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시대는 『삼강행실도』의 전성기
『삼강행실도』 산정언해본을 만든 성종 본인은 물론 위대한 군주였지만 어우동과의 스캔들도 야사에 남길 정도로 삼강행실에 어긋나는 로맨스를 즐길 줄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투기가 심한 부인 윤씨의 감정처리를 잘못하여 결국 연산군의 폭정과 무오사화ㆍ갑자사화라는 엄청난 비극의 씨를 남기었다.
연산군의 패륜행위를 문제삼아 그를 몰아내고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대장금’이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된 임금)은 초기에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급진적 개혁론자인 신진 사림의 거두 조광조를 끌어들여 지치주의(至治主義)적 도학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광조는 너무도 형식주의적 도덕정통론에 치우쳤고 중종은 훈구대신들의 입지를 살려가면서 세력의 밸런스를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조광조는 제거되어 능주의 붉은 꽃이 되었고(기묘사화) 다시 정국은 혼란에 빠졌지만, 그럴수록 중종은 『삼강행실도』와 같은 대중교화야말로 치세의 첩경이라고 굳게 믿었다. 중종의 시대야말로 『삼강행실도』의 전성기였다.
우선 중종 6년(1511) 8월 28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지를 내린다.
근래에 풍속이 불미하도다. 『삼강행실』을 많이 인쇄하여 서울과 지방 각지에 반포하라. 여항의 소민(小民: 보통사람)들도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近來風俗不美, 三綱行實多印頒布中外, 使閭巷小民, 無不周知.
국초 이래의 열녀ㆍ효자 중에서 『삼강행실도』에 언급되지 않은 자들도 편찬하여라. 또한 그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시(詩)와 찬(贊)까지 지어 간행하여 일반 백성들이 쉽게 알도록 하라.
國初以來, 烈女孝子之不及與者, 亦令撰集圖寫, 竝述詩贊, 刊以行之, 俾民易知.
이러한 명령이 떨어진 지 불과 2개월만(10월 20일 3번째 기사)에 『삼강행실도』 2,940질을 찍어 중외(中外: 서울과 지방, 전국)에 반포하였다는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다. 불과 2개월만에, 새로 편찬한 뉴에디션(new edition)의 『삼강행실도』를 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종조의 산정언해본 목판을 다시 인출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2개월 만에 2,940질을 간행한다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출판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3천 질 이상의 책이 일시에 간행된 사례는 정조 20년(1796)에 간행된 『규장전운(奎章全韻)』의 예가 있기는 하지만, 『전운』은 이덕무(李德懋) 등이 동음(東音: 조선의 한자음)과 화음(華音: 중국의 본토음)을 함께 표시한 한자 운서이며, 오늘날로 치면 특수한 사전이다. 이 사전은 특수한 학술기관, 도서관, 사고, 대신, 고급관료들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며(4,705책을 인쇄),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고 대부분은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일반서민들을 대상으로 3천 질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요즈음의 인쇄기술로 유추하여 별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당시의 제지ㆍ인쇄ㆍ제본의 공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막대한 수공을 요하는 사업이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30만 혹은 300만 부의 책을 일시에 보급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인용
'고전 > 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임란 직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또 편찬 (0) | 2023.03.30 |
---|---|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연이어 펴낸 중종 (0) | 2023.03.30 |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삼강행실도』 다이제스트 언해본의 등장 (0) | 2023.03.30 |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 조선왕조 텔레비젼 『삼강행실도』 (0) | 2023.03.30 |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효행록』과 『삼강행실도』 (0) | 2023.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