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사마광의 『효경지해(孝經指解)』로부터 동정의 『효경대의(孝經大義)』까지
당현종의 『어주효경』 이후 금ㆍ고문 다 사라지다
『효경간오(孝經刊誤)』의 문제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간오’의 문제가 아니라, 간오의 대상이 된 『효경』이 과연 어떤 텍스트였나 하는 것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효경』은 한대로부터 이미 금문(今文)ㆍ고문(古文)의 시비가 있는 텍스트이다【금ㆍ문 『효경』의 문제에 관해서는 제12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참아주면 좋겠다】. 당대(唐代)에도 이미 금고문의 시비가 문제시되었고 이러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시비를 잠재우기 위하여 희대의 로만티스트(romancist)이며 지식인인 당현종(唐玄宗)은 스스로 금ㆍ고문학파의 주장을 절충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확정하고 그 새로운 텍스트에 주(注)를 가하였다. 이것이 소위 『어주효경(御注孝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주효경』도 일시적으로 반포한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개원(開元) 10년 6월에 반포한 것을 개원시주(開元始注)라고 하고, 그후 개원시주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여 천보(天寶) 연간에 새로운 어주(御注)를 내었는데 그것을 천보중주(天寶重注)라고 일컫는다. 천보 4년【745, 우리나라는 통일 신라 경덕왕(景德王) 4년】 9월에는 현종이 친히 팔푼(八分)의 서체로써 그 천보중주를 쓰고, 그 서도작품을 돌에 새기어 태학(大學) 앞에 그 석비를 세웠다. 이것을 보통 석대효경(石臺孝經)이라고 부른다.
개원시주(開元始注)가 되었든 천보중주(天寶重注)가 되었든 이 『어주효경』은 금ㆍ고문을 절충하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금문 『효경』을 위주로 한 것이다. 이 천보중주를 바탕으로 형병(邢昺)의 『효경정의(孝經正義)』가 성립하였으므로 오늘날 우리가 보통 13경주소본에서 보는 『효경』은 당현종의 『어주효경』 계열이며, 금문 계열이다【13경주소본에는 당현종명황제어주(唐玄宗明皇帝御注)와 송형병소(宋邢昺疏)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천보중주의 석대효경이 천하에 반포되고【정확하게 말하면, 석대효경이 태학 앞에 세워진 것은 천보 4년(745)인데, 그 다음 해인 천보 5년에 다시 그 석비의 불비(不備)함을 보완하여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다. 당현종은 집현원(集賢院)에 명령하여 그새 판본을 사(寫)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케 하였다】, 더구나 확고한 황제의 권위가 실리게 되자【그만큼 『효경』의 내용은 역대의 황제들에게 통치수단으로서 매력적인 것이었다】, 현종의 『어주효경』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정현(玄)주의 금문효경과 공안국(孔安國)의 고문효경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금ㆍ고문 원경(元經)은 흐지부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더구나 오대(五代)의 난(亂)을 거치면서 망일(亡佚)케 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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