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텅 빈 하늘의 바람 소리
바람 이야기
남자기가 탁자에 기대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 앞에 시중들며 서 있던 안성자유가 물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진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탁자에 기대 앉아 있는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 앉았던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南郭子綦隱几而坐, 仰天而噓, 嗒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 曰: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几者, 非昔之隱几者也?”
남곽자기가 말했다. “자유야, 현명하게도 너는 그것을 질문하는구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너는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子綦曰: “偃, 不亦善乎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汝聞人籟而未聞地籟, 汝聞地籟而不聞天籟夫!”
안성자유가 물었다. “감히 그 의미를 묻고 싶습니다.”
子游曰: “敢問其方.”
남곽자기가 말했다. “대지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이 울부짖는다. 너는 무섭게 부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높고 깊은 산이 심하게 움직이면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 마치 코처럼, 입처럼, 귀처럼, 병처럼, 술잔처럼, 절구처럼, 깊은 웅덩이처럼, 좁은 웅덩이처럼 생긴 구멍들이 각각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탁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낸다. 앞의 것들이 ‘우우’하고 소리를 내면 뒤의 것들은 ‘오오’하고 소리를 낸다. 산들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거센 바람에는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다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해진다. 너만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하거나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子綦曰: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號. 而獨不聞之翏翏乎? 山林之畏佳, 大木百圍之竅穴, 似鼻, 似口, 似耳, 似枅, 似圈, 似臼, 似洼者, 似汚者. 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 咬者, 前者唱于而隨者唱喁, 冷風則小和, 飄風則大和, 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안성자유가 말했다. “땅의 피리가 온갖 구멍들이라면, 사람의 피리는 대나무관들을 붙여 만든 악기들이군요. 감히 하늘의 피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子游曰: “地籟則衆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남곽자기가 말했다. “만 가지로 다르게 소리를 내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서 모두 자신이 취한 것이다. 그렇게 소리 나도록 한 것은 그 누구인가!” 「제물론」 1
子綦曰: “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耶?”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
『장자』는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략 30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장자 본인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장자를 너무나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의 사유가 합류해 만들어진 책입니다. 물론 강물의 수원지는 장자이지만, 무수한 지류들이 합류되어 섞이면서 『장자』라는 하나의 거대한 강물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합류한 지류들 중에 맑은 물을 흐리는 탁한 것들도 있고, 심지어 맑은 물을 썩게 만드는 오염된 것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대학과 연구소의 많은 연구자들은 지금도 『장자』에 합류한 다양한 흐름을 식별하려는 연구를 쉬지 않고 있죠. 다행히도 공통된 의견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장자』 중 내편에 속한 일곱 편들, 그중 두 번째 편인 「제물론」 편은 장자 본인의 사유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제물론」 편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물론 「제물론」도 다른 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 묶인 이야기들은 문학적 감수성뿐만 아니라 지적 영민함이 최상의 수준입니다. 분명 「제물론」 편은 매우 영민하고 섬세한 정신이 쓴 것이 확실합니다. 장자 본인이 썼는지 아니면 장자보다 더 장자적이었던 익명의 저자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장자가 직접 쓴 이야기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은 있습니다. 그만큼 「제물론」 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물론」 편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는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수백 번 읽었지만 아직도 설렘을 주는 이야기, 바로 ‘바람 이야기’입니다.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스승 남곽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바람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제자는 오랫동안 스승을 모시고 있었기에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스승이 어딘가 이상하기만 합니다. 스승이 생면부지의 남인 양 느껴진 것입니다. “오늘 탁자에 기대 앉아 있는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 앉았던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기뻐합니다. 제자의 섬세함과 영민함만큼 스승이 기대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스승은 제자의 의구심을 풀어주려고 지금의 자신이 어제의 자신과 달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 ‘오상아(吾喪我)’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상(喪)’이라는 한자는 ‘상을 치른다’나 ‘상을 당했다’고 할 때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이 먼저 죽을 때 그를 떠나보내는 예식을 상례(喪禮)라고 하고, 상을 당한 가족을 상가(喪家), 상가에 가서 그 유족을 위로하는 것을 문상(問喪)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빈 배 이야기에 등장하는 ‘허(虛)’, 즉 ‘자신을 비운다’는 말보다 ‘상아(喪我)’라는 표현은 더 강렬한 데가 있습니다. 바구니에 있던 사과를 꺼내는 것은 결과적으로 바구니가 비는 것은 마찬가지더라도, 사과를 꺼내 매장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니까요. 그만큼 ‘상아’는 ‘허기’보다 강한 개념이죠. 그래서 제자는 스승에게서 무언가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겁니다. “몸은 진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자신을 비운다거나 아니면 자신을 잃는다는 것이 물론 마취 상태나 혹은 코마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의식이나 소유 의식 혹은 허영의 마음을 없앤다는 말이니까요. ‘나는 똑똑해’ ‘나는 진리를 알아’ ‘나는 남자(여자)야’ ‘나는 돈이 많아’ ‘나는 섹시해’ 등등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렇지만 ‘비운다’나 ‘잃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무하다거나 부정적인 느낌이 들 겁니다. 제자 안성자유가 시든 나무나 꺼진 재라는 인상을 받은 것도 다 이해가 되죠. 한마디로 제 자는 “자신을 잃는 경지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얻은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감지한 제자의 영민함이 기뻐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경지에 오른 것이 행복해서인지, 스승은 죽음의 냄새를 맡은 제자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에게 ‘오상아(吾喪我)’의 경지 혹은 실존의 상태는 잿빛의 어두운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풀빛의 생생한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아니라 밝음, 허무가 아니라 충만, 부정이 아니라 긍정, 무기력이 아니라 생기, 한마디로 사(死)가 아니라 생(生)의 이미지를 느껴야 ‘오상아’의 경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 남곽자기는 피리에 비유해 제자의 잘못된 인상을 고쳐주려 합니다.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안성자유의 의문 덕분에 장자의 속내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바람의 소리는 어디서 생긴 걸까
남곽자기는 먼저 사람의 피리 소리, 땅의 피리 소리 그리고 하늘의 피리 소리를 이야기하면서 제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너는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단 스승은 제자가 최소한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의 피리 소리, 그것은 관악기가 내는 소리를 말합니다. 원문에 등장하는 비죽(比竹)이 바로 사람의 피리죠. ‘비(比)’는 ‘옆으로 나란히 놓는다’는 뜻이고, ‘죽(竹)’은 ‘대나무’를 가리키니, 리코더가 아니라 팬플루트처럼 생긴 대나무 관악기가 바로 비죽입니다. 생황(笙簧)이 아마 대표적인 비죽일 겁니다. 사람은 비죽의 대나무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이미 장자는 자신을 비우거나 잃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암시합니다. 대나무 관이 막혀 있으면 입으로 아무리 바람을 불어넣어도 소리 자체가 나지 않을 테니까요. 오직 대나무 관이 비어 있어야 소리가 생길 수 있죠. 스승은 이 점을 제자의 마음에 더 강하게 새기기 위해 땅의 피리 소리를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원문을 보면 스승은 사람의 피리 소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대나무 관악기 소리는 이미 제자도 들어보았을 테니 너무 진부한 비유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들어보았을 수도, 아니면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묘사하는 데 그리 공을 들이죠.
대나무 악기와 같은 사람의 피리, 즉 인뢰(人籟)와 달리 땅의 피리로서 지뢰(地籟)는 사람들이 내뱉는 바람이 아니라 세기나 강도가 다른 수많은 바람들,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들에 의해 소리를 냅니다. 땅에는 깊이와 넓이 그리고 모양이 다른 수많은 구멍들이 있기 때문이죠. “큰 나무의 구멍들, 마치 코처럼, 입처럼, 귀처럼, 병처럼, 술잔처럼, 절구처럼, 깊은 웅덩이처럼, 좁은 웅덩이처럼 생긴 구멍들”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 땅 표면의 구멍들이 지뢰의 정체였던 겁니다.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탁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는 바로 바람이 이들 구멍과 만나 만들어진 소리였죠. 안성자유도 분명 이런 수많은 소리들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소리들을 구멍과 바람의 마주침으로 듣지는 못했죠. 익숙한 들음이 존재론적 들음으로 반전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아니, 산에서 들리는 자연스러운 소리도 이제 지뢰의 소리로 인식하는 순간 안성자유의 인식은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산에서 울려 퍼지는 땅의 소리들, 그 각각은 모두 하나하나의 경이로운 기적처럼, 특정 모양의 구멍이 특정 세기의 바람을 만나는 기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경이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해진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구멍과 바람이라는 존재론적 구별이 없다면 이 묘사는 나올 수도 없으니까요. “너는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하거나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라는 표현이 인상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구멍과 마주치지 않은 바람에 대한 사유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묘사입니다.
마주침의 존재론 혹은 마주침의 현상학은 그 자체로도 매우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장자 사유의 특이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바람 소리가 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바람 소리가 났다고 하면 그 소리에는 ‘어떤 구멍’과 ‘어떤 바람’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이 마주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구멍의 모양새는 다양하고, 바람도 그 속도와 방향에 따라 복수적입니다. 구멍의 모양에 따라,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각자 고유한 바람 소리를 냅니다. 특정 바람 소리, 예를 들어 ‘우우’하는 소리나 ‘오오’하는 소리는 그 자체로 존재 근거는 없습니다. 특정 구멍과 특정 바람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특정 바람의 소리는 어디서 생긴 걸까요? 바람이 내는 소리일까요, 아니면 구멍이 내는 소리일까요? 이 질문은 장자 사유의 핵심이자 화두입니다. 바람일까요, 구멍일까요? 어디서 소리가 나올까요? 답은 바람도 구멍도 아닙니다. 이 둘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죠. 구멍이 없으면 바람은 거의 비존재에 가깝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구멍이 없으니 소리를 낼 수 없으니까요. 구멍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구멍은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지요.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소리가 바람에서도 나온다고 해도 좋고, 구멍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죠. 바람과 구멍이 마주쳤다고 전제한다면 말입니다. 마주침의 존재론은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의 탄생도 그리고 변화도 모두 어떤 마주침의 효과이기 때문이죠. 수증기와 추위, 그리고 씨핵이 될 만한 먼지가 마주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눈송이처럼 말입니다. 물론 반대로 마주침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 여운만 남긴 채 모든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과 같다
안성자유는 모든 소리에는 구멍과 바람이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마치 최상의 음악일 것 같은 하늘의 피리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죠. 하늘에는 대나무 관과 같은 구멍도 혹은 나무나 산, 땅이 품고 있는 다양한 구멍들과 같은 구멍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바람이 거센 날 하늘에서는 분명 소리가 들려옵니다. 물론 인뢰(人籟)와 지뢰(地籟)에서 나는 소리처럼 나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소리는 아닙니다. 간헐적이고 순간적으로 아주 날카롭게 혹은 아주 조용하게 소리가 들리다 어느새 소멸합니다. 잠시의 틈을 주지 않고, 또 앞에 들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소리가 등장하지요. 하늘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즉 천뢰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알 타이(Altay)산맥이나 티베트고원에 서서 바람을 맞는 장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알타이나 티베트 출신은 아닐지라도 장자는 그곳을 여행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긴 목적이 없는 여행, 소요유의 달인인 장자가 알타이나 티베트 방향으로 자기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을 리 없지요. 「소요유」 11편을 보면 이우(犛牛)라는 특이한 소가 등장합니다. 털이 많은 검은 소를 말합니다. 장자는 이 소를 마치 대붕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 크기가 하늘을 드리운 구름 같았다[其大若垂天之雲].” 흰 구름 사이로 모습이 아른거리는 거대한 소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야크입니다. 구름과 눈을 벗 삼아 고산을 배회하는 검은 소 야크입니다. 야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장자가 그만큼 바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 바람 소리를 들었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지금도 히말라야나 티베트에는 불경이 적힌 타르초(tharchog)와 바람의 말이 그려진 룽따(lungta)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교 전통과 결합되었다 해도 이만큼 그곳은 대대로 바람과 그 소리가 중시되는 곳이었죠. 물론 중국의 높은 산에서도 천뢰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소리는 산의 많은 구멍들과 나무 구멍들이 내는 소리와 뒤섞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해발 5,000~6,000미터 이상 고산 혹은 그 정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도 자라지 않고 산의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만년설로 메워진 히말라야 고산들을 생각해보세요. 하늘에는 수천의, 아니 수만의 바람들이 만들어져 야생마들처럼 온갖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바람들은 부딪히기도 하고 스치기도 할 겁니다. 바로 이 순간 천뢰는 소리를 내게 됩니다. 구멍과 마주침의 존재론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입니다. 구멍은 없고 바람들만 있는데 소리가 나니까요. 그러나 안심해도 좋습니다. 마주침의 존재론은 여전히 유지됩니다. 그것도 더 근사하고 우아하게 이제 구멍과 바람의 마주침 대신 바람과 바람의 마주침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물론 소리가 나려면 구멍은 불가피합니다. 마주친 바람 중 어느 하나가 구멍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다른 바람과 부딪혀 순간적으로 움푹 패어 그만큼 구멍을 갖게 된 바람을 상상해보세요. 바로 그때 바람들이 소리를 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은 어떤 바람과 마주치느냐에 따라 구멍의 역할 도하고 계속 바람의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천뢰(天籟)에 조바심을 쳤던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스승은 말합니다. “만 가지로 다르게 소리를 내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서 모두 자신이 취한 것”이라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바람들이 바람으로 있다가 어느 순간 구멍이 되는 역동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남곽자기의 말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장자의 눈에는 인뢰(人籟)의 구멍도 그리고 지뢰의 구멍도 너무 사물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죠. 마치 마주침과 무관하게 실체처럼 존재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나무의 빈 공간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속이 꽉 찬 죽순을 보세요. 나무의 구멍들이나 산이나 땅의 구멍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마주 침에 의해 팬 겁니다. 구멍은 소리가 생기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구멍을 실체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천뢰가 이것을 가르쳐준 겁니다. 바람이면서 구멍일 수도 있는 바람! 바람 안의 구멍과 구멍 안의 바람! 자신을 비운다거나 아니면 자신을 잃는다고 할 때 우리가 구멍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이제 타자를 그 구멍에 담아 타자와 소통하는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멍의 상태를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대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도 아니니까요. 차라리 우리는 바람과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의 마음은 바람과 같은 것이며, 나아가 바람과 같은 것이어야만 합니다. 구멍이 되어 바람을 맞아 소리를 낼 수도 있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구멍에 들어가 그 구멍에 어울리는 소리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이유입니다. 바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제 남곽자기, 그러니까 장자가 던진 화두가 풀어지셨나요. “그렇게 소리 나도록 한 것은 그 누구인가!” 오늘도 타르초와 룽따는 촤르르 파르르 웁니다.
인용
9. 타자와 함께 춤을 /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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