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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7. 관이 좁은 위대한 죽음(임종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4부 바람이 부는 곳으로 - 47. 관이 좁은 위대한 죽음(임종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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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관이 좁은 위대한 죽음

임종 이야기

 

 

장자가 곧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고 했다.

莊子將死, 弟子欲厚葬之.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별들을 다양한 구슬로, 그리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네. 내 장례용품에 어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려 하는가!”

莊子曰: “吾以天地爲棺槨, 以日月爲連璧, 星辰爲珠璣, 萬物爲齎送. 吾葬具豈不備耶? 何以加此!”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弟子曰: “吾恐烏鳶之食夫子也.”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莊子曰: “在上爲烏鳶食, 在下爲螻蟻食, 奪彼與此, 何其偏也.” 열어구17

 

 

독수리의 먹이가 되어

 

지배와 복종이 있는 정착사회, 즉 영토국가에는 고분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중국의 진시황릉이든 신라의 천마총이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기구가 정착생활에 스며들자 지배와 복종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중앙유라시아 초원이나 고원지대 혹은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척박한 곳에서도 고분이 발견되니, 인간의 지배욕은 정말 구제불능의 고질병인 듯합니다. 물론 유목국가는 정착국가보다 지배와 복종 관계가 느슨합니다. 유목민들로부터 양과 낙타 혹은 말을 약탈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거나 그들을 징집할 수는 없습니다. 약탈당한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남은 가축을 몰고 다른 곳으로 떠날 테니까요. 중앙유라시아의 국가기구가 약한 만큼 지배계급의 힘을 상징하는 고분의 규모도 정착국가의 그것보다 매우 협소합니다. 황금인간으로 유명한 카자흐스탄의 이식(Issyk) 고분도, 얼음공주로 유명한 알타이산의 파지리크(Pazyryk) 고분도, 몽골의 노인울라(Noin Ula) 고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의 세습이 아니더라도 권력의 이양, 즉 국가기구가 유지되었기에 고분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죽은 권력자가 고분 안에 화려한 부장품이나 죽은 말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황금으로 치장한 옷이나 비단 등 화려한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관에 들어갈 리 없죠. 새로운 권력자가 종교적 관념을 이용해 자신이 잡은 권력을 공고히 하고 싶었던 겁니다. 고분의 높이나 혹은 고분이 만드는 스카이라인을 보세요. 하늘에 대한 숭배가 분명합니다. 지금도 장례의 화려함은 고인의 위대함이 아니라 유족의 권세나 부에 비례한다는 걸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앙유라시아의 척박한 땅은 무엇보다 먼저 자유로운 유목민들의 땅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고분이라는 게 없었을 겁니다. 아직도 그들의 전통이 전해져 옵니다. 바로 조장(鳥葬)입니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조로아스터교티베트불교에 포획된 형태의 조장입니다. 어느 경우든 최고통치자를 상징하는 하늘이 숭배됩니다. 조로아스터교가 페르시아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번성했고, 티베트불교도 티베트 왕권과 함께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쨌든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부패하는 시신을 악마적인 것으로 보아 그 처리를 독수리에게 맡깁니다. 하늘과 불을 숭배했던 조로아스터교에서 하늘에 올라 심판을 받는 영혼은 상관없지만, 시신은 하늘과 불을 오염시킬 수 있는 혐오물이었습니다. 시신을 태울 경우 그 불은 검고 탁하게 변하고 연기는 상승해 하늘을 오염시킵니다. 바로 이것을 조로아스터교는 매우 경계했습니다. 실제로 조로아스터교가 당시 인도의 화장(火葬)에 반대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반면 티베트불교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이 전통에서도 다층적인 하늘로 올라가는 윤회하는 영혼이 강조됩니다. 그렇지만 티베트불교의 입장은 불결하기에 시신 처리를 가급적 인간의 손이 아닌 독수리의 부리에 맡기자는 조로아스터교와는 다릅니다. 고인의 살을 먹은 독수리가 날면서 고인의 영혼을 하늘에 올려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흥미로운 것은 티베트불교의 조장에는 남은 자들이 시신을 독수리가 먹기 좋게 토막을 치거나 깊고 크게 칼집을 내는 행위 전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장은 화장도 아니고 매장도 아닙니다. 시신을 그냥 태워 없애거나 짐승들이 먹지 못하도록 땅에 묻는 것과는 다릅니다. 독수리여도 좋고 늑대나 여우여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내는 동료나 가족의 시신이지만,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저 먹이일 뿐입니다. 생전에 인간은 들짐승이나 가축을 먹어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시신으로라도 다른 동물들에게 먹이가 되는 겁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순간적으로는 다른 종에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모두 평등하다는 통찰인 셈입니다. 화장과 매장에는 죽어서라도 다른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지키려는 인간의 의지, 즉 다른 동물을 먹는 자이지 다른 동물에게 먹히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우월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반면에 조장은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인간도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리 다른 동물에 대해 가축화를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들도 인간과 다를 것 없는 생명체라는 의식이 없다면, 조장은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동물에 대한 입장이 이렇다면, 동료 인 간에 대한 입장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순간적인 우열은 있어도 영속적인 지배와 복종 관계, 즉 일방향적 착취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여러모로 정착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배와 복종을 피해 전면적인 유목생활에 뛰어들었던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의 전통에 부합됩니다.

 

 

 

가난한 유목민이 순수한 유목민이다

 

조장은 생태학적 사유와 자유의 감각을 갖춘 유목민에 부합되는 장례의식이었습니다. 바로 이 조장의 풍습을 받아들여 하늘 중심주의, 군주 중심주의, 달라이라마(Dalai Lama) 중심주의로 포획해 탄생한 것이 조로아스터교나 티베트불교였던 겁니다. 실제로 페르시아나 티베트나 모두 중앙유라시아 외곽 정착 국가였으니, 조장의 포획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겁니다. 조장을 지내던 중앙유라시아 유목민들을 정착민화하지 않으면 영토국가의 제국주의적 야욕은 충족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러니 조로아스터교나 티베트불교는 조장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잘못된 만남입니다. 한쪽에는 남겨진 시신이 다른 동물들의 귀중한 먹이라 생각하는 사유 전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영혼에 비해 몸은 열등하고 불결하다고 폄하하는 사유 전통이 있습니다. 잠시라면 모를까, 이 두 전통이 영속적으로 공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조로아스터교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교세가 위축된 것도 바로 이런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불교는 중앙유라시아와 티베트에서 취했던 조장이라는 장례 형식을 버립니다. 다비식(茶毘式)이라 불리는 인도 특유의 화장 형식으로 돌아가지요. 다른 동물에게 시신을 먹이로 내줄 수 없다는 의지가 다시 꿈틀거린 셈입니다. 만약 자비가 다른 동물에게도 확대된다면, 화장이 아니라 조장 이 불교에 가장 어울리는 장례의식이라는 걸 동아시아 승려들은 잊었던 겁니다.

 

국가나 제국은 중앙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자유의 땅에서 반 복적으로 출현했지만 금방 단멸했습니다. 정착국가와 비교해 규모는 작지만 고분들이 이 땅에서 아직도 발굴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언제든지 억압과 복종에서 떠날 수 있던 유목민들이 이 거대하고 척박한 땅에서 부단히 이동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자유인들을 피지배자로 영속화하는 것은 유목국가나 유목제국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언제든 흔적도 없이 머물던 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중앙유라시아에서 국가 형식이 약했던 내적 원인이 됩니다. 중국의 내부 아시아 변경(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동양학자 래티모어(Owen Lattimore, 1900~1989)는 말합니다 가난한 유목민(the poor nomad)이 순수한 유목민(the pure normad)이다. 번성했던 유목생활로 획득했던 액세서리와 사치품들을 자기 몸에서 떼어냄으로써 그들은 바로 그 초원에서, 심지어 가장 가혹한 초원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새롭게(afresh) 세우게 된다.” 액세서리나 사치품들은 권력과 부의 상징입니다. 아니 권력과 부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이걸 포기해야 지배와 복종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래 유목민은 동료인간을 지배해서 얻는 이득이나 권력자에게 복종해서 얻는 이익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정착사회 입장에서는 그들이 가난해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 가난의 대가로 그들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얻고, 그들은 그만큼 순수하게됩니다. 중앙유라시아 자유의 땅에서마저 지배와 복종에의 의지가 사생아처럼 탄생할 때, 래티모어의 말처 럼 유목민들은 다시 가난한 유목민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부유한 유목민혹은 불순한 유목민을 정화해, 자유를 위해 척박한 땅에 기꺼이 들어왔던 인류의 소망스러운 첫걸음을 다시 내딛으려는 의지입니다.

 

동료 인간이나 다른 동물, 혹은 땅이나 하천을 내 것으로 생각하는 소유의식은 다시 한 번, 그리고 더 단호하게 극복되어야 합니다. 어떤 곳도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고, 모든 것은 잠시 함께하는 짝일 뿐입니다. 어떤 곳이나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 가난했지만 모든 곳과 모든 것과 함께할 수 있기에 부유했던 사람들, 이들 순수한 자유인들이 고분을 남길 리 없습니다. 고분 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자 액세서리와 사치품의 아이콘이니까요. 어떤 고분도 남기지 않는, 아니 정확히 말해 고분 형식에 저항했던 자유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조장을 선택한 그들이 장례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남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지만 말입니다. 고분을 만든 사람들과 조장을 선택한 사람들! 으리으리한 고분 속에 온갖 부장품과 함께 묻힌 사람들은 부유해 보이지만 가난합니다. 아무리 높고 커다란 고분이라 할지라도 그곳은 광활한 유라시아 땅의 작디작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반면 홀로 시신으로 던져져 독수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가난해 보이지만 부유합니다. 시신으로 누운 땅은 한 평 남짓이지만 그가 누울 수 있는 곳은 중앙유라시아 자유의 땅 전체니까요. 가난을 선택하여 자유로워진 사람들! 손에 잡은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잡을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 장자가 바로 대붕으로 그렸던 사람들입니다. 동서남북 가고 싶은 곳으로 힘이 닿는 한 계속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거대한 사람들이니까요. 주어진 땅 주위에서 배회하는 닭이나 작은 나무를 오르내리는 메추라기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을 관으로

 

죽음을 앞둔 장자는 자신이 가난한, 그래서 순수한 유목민의 정신을 품고 살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고분은 아니더라도 작은 분묘를 만들려고 하자, 장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매장이 아니라 조장을 선호한다고 피력하지요. 빈 배 이야기에서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소요하라고 강조했던 장자다운 생각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 그건 가난한 유목민이 되어야 자유인으로 순수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의 모든 이야기 중 가장 극적인 임종 이야기가 조장이라는 유목민의 장례를 긍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착농경을 하던 중국인들에게도 고분을 만드는 매장은 때늦은 장례 형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장례를 뜻하는 장()이라는 글자의 갑골문이나 소전체가 그 증거입니다. 나무판에 시신을 올린 다음 풀을 덮고, 그 판을 나무 위나 풀 위에 올려놓은 형상입니다. 아울러 갑골문을 보면 사()라는 글자가 나무판에 올린 시신을 묘사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 장()이라는 글자에 반영된 장례형식은 매장이 아닙니다. 조장까지는 아닐지라도 풍장(風葬)은 분명합니다. 그러던 것이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에서도 고분을 만드는 매장이 지배적인 형식으로 변한 겁니다. 여기서 고분이 지배와 복종이 영속화된 정착사회, 즉 영토국가의 상징이라는 걸 상기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가 조장을 택한 이유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아니 숨이 끊어진 뒤에도 국가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지를 벼린 장자였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스승의 일거수일투족, 장자의 모든 언행과 사유를 지켜본 제자들이 스승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스승의 사유가 영원히 지속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장자학파를 지속하려면 상징적이고 제도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장례식을 통해 제자들은 스승과 가까웠던 순서 혹은 연배에 따라 일종의 학파적 위계구조를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학파의 규율과 질서를 잡지 않으면 선장이 떠난 장자호는 험난한 전국시대의 파고를 넘지 못하리라는 노파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장자의 영정을 선장실에 두고 장자호를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최소 1년에 한 번 장자의 기일에 모여 학적 결속을 강화하려면, 고분은 아닐지라도 분묘는 불가피했던 겁니다. 결국 분묘는 장자학파 내에 왕조국가적 위계질서가 도입된다는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지배와 복종 관계를 거부했던 자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지배와 복종구조를 도입하겠다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장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애틋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을 겁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유목민이 여름을 지낸 임시 거처를 쿨하게 떠나는 정도로 생각했던 장자입니다. 조장을 하든 풍장을 하든 아니면 수장을 하든, 그건 남겨진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 생각했던 장자입니다. 시체를 맡기는 것도 미안한데 유언까지 남긴다는 것은 장자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이 주제넘은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릅니다. 국가주의의 상징인 분묘 제도를 도입하는 순간,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던 자유의 정신은 죽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요.

 

전국시대 국가주의자들에 의해 교살되기도 전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제자들, 타살을 피하려고 자살을 선택하려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장자는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장자가 조장을 유지로 남긴 이유입니다. 짠하기만 한 제자들에 대한 장자의 마지막 애정이자 가르침이었던 셈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별들을 다양한 구슬로, 그리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네. 내 장례용품에 어찌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려 하는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부끄러웠나 봅니다. 아니면 최측근 제자라는 위상이 떨어졌다는 불쾌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떠나려는 스승 장자를 더 외롭게 합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비겁한 변명이자 핑계입니다. 자유롭고 당당하지는 못할망정 말장난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면피해서는 안 됩니다. 제물론편을 썼을 때의 날카로움은 가셨지만 장자는 마지막 총기를 모아 제자들을 논박합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 나 개미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잘도 그러겠다는 장자의 비판정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장자의 지성은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떨립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거야. 그런데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6.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 48. 누가 장자의 꿈을 깨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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