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대붕 이야기
북쪽 바다(北冥)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도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 방향으로 여행하려고 마음먹는다. (…)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
물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한 사발의 물을 바닥의 움푹한 곳에 부으면, 갈대는 그곳에서 배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 큰 사발을 띄우려 한다면, 그것은 바닥에 붙어버릴 것이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그 바람은 커다란 양 날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새는 구만리를 날아올라 자신의 밑에 바람을 두었을 때에만 자신의 무게를 바람에 얹을 수 있고, 등에 푸른 하늘을 지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다음에야 남쪽으로 향하는 자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背負靑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
메추라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며 지낸다. 이것 또한 ‘완전한 날기[飛之至]’인데,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는가?” 「소요유」 1, 2, 5
斥鷃笑之曰: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곤’은 어떻게 ‘붕’이 되었나
『장자』라는 방대한 이야기책에도 당연히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 본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장자』의 편집자는 고민했을 겁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장자』의 전체 운명을 결정할 테니까요. 시시하지 않아야 하고, 나아가 독자의 흥미도 자극해야 합니다.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아야 하고요. 또한 앞으로 읽을 모든 이야기의 기본적인 방향을 암시하기도 해야 합니다. 결과론적으로 『장자』의 편집자는 첫 이야기를 잘 선정했죠. 『장자』를 본격적으로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장자 하면 누구나 ‘대붕(大鵬)’이나 ‘대붕의 자유’를 연상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장자』의 첫 번째 편인 「소요유」를 시작하는 이야기는 바로 ‘대붕 이야기’입니다. 대붕 이야기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다른 이야기와 달리 대붕 이야기에는 유사한 내용이 중 복되거나 앞 구절을 부연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대붕 이야기를 최초로 기록한 사람이 그 이야기에 주석을 붙인 것 같은데, 그것이 편집자의 손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불행히도 『장자』의 편집자는 원래 이야기에 덧붙여진 주석을 도려내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장자』를 경전처럼 생각한 탓에 자신이 입수한 자료에 메스를 대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붕 이야기를 일종의 소설로 보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주석 부분은 금방 도려낼 수 있습니다. 방금 읽어본 대붕 이야기에 등장하는 생략기호는 그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대붕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죠.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크기가 수천 리나 된다고 하니 곤은 정말 거대한 물고기죠. 이 곤이 변해서 동일한 크기의 거대한 새가 됩니다. 바로 이 새가 붕(鵬)입니다. 문제는 붕은 새가 되었어도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움직일” 정도의 거대한 바람이 불지 않으면 붕은 남쪽 바다 방향으로 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붕은 그만큼 거대한 새였죠. 마침내 기다리던 거대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붕은 그 바람을 타고 올라 “하늘에 걸린 구름 같은” 양 날개를 움직여 남쪽 바다 방향으로 비행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붕이 된 것입니다. 곤이 붕으로 변하고 진정한 대붕이 되어 창공을 날 때까지 세 단계를 거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거대한 물고기인 곤의 단계, 둘째로는 거대한 새가 되었지만 아직 창공을 날 수 없는 붕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는 창공을 실제로 날게 된 대붕의 단계. 흥미롭게도 대붕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둘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의 변화, 그러니까 날지 못하던 붕이 바람을 타고 날면서 진정한 대붕이 되는 과정에만 신경 쓰기 쉽습니다. 사실 대붕 이야기 전체도 이 과정을 묘사하는 데 지면을 대부분 할애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붕 이야기의 진정한 매력을 온몸으로 느끼려면, 우리는 곤이 붕으로 변하는 첫 번째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 과정을 묘사하는 구절은 그 내용의 엽기성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매우 무미건조하고 짧습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도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여기서 우리는 “변해서 새가 되었다”로 번역되는 “화이위조(化而爲鳥)”라는 네 글자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곤은 붕이 된 것일까?’ 의문을 갖자마자 다른 의문들이 이어집니다. ‘물고기는 그냥 저절로 새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의지를 가지고 새가 된 것일까?’ 붕이 대붕이 되는 두 번째 과정, 즉 바람을 기다리고 그것을 타려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곤은 새가 되려는 의지를 가졌고 마침내 새가 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다른 의문이 저절로 생깁니다. ‘왜 곤은 새가 되려 했던 것일까?’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 Wittgenstein, 1889 ~ 1951)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려 할 것입니다. 행복해지려고 말입니다. 곤은 불행한 물고기, 정확히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아는 물고기였던 것입니다. 곤은 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을까요? 아마도 해답의 실마리는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곤은 아주 커다란 물고기여서 자신이 살고 있는 북쪽 바다가 너무 좁았던 겁니다. 북쪽 바다를 중국 북쪽 바이칼호(Lake Baikal)라고 상상해보세요. 실제로 기원 전후 중국 사람들은 이 거대한 호수를 ‘북해(北海)’라고 불렀으니까요.
인용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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