를 살펴보면, 병치되는 두 문장에 있어서 ‘즉항무욕야(則恒无欲也)’라는 구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소(小)와 대(大)가 결정되고 있다. 왜 항무욕(恒无欲, 常無欲)이 있으면 소(小, 작다)라 이름할 수 있고, 항무욕(恒无欲)이 없으면 대(大, 크다)라 이름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여태까지 그 아무도 명료하게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서노자교주(帛書老子校注)』를 낸 고명(高明)선생은 이 문제를 파헤치고 있는데 그 또한 참고의 가치가 있다.
전통적으로 이 소(小)와 대(大)의 문제는 우주의 상대적 특질을 말하는 것으로 포폄(褒貶)의 맥락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소(小)는 마이크로코스모스의 세계요, 대(大)는 매크로코스모스의 세계다. 소(小)가 대(大)일 수 있고, 대(大)가 곧 소(小)일 수 있다는 맥락에서 이것은 도(道)의 무한대와 무한소가 상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필(王弼) 이래의 모든 주석가들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왜 ‘상무욕(常無欲)’의 존재가 소(小)와 대(大)의 가름의 기준이 되는지 아무도 명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욕하기 때문에 작은 세계를 보고, 무욕함이 없기 때문에 큰 세계를 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소대(小大)에 관한 왕필의 주를 보자.
만물이 모두 도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그러나 일단 생겨난 후에는 자기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인지 알 바 없다. 그러므로 천하사람들이 항상 무욕하게 되면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게 되며, 도와 같은 것이 만물에게 은혜를 베푼다 생각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작다’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萬物皆由道而生, 旣生而不知其所由. 故天下常無欲之時, 萬物各得其所, 若道無施於物, 故名於小矣.
만물이 도로 다 귀순함으로써 생겨난다. 힘에 부림을 당하여도 어디서 그것이 말미암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은 결코 ‘작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이름하여 ‘크다’라고 한 것이다.
萬物皆歸之以生, 而力使不知其所由. 此不爲小, 故復可名於大矣.
사실 그럴 듯하면서도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고명(高明)은 전체 문맥의 흐름상 소(小)는 부정적 함의가 있고 대(大)는 긍정적 함의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의 해석은 ‘상무욕(常無欲)’의 해석으로 좁혀진다.
고명(高明)은 『한비자(韓非子)』 「해로(解老)」편 2에 38장의 ‘上德無爲而無不爲也’를 해석한 구문에 좀 특이한 해석방식이 있는 것을 그 근
거로 삼고자 한다.
무위하고 무사하여 비우려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의식상태가 제약을 받음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所以貴無爲無思爲虛者, 謂其意無所制也.
대저 도술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의도적으로 무위무사함으로써 비우려한다는 것이다. 대저 의도적으로 무위무사하여 비우려 하는 자들은 그 의식상태가 항상 비운다고 하는 의식을 떠날 수가 없다. 이것은 곧 비운다고 하는 것에 제약당하는 것이다.
夫無術者, 故以無爲無思爲虛也. 夫故以無爲無思爲虛者, 其意常不忘虛, 是制於爲虛也.
참으로 비운다하는 것은 그 의식이 저절로 제약당함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지금 비움에 제약당하는 것을 어찌 비움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마음을 비운 자들의 무위는 무위를 고정적인 실체로 생각하는 법이 없다. 무위를 고정적인 실체로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비울 수 있는 것이다.
虛者, 謂其意所無制也. 今制於爲虛, 是不虛也. 虛者之無爲也, 不以無爲爲有常. 不以無爲爲有常, 則虛;
참으로 비우면 왕성한 덕이 생겨난다. 왕성한 덕이야말로 상덕이다. 그래서 상덕은 함이 없고 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虛, 則德盛; 德盛之謂上德. 故曰: “上德無爲而無不爲也.”
고명(高明)은 바로 ‘상무욕(常無欲)’이라는 삽입구가 여기 「해로」에서 말하는 항상 무욕함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허위적 상태로 해석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허위적 무욕에 사로잡혀 있으면 ‘보잘 것 없다[小]’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러한 허위적 무욕에 사로 잡혀 있지 않을 때 ‘위대하다[大]’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바로 다음의 ‘끝내 스스로 크다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라는 구문과 내재적 논리의 연속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탁견(卓見)이라 할 것이지만 결코 왕필(王弼)의 주석이 틀렸다 말할 수는 없다. ‘상무욕(常無欲)’이 『노자』 전체 텍스트의 문맥 속에서 그렇게 부정적인 허위의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할 당위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4. 작은 데서 이루고 쉬운 데서 도모하라(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우리는 이미 7장의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과 같은 논리를 이해하고 있다. 왕필의 주를 보자!
큰 것을 그 작은 데서 이루고 어려운 것을 그 쉬운 데서 도모하여라.
爲大於其細, 圖難於其易.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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