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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6.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수영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6.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수영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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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수영 이야기

 

 

공자가 여량이라는 곳을 관광하고 있었다. 그곳 폭포는 삼십 길이나 되었고 그 물거품이 사십 리나 튈 정도로 험해 자라나 물고기 등도 헤엄칠 수 없는 곳이었다. 한 사나이가 그곳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자마자 공자는 그가 고뇌가 있어 자살하려 한다고 판단해 먼저 제자들을 보내 물가를 따라가 그 사나이를 건지게 하였다.

孔子觀於呂梁, 縣水三十仞, 流沫四十里, 黿鼉魚鱉之所不能游也. 見一丈夫游之, 以爲有苦而欲死也. 使弟子幷流而拯之.

 

그 사나이는 수백 보의 거친 물길을 지나 물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머리카락이 물결에 풀어진 채 노래를 부르며 둑 바로 아래 잔잔한 물에서 헤엄쳤다.

數百步而出, 被發行歌而游於塘下.

 

공자도 그를 따라가 물어보았다. “나는 그대가 귀신인 줄 알았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네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군. 물을 건너는 데 길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네.”

孔子從而問焉, : “吾以子爲鬼, 察子則人也. 請問: 蹈水有道乎?”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없네! 내게는 길이 없네. 나는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루고 있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나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물속에서 밀어내면 나도 같이 밀려 나오지. 물의 길을 따를 뿐,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네. 이것이 내가 물을 건너는 방법이야.”

: “, 吾無道. 吾始乎故, 長乎性, 成乎命. 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此吾所以蹈之也.”

 

그러자 공자가 물어보았다.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룬다는 그대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孔子曰: “何謂始乎故, 長乎性, 成乎命?”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내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했던 것이 과거이고, 내가 물에 깃들어 물에 편해진 것이 삶이고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명령이야.”

: “吾生於陵而安於陵, 故也; 長於水而安於水, 性也; 不知吾所以然而然, 命也.” 달생9

 

 

장자와 공자의 결정적 차이

 

산을 사랑했던 공자가 정착민적 사유를 대표한다면, 바람의 철학자 장지는 유목민적 사유를 대표합니다. 안정, 질서, 정의, 묵직함 등 공자가 중시하는 가치들은 모두 정착국가나 영토국가의 이념입니다. 공자가 천하를 긍정하고 천하에 머무는 방법을 모색했던 이유입니다. 반면 운동, 생성, 자유, 경쾌함 등은 부단히 떠날 수 있는 유목민들의 자긍심입니다. 장자가 천하를 넘어서는, 천하 바깥의 삶을 꿈꾸었던 이유입니다. 천하는 천천자대인-소인이라는 위계적 체제에 대한 유사종교적이고 유사 형이상학적인 관념입니다. 그러니 그냥 단순하게 정리하면 됩니다. 공자는 억압체제의 철학자이고, 그에 맞서 장자는 반체제적 철학자입니다. 물론 공자가 억압체제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지배계급을 맹목적으로 편든 것은 아닙니다.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초래하지 않는 억압체제, 부드럽게 기능하는 국가기구, 지배계급의 도덕성과 절제력 등을 강조한 철학자가 공자였으니까요. 그래서 간혹 공자가 피지배계급을 위한다는 착시효과도 줍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압니다. 공자는 주어진 영토국가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도모했을 뿐이라는 사실을요. 반면 장자는 정착생활에 국가기구가 도입되었을 때 지배와 복종 체제를 과감히 떠났던 유목민들의 전통과 함께했던 철학자입니다. 여기서 정착생활과 유목생활을 이분법적으로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유목민들도 잠시지만 정착생활을 하니까요. 그러나 유목민은 떠날 수 있는 힘과 자유를 항상 가슴에 품고 있지요.

 

임시 정착지가 가족과 가축을 먹이기에 부적절하면 그들은 간소한 천막을 걷어 떠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복종을 강요 하며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도 유목민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천막을 걷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착취와 수탈 체제를 도모했던 국가주의자들에 게 유목민들이나 그들과 함께 자유의 공기를 호흡했던 장자는 여간 껄끄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죠. 바람처럼 자유로운 철학자 장자의 입장은 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 여씨춘추(呂氏春秋)』 「귀생(貴生)7의 한 구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핍박받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迫生不若死]!” 바로 여기에 장자 사유의 힘이 응결되어 있습니다. ‘핍박받는 삶’, 다시 말해 누군가가 다그치고 재촉하는 삶으로서 박생(迫生)’을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자유의지입니다. 사실 이런 의지가 없다면 물질적 생활 조건이 좋은 정착지, 다시 말해 오아시스나 하천 근처 비옥한 농지나 목초지를 거느린 도시, 혹은 다양한 분업 체계와 교역으로 물자가 풍성했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스텝 지역과 사막 지역으로 들어가는 유목민의 비장한 결단을 떠올려보세요. 문제는 국가기구의 마수를 피해서 가는 곳이 어떤 곳일지, 얼마나 험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동료 인간에 의해 핍박받는 삶보다 더 가혹한 자연의 다그침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선사시대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낙관적 정신을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이미 수렵과 채집 기술을 기본적으로 전승받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유목민이 되는 삶을 선택한 이유가 정착지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닙니다. 삶이 핍박받는 지금 생활보다 더 나쁜 곳은 없다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좋은 곳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싫어서 떠나는 겁니다. “핍박받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는 입장은 그래서 울림이 있는 겁니다. 어떤 곳이라도 이곳보다 낫다는 결단이 없다면,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없으니까요. 확실한 것은 정착생활의 분업체계에 길들여진 공자나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스텝 지역이나 고산지대 혹은 사막의 삶은 견디기 힘든 삶이자, 그래서 미개나 야만으로 저주받아야 하는 위험한 삶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국가주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상황입니다. 국가 바깥이 더 무섭고 척박하다고 믿을수록 피지배계급은 억압과 착취를 감당할 테니 말입니다. 어쨌든 팽팽한 대립이 예상됩니다. 영토국가 내부의 삶이 박생이라는 장자의 입장과 영토국가 바깥의 삶이 박생이라는 공자의 입장!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미지(未知)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이 핍박받는 삶을 견디는 것보다 낫다는 장자의 입장과 불만과 불평이 있더라도 기지(旣知)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낫다는 공자의 입장! 두 입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달생편의 수영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수영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자신의 세계관, 자신의 삶의 태도, 나아가 자신의 삶의 방법을 요약하니 말입니다. 인문학적 감동과 자각을 찾는 열정적인 독자도 마찬가지지만 그저 장자의 입장을 무미건조하게 개관하려는 냉담한 독자가 장자의 이야기 중 한 편만 골라달라고 요청한다 면, 수영 이야기 이 한 편으로 충분할 겁니다.

 

 

 

격류를 헤엄치는 사나이와 땅 위에 선 공자

 

수영 이야기는 공자가 여량이라는 곳을 관광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공자는 관광객이었던 겁니다. 원문에 등장하는 ()’이라는 글자가 바로 관광을 가리킵니다. 어느 지역에서 연신 사진이나 동영상 혹은 인증샷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바로 관광객,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부산스럽게 셔터를 눌러대며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관광객과 현지인! 동일한 공간에 있어도 두 부류의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관광객에게 그 지역은 풍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그곳은 녹아 들어가 삶을 영위하는 곳입니다. 관조하는 공간과 살아가는 공간은 이렇게 다릅니다. 보통 관광객들은 자신이 사는 곳과 확연히 다른 곳을 선호합니다. 살아보지 않은 곳 혹은 살 것 같지 않은 곳이 관광객의 표적이 되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관광지의 풍광을 담아두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들를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죠. 만약 다음 달, 다다음 달에도 계속 올 예정이라면 관광객은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을 겁니다. 여량의 최고 명소는 높이가 삼십 길이나 되었고 그 물거품이 사십 리나 뛸 정도로 험한 폭포였습니다. 높이가 50미터나 되는 엄청난 폭포로 15킬로미터까지 물기운이 이르렀다고 하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광객으로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이 폭포를 찾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이런 거대한 폭포는커녕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폭포도 보지 못한 그들이었으니까요.

 

공자와 제자들은 이 압도적인 폭포 주변에는 자라나 물고기 등도 헤엄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살던 곳에서 자라 나 물고기는 작은 시내나 연못에서나 헤엄쳤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그곳에 자라나 물고기 등이 살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공자 일행에게 그곳은 물고기 등 생명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 한 사나이가 그곳에서 헤엄치는 장면이 들어옵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에서 헤엄치는 남자를 보자, 공자는 고뇌가 있어 자살하려 한다고 판단합니다. 어짊, 즉 인()의 주창자답게 공자는 제자들을 보내 물가를 따라가 그 사나이를 건지게합니다. 수영을 못하는 그들이 폭포가 만든 급류를 헤엄쳐 물에 빠진 사람을 직접 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라고 명령하고, 제자들은 공자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위계를 하늘의 명령, 즉 천명(天命)으로 긍정했던 유가들답습니다. 천명이란 천하에 통용되는 상명하복의 질서, 간단히 천하의 위계질서에 다름 아닙니다. 다수의 피지배자들이 소수의 지배자들, 나아가 그 정점에 있는 천자를 떠받치는 피라미드처럼 안정적인 질서, 혹은 확고한 정착생활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영토국가의 지배질서 등 어느 것으로 묘사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공자가 먼저 물가에 갈 일은 없는 겁니다. 물에 빠질 수도 있고, 빠진 사람을 구하다 그의 손에 잡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거친 일과 위험한 일은 신하가, 아들이, 그리고 제자가 감당해야 합니다. 바로 인()의 맨 얼굴입니다.

 

스승의 명령으로 물길에 흘러가던 남자를 무기력하게 따라 가던 제자들은 그 남자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수백 보 지나 폭포가 쏟아낸 거친 물이 잠잠해지는 곳에서 제자들은 드디어 물속의 남자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카락이 물결에 풀어진 채 노래를 부르며 둑 바로 아래 잔잔한 물에서 헤엄치고있었으니까요. 그는 자살한 것도 아니고 사고로 폭포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폭포 근처 격류를 헤엄치고 있었던 겁니다. 상황이 진정되자 공자가 때늦게 둑에 이릅니다. 바로 여기서 팽팽한 긴장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공자와 제자들로 이루어진 다수가 둑 위의 땅에 있고, 사나이는 둑 바로 밑 잔잔한 물 위에 있습니다. 땅과 물 사이의 거리,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의 거리는 양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질적으로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나이와 공자 사이에 묘한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사나이는 공자 일행이 떠나면 언제든 땅으로 올라오겠지만, 공자 일행은 결코 물로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요. 사나이는 결코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공자에게 공경을 표하지도 않습니다. 사나이에게서 깊은 불신과 경계심이 느껴집니다. 자신이 물속에 있는 한 공자 일행이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리라는 확신도 드러납니다. 이것은 역으로 사나이가 땅 위에서는 자신이 공자와 제자들로 상징되는 억압질서를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폭포와 급류가 만든 물은 추적자를 따돌릴 수 있는 유목민의 말이자, 추적자들이 추적을 포기하는 척박한 사막이었던 겁니다. 경계선에서 공자와 마주한 사나이는 땅을 과감히 떠나 물을 타는 데 성공한 남자, 영토국가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사막과도 같은 물에 들어간 남자, 바로 소요유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물의 길을 따를 뿐

 

공자는 둑 아래 아직도 물에 떠 누워 있는 사나이에게 이야기를 건넵니다. “나는 그대가 귀신인 줄 알았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네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군. 물을 건너는 데 길()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네.”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공자다운 질문입니다. 하은주(夏殷周)로 이어지며 다져진 길을 걷겠다는 공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사막도 그렇지만 물에는 그런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길을 만들어도 사막의 모래 폭풍은 길 자체를 먹어 삼킵니다. 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물결의 흐름은 바람에 의해 변하는 사막의 풍광보다 더 극적이니까요. 그래서 사나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없네! 내게는 길이 없네.” 어쩌면 자신이 물에 들어온 이유를 사나이는 뿌듯하게 되새기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나온 흔적이 그 길이 남지 않기에 누구도 나를 추적할 수 없다는 안도감입니다. 혹여 그런 길이 있다고 해도 영토국가의 이데올로그 공자에게 결코 알려주지 않을 사나이입니다. 다행히도 그런 길 자체가 없으니 사나이는 공자에게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지나온 길 자체가 바로 사라지니, 매번 단독적인 길을 내야 하는 사나이입니다. 그는 제물론편의 슬로건 길은 걸어서 이루어진다[道行之而成]”는 원칙을 온 몸으로 입증하는 데 성공한 사람입니다. 길보다 수천 배 중요한 것이 걸어감’, 즉 행()입니다. 사나이는 공자에게 그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됩니다. “나는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루고 있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나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물속에서 밀어내면 나도 같이 밀려 나오지. 물의 길을 따를 뿐,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네. 이것이 내가 물을 건너는 방법이야.” “나는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루고 있다는 난해한 구절은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죠. 어차피 공자도 사나이에게 그 의미를 다시 물어보니까요. 사나이는 자신이 공자 일행의 눈에 귀신처럼 수영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그 이면을 설명합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나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물속에서 밀어내면 나도 같이 밀려 나오지. 물의 길을 따를 뿐,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 네.” 물의 길도 여기서 하나로 표준화되거나 일반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강수량과 기후에 따라 물의 흐름과 유량 그리고 유속은 말 그대로 천변만화를 보이니까요. 물도 길은 걸어서 이루어진다는 원칙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물의 길은 흘러서 이루어진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물의 흐름과 그것이 순간적으로 만드는 물의 길을 따르는 것이 수영을 잘하는 사나이의 비법이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시체나 나무토막처럼 혹은 죽은 물고기처럼 물에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나이는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격류를 가로질러 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물이 가는 행()을 존중하며 자신이 가는 행()을 관철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사나이의 수영이 수동적 능동성이나 비자발적 조건에서의 자발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조건적 자유라는 장자의 이념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물의 길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을 때, 사나이는 바로 이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조건을 강조했던 겁니다. 범선이 바람의 방향을 긍정하며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역풍을 맞으면서 조금씩 우회하더라도 기필코 앞으로 나아가는 범선을 상상해보세요. 순풍의 경우보다는 느릴지라도 범선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범선은 압니다. 역풍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풍이라는 사실을요. 폭포나 격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물이 없는 상태라는 걸 알고 있을 사나이입니다. 물이 없다면 수영은 둘째 치고 땅을 피해 숨어들 곳이 없을 테니까요. 사나이가 말한 수영의 비법이 자신에 대한 조롱이라는 걸 모를 공자가 아닙니다. 다수 피지배자들의 삶과 그들의 땀의 결실을 사사롭게 여기는[爲私]” 억압체제의 이데올로그, 억압체제가 다져온 길을 정당화했던 철학자가 바로 공자니까요.

 

자신이 조롱당하고 있다는 걸 제자들이 눈치챌까봐 공자는 바로 화제를 바꾸며 묻습니다.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룬다는 그대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나이는 땅을 떠나 물에 이르게 된 자신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그는 영토국가에 포획되는 정착민의 생활을 버리고 지배와 복종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목민적 삶을 상징합니다. “내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했던 것이 과거이고, 내가 물에 깃들어 물에 편해진 것이 삶이고,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명령이야.” 사나이의 입을 빌려 공자의 천명을 비판하는 장자의 테크닉은 예술의 경지에 이릅니다. 공자의 명이 상명하복의 일방적 명령이라면, 사나이가 말한 명은 자신이나 물, 그 어디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쌍방향적 명령이니까요. 어쨌든 지배와 복종이 없는 삶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나이의 당당한 선언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땅에서도 살 수 있고 물에서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정착생활에만 길 들어 유목생활을 짐작할 수도 없는 공자입니다. 생명이라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압도적인 폭포에도, 자라도 살고 물고기도 삽니다. 그래서 사나이는 충분히 아니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사나이는 외롭지도 않습니다. 더 안쪽 물 격류에서 사나이와 공자의 만남을 지켜보는 자유인들이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나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대붕의 분투와 자유를 어찌 메추라기와 같은 공자 일행이 알 수 있겠는가?” 혹은 공자에 대한 사나이의 도발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걱정하는 자유인들도 있을 겁니다. 만약 공자가 폭포로 돌아온다면 혼자서 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폭포의 물길을 막고 자유인의 터전을 장악할 가공할 야 만과 함께 돌아올 공자입니다. 계몽의 핏빛 깃발을 들고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동료와 공자의 만남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자유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격류 속에 숨기고 있는 이유인지 모릅니다. 물의 세계에 우글거리는 자유인들이 이제 보이시나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대붕들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5. 자유인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 / 47. 관이 좁은 위대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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