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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8. 누가 장자의 꿈을 깨울까?(나비꿈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8. 누가 장자의 꿈을 깨울까?(나비꿈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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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누가 장자의 꿈을 깨울까?

나비꿈 이야기

 

 

옛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物化]’고 말한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제물론26

 

 

나비꿈의 반전

 

나비꿈 이야기제물론편의 마지막 일화입니다. 48가지 이야기들을 선정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 48번째 이야기로 정해 둔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47개 이야기들이 집필 과정에서 수차례 순서가 바뀐 것과는 대조됩니다. 장자33편 중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장 잘 정리된 것이 제물론편입니다. 제물론편은 장자 본인이 직접 썼든 아니면 그의 추종자가 썼든 모든 면에서 가장 장자적인 편입니다. 장자적인 것이 이를 수 있는 최고 정점에 이른 편이니까요. 선정한 48개 이야기 중 제물론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나비꿈 이야기를 포함해 15개나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30퍼센트가 넘는 이야기들이 선택되었을 정도로 제물론편은 명불허전입니다. 바람 이야기라는 가장 문학적인 일화로 시작되는 제물론편에는 위대한 지적 라이벌 혜시와의 치열한 싸움, 철학적 사유의 한계와 가능성을 더듬는 사유 실험, 국가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 타자와의 소통과 기쁨의 공동체를 향한 집요한 노력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집니다. 아주 간결하고 함축적인 이야기들이 숨 돌릴 틈 없이 펼쳐지기에 독자들은 일종의 지적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입니다. 제물론편을 편집한 사람도 충분히 예견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제물론편을 마무리하면서 나비꿈 이야기를 배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덥지도 쌀쌀하지도 않은 날, 나뭇잎들이 만든 그늘 아래 평상에 누워 있습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다. 우리는 어느새 단잠에 빠져듭니다. 자유로운 나비가 되는 꿈이 이어집니다.

 

땅의 피리와 하늘의 피리를 울게 했던 강력한 바람, 거대한 대붕을 밀어 올렸던 태풍도, 그렇다고 대붕의 날갯짓으로 만들어진 바람도 아닙니다. 살랑살랑 자장가처럼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에 어울리는 한낮의 나른한 꿈입니다. 지금까지 제물론편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한낮의 꿈처럼 가볍게 생각했으면 하는 편자의 소망이 녹아 있습니다. 그만큼 제물론편은 우리의 지성을 무겁고 어둡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순간, 곤이 붕으로 변하는 순간. 혹은 붕이 대붕이 되는 순간은 산통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했다가는 산통에 대한 공포로 지레 겁을 먹고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악몽에서 깨자는 장자의 외침이 악몽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제물론편은 나비꿈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겁니다. 불가피한 산통도 봄날 한낮의 꿈처럼 가볍게 생각하라는 배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나비꿈 이야기도 쉽게 넘어가기에 무언가 걸리는 구석이 많습니다. 어쩌면 봄날 꿈처럼 생각하라는 말만큼 어려운 요구도 없을 겁니다. 시어머니, CEO, 지도교수, 사단장 등의 편히 있으라는 말만 큼이나 당혹스러운 주문일 수 있습니다. 하긴 실연이나 실직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는 사람에게 가볍게 생각하라는 충고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나비꿈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자기 이야기에 어떻게든 의미 있는 전언을 남기려는 욕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장자가 나비꿈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그는 끝까지 어쩔 수 없는 철학자였던 겁니다.

 

나비꿈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일화를 다룹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습니다.” 대붕이 되어 자유롭게 정착생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장자의 욕망이 그만큼 강했나 봅니다. 꿈에서조차 대붕은 아닐지라도 경쾌하게 나는 나비는 되었으니까요. 중력에서 벗어난 듯한 가벼움이 몹시 기분 좋았던 장자입니다. 자유롭고 너무나 상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나비라는 걸 조금도 의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만약 기분이 안 좋았다면 꿈에서도 나 이거 싫어하고 저항하게 되죠. 악몽에서 깨려고 이건 꿈일 거야하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는 장자의 술회 이면에는 자유로운 나비가 되는 꿈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그의 소망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꿈을 그 누가 일찍 깨고 싶어 할까요? 불행히도 나비의 수명만큼이나 장자의 나비꿈은 짧았습니다. 갑자기 장자는 꿈에서 깨버립니다. 나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장자 본인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겁니다. 장자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나비가 되어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다는 식의 평가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행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로 나비꿈 이야기가 그쳤다면, 독자들은 물론 편의 압박감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맞아! 제물론편은 장자가 꾼 나비꿈과 같은 거야!” 그런데 장자가 누구입니까? 동아시아 최고의 철학자입니다. 장자로 깨어나자마자 철학자로 돌아가 우리 사유를 자극하려고 합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반전입니다.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질문

 

장자는 방금 체험한 꿈을 모티브로 철학적 사유를 진행합니다. 문체는 일순간 차분하게 돌변하고 제물론편의 핵심 취지를 상기시키는 주제가 부각됩니다. 나비꿈으로 원기를 회복한 장자는 대붕이 되는 다양한 길을 안내하던 장자로 다시 돌아갑니다. 나비꿈 이야기에 장자는 독자들을 더 이상 무겁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작은 논증을 새겨 넣습니다. 논증은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비꿈 이야기에서 장자는 방법론적 유아론을 강조합니다. 지인(至人)이든 신인(神人)이든 전인(全人)이든 아니면 허()이든 신()이든 무슨 말인지 막연하더라도, 방법론적 유아론자가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리송한 개념들을 정확히 이해하리라는 장자의 친절한 배려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나만의 꿈이 아닐까? 이 물음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누구나 대붕이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라는 따뜻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나만의 꿈이 아닐까 하고 판단을 유예하는 순간, 우리는 타자와 세계를 의식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방법론적 유아론자가 자기만이 옳다는 철저한 유아론자, 타인과 세계의 반응에 마음을 닫은 철저한 유아론자가 되지 않는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나비꿈 이야기가 권하는 방법론적 유아론자의 제스처는 간단합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의식과 관련된 판단 유보입니다. 내가 나비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만의 꿈일 수 있고, 내가 장자라는 생각도 나만의 꿈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빈 배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타고 가는 삶의 배는 상당히 가벼워집니다. “이게 바로 나야.” “나 이런 사람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내가 누군데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런 자의식 과잉상태는 내가 누군지 아리송할 때 현저히 줄어들기 마련이니까요. 여담이지만, 장자적 인간을 식별하는 방법을 잠시 알려드릴까요?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장자적 인간들, 작은 대붕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의사입네, 변호사입네, CEO입네, 대통령입네, 선생입네, 직업군인입네, 스타입네, 부자입네하는 사람들은 허당인 경우가 많습니다. 삶이 누추하니 직업이나 유명세 혹은 부유함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불행한 사람들이죠. 한마디로 허영기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검사라는 자의식이 강하면 어디 가서든 누구를 만나든 검사질을 하려고 드니 이런 사람이 타자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죠. 더군다나 검사 자의식으로 충만한 이 사람이 검사복이라도 벗게 되면, 그는 아마 존재 이유를 박탈당한 느낌에 힘들어할 겁니다. 유니폼이 피부에 녹아들어 벗을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유니폼을 벗으려면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 가장 장자적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걸 모릅니다. 한 사람만이 간신히 타는 배도 수천 명을 태워 강을 건너게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물론 한꺼번에 수천 명을 나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명 태우고 내려주고, 다시 한 명 태우고 내려주는 식으로 배를 움직이면 수천 명이 문제겠습니까? 인류 전체도 거뜬히 태울 수 있죠.

 

의사도 되었다가 환자도 되었다가 남편도 되었다가 아들도 되었다가 아버지도 되었다가 강사도 되었다가 수강생도 되었다가, 배고프기도 했다가 배부르기도 했다가 멍하기도 했다가 영민하기도 했다가, 시인이 되었다가 막춤꾼도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수천 명을 태울 수는 없는 작은 배처럼 동시에 이 많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내려주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태울 수 있듯, 하나의 옷을 벗어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장자가 그리 강조했던 비움이나 잃은 바로 여기서 긍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나는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인가라는 물음에 판단을 유보하는 것, 즉 방법론적 유아론자가 되는 길 이 왜 비움과 잃음의 진실에 이르는지 분명해집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이 되지 못하고 선생으로 있는 사람, 손자 앞에서 할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사단장으로 있는 사람, 애인 앞에서 애인이 되지 못하고 검사로 있는 사람 등은 모두 꿈을 꾸며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아내 앞에서 선생을 버리는 사람, 손자 앞에서 사단장을 버리는 사람, 혹은 애인 앞에서 검사를 버리는 사람은 깨어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묘한 비약을 포착해야만 합니다. 아내와 마주칠 때 선생이면서 동시에 남편이 공존하는 상태가 반드시 있고, 손자와 마주칠 때 사단장과 할아버지가 공존하는 상태가 그리고 애인과 마주칠 때 검사와 애인이 공존하는 상태가 짧지만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장자의 이 말은 자의식에 대한 회의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비가 될 수도 장자가 될 수도 있는 힘을 상징하는 표현이니까요.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아내는 선생을 버리고 남편이 되라고 요청하는 타자이고, 손자는 사단장을 버리고 할아버지가 되라고 요청하는 타자이고, 애인은 검사를 버리고 애인이 되라고 요청하는 타자입니다. 소통을 하고 싶다면, 사랑을 하고 싶다면 우리는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에 이어 장자는 말합니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그렇습니다. 선생과 남편 사이에도, 사단장과 할아버지 사이에도, 그리고 검사와 애인 사이에도 반드시 구분이 있습니다. 이 구분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소통하려는 타자, 사랑하는 타자가 결정하니까요. 바로 여기서 장자의 방법론적 유아론이 빛을 발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나만의 꿈이 아닐까 하고 방법론적 유아론자는 부단히 자문합니다. 그러나 방법론적 유아론자는 스스로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 답은 타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타자의 목소리를, 그 반응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타자는 내 생각이 꿈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도 있고, 아니면 불행히도 내 생각이 나만의 꿈이라는 걸 폭로할 수 있으니까요. 암나비가 날아들어 유혹하면 장자는 나비인 겁니다. 반면 암나비를 멀리하면 지금 나비는 장자꿈을 꾸고 있는 셈이죠. 마찬가지로 들어가서 주무세요라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면 나비는 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소리와 상관없이 꽃향기에 취해 있다면 장자는 나비 꿈에 아직도 취해 있는 셈이죠. 장자가 나비꿈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로 번역되는 물화(物化)를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달생, 지북유(知北游), 그리고 즉양(則陽)편에서도 이 개념은 여물화(與物化)’라는 형식으로 사용되는데, ‘~와 함께라는 뜻의 ()’, ‘타자외물을 뜻하는 ()’, 그리고 변화하다라는 뜻의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니 정확히 말해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타자라는 발상입니다. 타자와 마주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타자와 마주치기 전에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자와 무관한 나의 정체성 혹은 나라는 자의식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으로 아내를 만나서도, 사단장으로 손자를 만나서도, 그리고 검사로 애인을 만나서도 안 됩니다. 아내를 마음에 담아 남편이 되려면, 손자를 마음에 담아 할아버지가 되려면, 애인을 마음에 담아 애인이 되려면 말입니다. 덕충부애태타 이야기에서 장자는 여물위춘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타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한다는 장자의 간곡한 충고입니다. 나비꿈을 꾸고 있었다는 걸 가르쳐주는 것이 장자의 아내였다면, 장자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건 암나비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나비꿈에서 깨어나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미소를 던지는 아내의 정다운 얼굴이 들어오면서 말입니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것만큼이 나 장주가 되어 글을 쓰는 것도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아지기시작한 장자입니다. 나비가 될 수도, 철학자가 될 수도, 남편이 될 수도, 친구도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되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대붕의 자유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봄날 오후의 장자입니다.

 

제물론편의 엔딩을 장식하는 나비꿈 이야기로 장자 강연을 마무리하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가 장자로 사는 것도 멋진 일이라는 그의 긍정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억압과 허영의 사회에서 대붕을 꿈꾼다는 것은 무척 외롭고 고단한 일입니다. 장자가 꿈속에서나마 작은 나비가 되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타자가 부재한 꿈은 그저 백일몽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쾌하고 기분 좋은 꿈에서 깨어난 씁쓸함을 떨구며 장자가 되뇌었을 생각일 겁니다. 지금까지 장자의 48가지 이야기로 대붕을 꿈꾸었습니다. 유쾌하고 기분 좋았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기는 힘든 아니 지속되어서도 안 되는 꿈입니다. 누가 어떤 얼굴로 저를 깨울지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어쨌든 장자의 조언에 따라 철학자입네, 선생입네, 남자입네, 저자입네, 강연자입네, 중년입네 하며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정체가 묘연한 사람에게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힘이 허락되니까요. 이제 장자가 되었던 꿈으로부터 완전히 깰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물론편 여희 이야기에서 장자는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장자꿈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날, 애틋함과 아련함 이 교차하는 작은 느낌마저 상쾌한 바람으로 씻어보는 날입니다. 안녕! 장자! “지금까지 나는 장자가 된 꿈을 꾸었다. 자유롭고 당당한 장자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나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나였다. 내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장자 사이에는 반드시 구 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고 말한다.”

 

 

정체가 묘연한 사람에게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힘이 허락되기까요.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7. 관이 좁은 위대한 죽음 / 에필로그: 떠날 수 있는 자유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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