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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왕국의 시대 - 3장 군주 길들이기, 연속되는 사화(갑자사화)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3장 군주 길들이기, 연속되는 사화(갑자사화)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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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속되는 사화

 

 

무오사화(戊午士禍)연산군(燕山君)의 가슴 속에 품은 폭탄을 터뜨린 게 아니라 뇌관만 겨우 건드렸을 뿐이다. 그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한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명에 죽어간 그의 생모와 관련된 한이다. 포악하고 무도한 이상성격에다 출생의 비밀이 어우러졌다. 전형적인 3류 드라마의 주제다. 불행히도 그 드라마가 연극 무대가 아닌 현실의 무대에서 상연되면서 조선은 3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대부(士大夫)들은 중요한 신무기를 얻었다. 모함만으로도 반대파를 숙청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구체적인 역모의 증거 같은 것도 필요없고 그저 세 치 혀만 잘 놀리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성질은 더러워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꼭두각시 연산군이 다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그 신무기를 처음 실전에 사용한 자는 성종 때 유자광과 죽이 맞아 비위에 거슬리는 관리들을 탄핵하다가 유배당한 경험이 있던 임사홍(任士洪, ?~1506)이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아직 사화(士禍)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1504년에 또 다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말했듯이 연산군이 자기 생모 윤비의 운명에 관해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짐작으로 아는 것과 정확한 정보는 다르다. 그렇잖아도 한 차례의 사화(士禍)로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증오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연산군(燕山君)에게 임사홍은 윤비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다. 거기서 통로 역할을 맡은 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이다신수근은 또한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이역(李懌, 1488~1544)의 장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수근은 같은 항렬의 형제에게 각각 여동생과 딸을 시집보낸 셈이 된다. 앞서 예종(睿宗)과 성종의 경우처럼 이것 역시 유교적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런 관행은 곧이어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되면서 유교적 예법이 강화됨에 따라 사라지게 된다. 신수근에 관해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 있다. 얼마 뒤 그의 사위인 이역이 반정(反正)을 통해 중종으로 즉위하게 되지만, 신수근은 연산군(燕山君)에 붙었던 탓으로 살해되고 만다. 또 임사홍도 그 자신은 훈구파였으나 아들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였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피해를 입었다. 결국 훈구파와 사림파의 구분도 일부 골수분자들 외에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당파의 이해 차이보다 공동의 이해관계가 더 컸기에 사대부(士大夫)는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바로 그들이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었다. 생모가 폐위되고 사약까지 받았다는 사실에 꼭지가 돈 연산군은 아직 살아 있던 아버지 성종의 후궁 두 명을 궁중의 뜰에서 쳐죽인 다음 그들의 아들(그에게는 이복동생)들도 귀양을 보내고 사약을 내렸다. 더욱 심한 짓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직접 폭력을 가해 살해한 행위다. 사실 연산군 개인을 위해서는 그쯤에서 끝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비록 패륜아로 취급될지언정 군주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삐가 풀려 버린 그는 20년도 더 지난 사건의 당시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잡아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한 뒤 노년을 느긋하게 보내고 있던 윤필상을 비롯해서 이극균, 성준, 김굉필 등이 윤비 폐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김굉필은 무오사화로 유배되어 있던 중 처형되었으니 가장 재수없는 케이스다). 게다가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그밖에 수백 명의 조정 대신들과 그 가족들이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라 불리는 사건인데, 규모나 폭력성에서 전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훈구파와 사림파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숙청당했다는 사실이다.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여창(그는 사화士禍가 일어나기 불과 몇 개월 전에 죽었다)과 현실적 지주인 김굉필까지 화를 입은 데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연산군(燕山君)의 의도는 뭘까? 두 차례나 대규모로 사대부(士大夫) 숙청을 단행한 그의 난폭한 행위에서 이상성격에 기인하는 부분을 빼면 뭐가 남을까? 일단 그는 생모의 사건이 아버지 성종의 의도와 무관하게 순전히 사대부들의 책동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물론 후궁들과 인수대비도 관여했지만 그들의 배후에는 왕실 내의 알력을 이용해서 왕실을 조종하려 한 사대부들의 입김이 있었다. 따라서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모조리 싹쓸이하려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로서는 그럴 만한 다른 동기도 있다.

 

학문을 싫어하는 군주가 대개 그렇듯이 연산군도 노는 데는 특별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화끈하게 놀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당시 연산군(燕山君)의 파티 파트너는 TV 3류 사극에서 즐겨 다루는 장녹수(張綠水)였다. 원래 노비였던 그녀는 여러 차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몸이었으나 영리하고 가무에 능해 궁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나이가 서른이 넘었음에도 얼굴이 열여섯 살 소녀처럼 예뻤던 덕분에 그녀는 곧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숙원(淑媛, 숙의보다 몇 아래 후궁)에까지 오른다. 폭군의 애첩이라면 권력과 부는 자연히 따르는 것, 그러나 장녹수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국정에도 간섭하면서 연산군의 머리 위에 군림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연산군에게 교태와 아양을 떠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를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면서 욕설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고 하는데, 연산군(燕山君)콤플렉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였던 셈이다.

 

사치와 향락으로 왕실 재정이 바닥나자 그는 세금의 양을 늘리고 공신전과 그 소속 노비들마저 몰수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왕실의 재정 문제가 국가의 재정 문제로 비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들의 이해관계와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래저래 연산군은 사대부(士大夫) 전체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두 차례의 사화(士禍)가 벌어진 데는 연산군이라는 폭군이 등장했다는 우연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으나, 알고 보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그랬다면 폭군이 사라진 뒤 다시 원래의 체제로 컴백했어야 했으리라). 앞서 말했듯이 사대부는 훈구파는 사림파든 관계없이 왕권에 대해서만큼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지니는 세력이다. 쉽게 말해 왕권이 강력하면 사대부의 처지는 똑같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왕권의 허점은 사대부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연산군은 폭군이었던 만큼 얼핏 보기에는 강력한 군주인 듯하지만 실상은 약점투성이의 허약한 군주다(사실 모든 폭군이 그런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다). 생모의 비극적 운명과 난폭한 이상성격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결국 사화라는 사건으로 드러난 셈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폭탄을 품은 왕

연속되는 사화

사대부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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