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네 선생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네 선생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3:56
728x90
반응형

 11.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네 선생 이야기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宋人資章甫而適越, 越人斷髮文身, 無所用之.

 

요임금이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를 평정했다.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그는 멍하니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소요유9

堯治天下之民, 平海內之政. 往見四子藐姑射之山, 汾水之陽, 窅然喪其天下焉.

 

 

토끼를 기다린 농부

 

장자에는 송나라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간혹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장자 본인이 만든 이야기를 만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자는 송나라 출신이거든요. 송나라는 상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전국시대의 작은 제후국입니다. 그래서인지 송나라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전통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보자면 현실감각을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로 유명했습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송나라 출신들은 바보나 멍청이의 대명사가 되고 맙니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편에 나오는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고사를 아시나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면서[] 토끼[]를 기다린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일을 하고 있는데,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얼떨결에 토끼 고기를 얻은 농부는 밭일을 포기하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기 시작합니다. 다른 토끼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죠. 바로 이 농부도 송나라 사람이었습니다. 한비자는 송나라 농부의 사례를 통해 전통을 묵수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송나라 사람들만큼 공개적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송나라 사람들이 바보거나 멍청이였을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수주대토 고사에 등장하는 송나라 농부가 생각이 없다기보다 생각이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일회적 사건을 심각하게 고민할 뿐만 아니라 밭일과 토끼잡이 사이에서 효율성까지 따집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보인 자기 사유에 대한 확신이죠. 그는 자기 판단을 확신하고서 과감히 밭일을 접으니까요.

 

송나라 사람이 지킨 나무 그루터기는 단순히 전통이나 통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사건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킨 나무 그루터기는 그가 옳다고 판단한 자신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한비자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킨 송나라 농부를 잘못 읽어냈습니다. 송나라 농부는 고지식해서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비유를 하자면, 송나라 사람은 이것저것 재느라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촉이 발동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판단을 믿고 밭일을 포기하는, 무모함에 가까운 그 경쾌함을 떠올려보세요. 송나라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각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실천하는 과감성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일회적 사건을 일회적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끌어내고 그것을 현실에 과감히 적용합니다. 평범한 바보나 멍청이는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창조적인 과학자나 비판적인 지식인만이 그렇게 할 수 있죠. 송나라 출신들은 주어진 관념이나 상식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개별 사건들로부터 법칙을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송나라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수정할 여지도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적용해보기 때문입니다.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던 송나라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곧 깨달을 것입니다. 효율성을 따져 밭일을 접은 그입니다.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나무 그루터기 지키기를 그만둘 겁니다.

 

장자도 송나라 출신입니다. 사건들에 민감하고 생각이 많지만 뭔가 결정하면 곧바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죠. 통념이나 상식을 생각 없이 따르기보다는 주어진 사건에 촉을 세우고 그로부터 기존 통념과 상식을 넘어서고자 사유를 거듭하는 철학자, 그가 바로 송나라적인, 너무나도 송나라적인장자였습니다. 그래서 송나라 사람이 등장하는 장자의 이야기들을 송나라 출신에 대한, 한비자나 당시 전국시대의 편견에 입각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면 송나라 철학자가 송나라 출신들을 조롱하니, 장자가 일종의 자학 개그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통념에 사로잡혀 현실에 매몰된 사람들, 당연히 별다른 생각이 없는 사람들보다 송나라 출신들은 더 바람직한 덕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보처럼 보이고 멍청해 보일 만큼 생각이 많고 과감했을 뿐입니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그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삶의 전망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송나라 출신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 했죠. 그래서 장자가 쓴 송나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송나라 출신이라는 그의 핸디캡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송나라 출신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장자는 송나라적인 것마저 넘어서려고 합니다. 송나라 사람들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나아가 일반화 자체의 논리마저 비판적으로 성찰하니까요. 바로 이것이 송나라적이지만 송나라적이지만은 않았던 장자 사유의 특징일 것입니다. 지금 읽어볼 네 선생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송나라적인 것이 무엇인지 혹은 송나라적인 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이야기도 없으니까요

 

 

 

 

 

내가 나로 강렬하게 서는 순간

 

네 선생 이야기는 장보(章甫)’라는 모자를 가지고 월나라로 장사하러 떠난 송나라 상인에 대한 일화로 시작됩니다. 송나라 상인은 장보를 가지고 월나라에 들어가자마자 그야말로 멘붕에 빠지고 맙니다. 월나라 사람들은 장보건 무엇이건 모자 자체를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곳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에 가깝게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나라 상인이 되어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후적으로(ex post factor)이 이야기를 읽지 말고 사전적으로(ex ante factor) 읽어야 합니다. 사후적으로 읽으면 장자가 송나라 상인의 예로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얕은 해석만 남게 되니까요. 상인은 월나라로 들어가기 전에 혹은 사전에 월나라 사람들이 모자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그저 막연하게 월나라 사람들도 모자를 쓰리라 믿었던 거죠. 장보는 오랜 문화 전통을 자랑하는 송나라에서 만든 세련된 모자이니 월나라에서는 명품 취급을 받아 비싼 가격에 팔리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는 월나라에 가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송나라 밖으로 과감하게 나간 겁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던 우물 밖으로 나간 셈이죠. 송나라적인 모험심이자 무모함입니다.

 

모자를 쓰지 않는 월나라로 모자를 팔러 간 송나라 상인이 되어보면, 우리는 외부성(externality)이나 타자성(otherness)을 경험하게 됩니다. 월나라로 들어가기 전, 그곳은 송나라와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몸소 월나라에 들어간 순간 송나라 상인은 과거에 자신이 생각했던 월나라가 자기 내면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 내면으로 환원되지 않은 월나라, 모자를 쓰지 않는 월나라는 바로 외부성으로서의 월나라입니다. 외부성의 경험은 타자성의 경험과 함께합니다. ‘다르다는 경험, 정확히 말해 나와는 다르다는 경험이 타자성의 경험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부성이나 타자성의 경험은 동시에 내부성(internality)과 주체성(subjectivity)의 발견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낯선 외부로서 월나라에 들어간 송나라 상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겁니다. 외국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김치를 먹는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다 외국에 가면 음식 문화가 완전히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 나는 김치를 먹는 한국인이구나를 자각합니다. 주체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내가 나로 가장 강렬하게 서는 순간이 타자를 발견하는 때입니다. 특히 그 타자가 낯설고 나를 당혹시킬수록 나를 더 강렬하게 자각할 겁니다.

 

자기 생각 속의 월나라와는 다른 실제 월나라를 발견한 순간 송나라 상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외부에 직면한 내부는, 혹은 타자와 마주친 주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쉽게도 네 선생 이야기는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 그 경우의 수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일 겁니다. 첫째는 다시 송나라로 돌아오는 것이죠. 이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에 놀라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문제는 돌아와서도 그가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이죠. 이미 우물 바깥을 경험해버린 개구리니까요. 둘째는 월나라를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계몽하는 겁니다. 문신을 지우게 하고 억지로 모자를 쓰게 만들어 모자를 팔아먹는 겁니다. 월나라의 타자성과 외부성을 제거하고 이 나라를 송나라처럼 만드는 방법이니, 제국주의자의 길이라 할 만하죠. 세 번째는 가지고 간 장보를 깔끔하게 태워버리는 겁니다. 우물 안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우물 바깥의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타자들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는 월나라에서 문신사가 되어 살아갈 수도 있죠. 물론 문신사가 된 이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송나라로 돌 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월나라에서만 나는 재료로 만든 모자를 가지고 말입니다. 이제 송나라 사람도 아니고 월나라 사람도 아닌, 아니 송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월나라 사람이기도 한 이 사람은 어떤 외부와 직면해도 어떤 타자와 마주쳐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천하를 잃어 땅에 묻다

 

네 선생 이야기가 송나라 상인의 이야기로 끝났다면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송나라든 월나라든 쓸모의 형이상학에 포획되어 있는 곳, 허영을 증폭시키는 국가질서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자든 문신이든 그것은 모두 신분과 지위 혹은 부에 대한 허영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허영이 작동하기에 더 고급스러운 모자를 만들거나 파는 사람이 존재하고, 더 크고 아름다운 문신을 새기는 문신사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송나라 상인은 더 큰 이득을 위해 월나라에 간 것입니다. 마치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는 것이 밭일을 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다고 생각했던 송나라 농부처럼 말입니다. 결국 여러 미덕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적인 것의 바닥에는 이익에 대한 동물적인 본능, 강력한 이기주의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송나라적인 것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쓸모와 허영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하염없는 서글픔을 가졌던 장자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이 품은 새로운 사유를 향한 힘, 그리고 외부성에 몸을 던지는 과감함에 새로운 방향성을 주려고 합니다. 송나라 상인 이야기 다음에 요임금 이야기를 덧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어쩌면 네 선생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송나라 상인 이야기는 요임금 이야기를 위한 밑그림이나 일종의 떡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선생 이야기의 후반부 요임금 이야기는 송나라 상인 이야기만큼 짧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 요임금은 중국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임금은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멍하게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죠.” 이 짧은 이야기를 맛보려면 천하네 선생이라는 단어가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천하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라는 뜻입니다. ‘하늘-하늘의 아들-정신노동자-육체노동자’, ()-천자(天子)-대인(大人)-소인(小人)’으로 이루어진 국가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천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국가 질서가 지상(地上)의 모든 곳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물론 요임금은 처음에는 국가질서가 모든 곳에 통용된다고 믿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도 국가질서는 작동하리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치 월나라도 모자를 쓰리라 믿었던 송나라 상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면서 국가질서가 미치지 않는 외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수(汾水)는 황하 북쪽에서 황하로 흘러들어오는 지류입니다. 유목민들이 살았던 중국 북쪽 초원지대였죠. 그곳 네 명의 선생은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월나라 사람들처럼 국가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죠. 바로 여기서 요임금은 -천자-대인-소인이라는 피라미드 지배 구조가 우물 안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이제 네 선생이라는 표현, 구체적으로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생각해보죠.

 

국가질서든 종교 질서든 일자와 다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은 하나이거나 최고신이 존재합니다. 이 일자가 만물을 관장하는 것이죠. 국가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자는 한 명입니다. 이 한 명이 모든 피지배자를 지배할 때 인간 사회가 질서와 조화를 달성했다고 하죠.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은 일자와 다자의 구조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생이라 생각하고 서로를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네 선생이 있었으니까요. 한 명의 천자와 네 명의 선생의 만남! 이는 상명하복의 국가질서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와의 마주침을 상징합니다. 월나라라는 외부성과 마주쳤을 때, 송나라 상인에게는 세 가지 행동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송나라로 되돌아오는 것, 폭력적으로 월나라를 송나라로 개조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나라를 버리고 월나라에 몸을 던지는 것! 마찬가지로 요임금도 세 가지 행동이 가능합니다.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을 정복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다섯 선생중 한 사람이 되는 것! 역사적으로 보아 요임금은 첫 번째나 두 번째를 선택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네 선생 옆에 머문 것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요임금은 천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상천하(喪天下) 천하를 잃어 땅에 매장한 겁니다. 천하라는 관념 자체가 죽은 셈이죠. 다섯 번째 선생이 된 요임금을 따라 국가질서에 포획된 모든 이들이 차례차례 여섯번째, 일곱번째 선생이 되어가는 것! 어느 송나라 철학자의 꿈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 선입견

10. 텅 빈 하늘의 바람 소리 / 12. 보편적인 것은 없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