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의 엉터리 『효경지해』를 계승한 주희
그런데 북송 옹희(雍熙) 원년(984), 일본의 동대사(東大寺)의 스님인 쵸오넨(奝然, 우리말로는 소연이라 발음)이 입송(入宋)하여 송태종에게 정주(鄭注) 한 책[一本]을 헌상하였다【『송사(宋史)』 권491 「일본전(日本傳)」】. 태종은 쵸오넨을 직접 만났으며 그를 후대하였다. 그리고 자의(紫衣)도 사(賜)하였다. 이 일본에서 보존된 정현주 금문효경을 황실도서관인 비각(秘閣)에 보관하였는데 사마광은 비각에 접근이 용이하였고, 바로 이 쵸오넨이 헌상한 정주 금문효경을 보았던 것이다【애석하게도 사마광이 본 후로 언젠가 이 판본도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사람들이 애써 보관하여 헌상한 것을 중국인들은 유실하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어주효경』도 보았을 것이다【이상하게 『어주효경』도 개원시주는 사라지고 천보중주만 남았다】. 또 비각에 다행히 고문효경』이 남아 있었는데, 전(傳)은 없고 경(經)만 남아있는 불완전한 텍스트였다【공안국(孔安國)의 서문과 주석이 붙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사마광이 본 고문텍스트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옛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옛날 선진시대의 텍스트가 보존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공안국이 『효경』에 전(傳)을 달 때에, 이미 고문(과두문자)이 공안국 당대에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서체로 고쳐 썼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지식꾼들이 다시 예서체로 된 『효경』을 옛 고문으로 고쳐 썼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마광이 본 고문 『효경』은 『공전효경(孔傳孝經)』에서 『효경』의 본문만을 떼어내서 과두문자로 고쳐 써놓은 좀 어설픈 조작판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문자는 엉터리라도 그 말인즉슨 괜찮은 것이라고 사마광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此蓋後世好事者, 用孔氏傳本, 更以古文寫之. 其文則非, 其語則是也]. 그래서 사마광은 그 고문을 예서로 다시 고쳐쓰는 작업을 감행했다[是敢輙以隸寫古文].
그러니까 사마광이 본 고문효경은 결코 제대로 된 고문효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마광은 고문효경에 오직 근거하여 자기의 『효경』 주석서인 『효경지해(孝經指解)』를 쓴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말은 고문효경에 대한 지해(指解)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당현종의 『어주효경』과 일본판 정현주의 『금문효경』을 대폭 수용했다.
그러니까 사마광은 이념적으로는 고문효경을 신봉한다 하면서도 그가 막상 의존한 텍스트는 순수한 고문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문 비슷하면서도 고문이 아닌 애매한 텍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문에 대한 그의 집착은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고 있다.
앞선 유자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공자집안 사람들이 진나라의 협서율(挾書律, BC 213년 반포)을 피하기 위하여 공씨집안 벽 속에다가 책들을 감추었다고 한다.
先儒皆以爲孔氏避秦禁而藏書.
그러나 나 사마광의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진나라 때에는 이미 과두문자가 폐절된 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시황 34년(BC 213)에 비로소 분서(焚書)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것은 한나라가 흥하기(BC 206) 불과 7년 전의 사건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자손들이 협서율이 해제된 후에도 그 일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다가 한참 뒤 한 무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궁궐을 지으려고 공벽을 허물었을 때야 비로소 그 과두문자의 고문 문헌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臣竊疑其不然. 何則秦科斗之書廢絶已久. 又始皇三十四年, 始下焚書之令. 距漢興變纔年耳. 孔氏子孫, 豈容悉無知者, 必待共王, 然後乃出.
대저 그것을 공벽에 파묻어 둔 것은 공씨집안에서 정본을 후세에 전하려는 배려에서 공자께서 돌아가신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일이므로, 그 고문경전들은 매우 진실한 것이며, 타국의 사람들이(일본판 정씨금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모습을 바꾸어가며 전수하여 세월이 지나면서 소원해진 판본들과는 가히 동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蓋始藏之時, 去聖未遠, 其書最眞, 與夫他國之人轉相傳授, 歷世踈遠者, 誠不侔矣.
더구나 『효경』과 『상서』가 같이 공벽에서 나왔는데, 지금 학자들이 모두 고문상서의 진실은 인정을 하면서 고문효경은 위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치 육회 날고기는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구운 고기는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 고문효경의 진위문제는 명료하기가 일월(日月)과 같다.
且孝經與尙書俱出壁中. 今人皆知尙書之眞, 而疑孝經之僞. 是何異信膾之㗖, 而疑炙之不可食也. 嗟乎眞僞之明皦若日月.
사마광의 『효경지해(孝經指解)』는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에 들어가 있으므로 컴퓨터상으로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주희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강(綱)과 목(目)으로 분류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을 정도로 사마광을 존숭했으므로, 사마광이 만든 『고문효경지해』의 텍스트가 곧 고문효경이라고 생각해버린 것 같다. 주희와 같은 대학자의 소견 치고는 참으로 애석한 불찰에 속하는 일이다. 주희의 『효경간오』 판본은 금문도 아니고 고문도 아니며 바로 사마광의 『효경지해』 판본이었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오류의 반복이다. 『지해』 판본은 효경학사(孝經學史)에서는 그냥 ‘송본효경(宋本孝經)’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무가치한 판본에 속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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