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는 사람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의 목적지가 황하가 아니라 건너편 육지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황하는 없으면 좋았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황하에서의 시간은, 황하의 물결을 타는 시간은 없애도 되는 시간, 빨리 지나가야 하는 시간으로 보일 겁니다. ‘위(爲)’라는 한자를 아시죠. 사람들은 누군가와 술잔을 부딪치며 말하곤 합니다. “성적 향상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내 집 마련을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취업을 위하여!” 등등.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라 앞으로 도달해야 하는 어떤 상태를 생각하는 겁니다. 철학에서는 이런 것을 목적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목적에 대한 생각이 강하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지나가야 할 것이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미래에 달성할 목적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수단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런 문맥에서 바로 ‘합목적성(合目的性, Zweckmäßigkeit, purposiveness)’이라는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이 개념은 목적(目的, Zweck, purpose)에 부합한다는, 혹은 부합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장자』를 포함해 『도덕경(道德經)』 『논어(論語)』 등 중국 고전에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글자 그대로 무언가 위하는 것이 있는 행위가 바로 ‘유위’라면, 위하는 것이 없는 행위가 ‘무위’죠.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합목적성에 지배되는 행동’이 바로 ‘유위’이고, 대조적으로 ‘합목적성에 지배되지 않는 행동’이 바로 ‘무위’인 것입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저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라면 유위를 노동이라고, 무위를 놀이라고 했을 겁니다.
놀이가 주로 어린아이들의 행동에서 발견된다면, 노동은 어른들에게서 쉽게 확인되죠. 대부분 어른들에게는 수단과 목적이 늘 나뉩니다. 커피 물을 끓이기 위해 가스 불을 켠다면, 가스 불을 켜는 것이 수단이 되고 커피 물을 끓이는 것이 목적이 되죠. 커피물을 왜 끓이느냐 하면 이게 다시 수단이 됩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죠. 커피는 왜 마시나요? 이게 또 수단이 됩니다. 잠을 깨기 위해서, 이렇게 수단과 목적이 계속 분리됩니다. 중요한 것은, 합목적인 행동은 항상 행복을 뒤로 미룬다는 사실입니다. 가스 불을 켤 때는 행복하지 않고 물이 끓어야 행복하고, 물이 끓을 때는 행복하지 않고 커피를 마셔야 행복하고, 커피를 마실 때는 행복하지 않고 잠에서 깰 때가 행복하니까요. 반면 놀이처럼 합목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가스 불을 켤 때도 즐겁고, 물이 끓을 때도 즐겁고, 커피를 마실 때도 즐겁고, 잠이 깰 때도 즐겁죠. 정확히 말해, 즐겁지 않으면 가스 불도 안 켜고, 물도 끓이지 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고, 잠에서 깨지도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서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불장난은 그냥 불장난이고, 곤충 껍질을 모으는 것도 그냥 모으는 것이니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죠.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행복한 아이들을 질투하는 걸까요. 어른들은 지혜로운 척하면서 아이들을 훈계합니다. “그걸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매 순간 행복을 뒤로 미루며 행복의 꽁무니만 좇고 있는 사람들, 불행이 생활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훈계를 하는 걸까요.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결국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은 유위나 노동의 화신이었던 겁니다. 작은 배가 충돌했을 때 그가 화를 내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반대편 땅에 닿으려는 목적을 빨리 달성하는 걸 방해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물을 끓여야 하는데, 가스 불이 잘 켜지지 않아 짜증을 내듯 말입니다.
이제 빈 배 이야기의 의미, 혹은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뿐만 아니라, 주어진 순간을 부정하는 목적의식을 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빈 배는 바로 이를 상징합니다. 빈 배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도 없고 황하를 건너겠다는 목적의식도 없으니까요. 빈 배는 그저 황하의 물결과 즐거운 놀이를 할 뿐이죠. 이 점에서 세상에 노닌다로 번역된 유세(遊世)라는 말이 그 은은한 빛을 드러냅니다. ‘유(遊)’라는 동사는 ‘논다’ 혹은 ‘여행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여행은 출발과 귀가의 시간이 정해진, 일정이 미리 잡힌 관광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여행은 즐거우면 지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장자』 편집자는 장자가 제안한 여행에 ‘소요(逍遙)’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진짜로 한가로운 여행, 목적 없는 여행, 그래서 즐거운 곳이 있으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놀이와 같은 여행이 바로 소요유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노니는 세상은, 노닐고 있다면, 절대적인 긍정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요. 세상에 노니는 사람은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가고 싶으면 떠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자유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모든 사람들이 이 빈 배처럼 되는 사회가 장자가 꿈꿨던 사회일 겁니다. 빈 배와 빈 배가 떠다니는 세계! 육지에 빨리 이르려는 생각이 없기에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은 배들입니다. 물결을 타고 여유롭게 움직일 뿐이니 충돌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간혹 부딪혀도 쿵 소리가 아니라 통 소리가 날 겁니다. 그러면 까르르 웃음소리가 이어질 겁니다. 재미난 해프닝이 벌어졌으니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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