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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제12장 금문효경과 고문효경 - 판본학에 바탕하지 않은 고전학은 구름누각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2장 금문효경과 고문효경 - 판본학에 바탕하지 않은 고전학은 구름누각

건방진방랑자 2023. 4. 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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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본학에 바탕하지 않은 고전학은 구름누각

 

 

이상이 나 도올이 효경을 주해하기 위하여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사전정보이다. 나 도올은 본시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사소한 고증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고증학의 실증이 없는 고전학은 사상누각이요, 판본학의 바탕이 없는 고전해독은 구름누각이요, 필로로지(philology, 문언학)의 공독이 없는 필로소피(philosophy, 철학)는 위선누각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있는 중국고전이나 한국고전에 관한 논문들을 보면 너무도 터무니없이 빈곤하고 부정확한 정보들이 횡행하고 있다. 나 도올의 문학(問學)이 아직도 미숙한데 그를 일일이 다 지적할 바가 아니나, 우리나라에 제대로된 국사사전 하나가 없다고 말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기초 공구서적이 부실하여 역사적 인물의 생몰연대 하나를 확실하게 인용키 힘들다. 더구나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고전의 문구해석의 임의성에만 치중하고 그 판본을 연구하거나 박학(樸學: 기초학문)적 분석을 가하는 치열한 노력들이 없다. 한마디로 개구라만 판을 치고, 엄밀한 과학적 학문방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주관적 상상이나 이데올로기적 주장은 최후적ㆍ말엽적 사태이며 선행되어야 할 근본적 과제가 아니다. 그런데 기초학문이란 문자 그대로 고혈을 짜내는 노동이요. 시간싸움이다. 우리나라에는 웬일인지 이러한 기초학문에 뜻을 두는 자가 너무 없다. 꼼꼼한 바느질을 배우려는 자는 없고 허울좋은 디자인만 배우려는 세상이니, 학문 또한 그런 허울을 쓰고 구름 위를 활보할 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 풍석 서유구의 작은 아버지)가 북학 사대가의 한 사람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왕조 400년간의 문치의 융성함을 통해 인재는 왕성하게 배출하였고 찬란하게 기록할 건덕지는 좀 있겠으나 유독 선비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竊嘗以爲我東四百年文治之隆, 人才之盛, 非不郁郁可述, 而獨無一箇儒耳. 명고전집(明皐全集)』 「답이검서덕무(答李檢書德懋)

 

 

거침없이 내뿜은 독설의 소이연을 지금도 절실하게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유림전(儒林傳)의 서문을 써달라는 이덕무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한 이야기인데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리기설은 시골 서당 훈장의 서탁까지도 휘덮고 있지만 시경이나 서경, 춘추를 펼쳐 놓으면 연륜이 쌓인 선비나 명망이 높은 대석학이라 하는 자들도 모두 꿀벙어리가 되고 만다[天人性命之理, 塗在鄕塾講案, 而詩書春秋之說, 偏寂於老成宿德].’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나라에는 선비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너무도 료료(寥寥: 빈 허공에 샛별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소)하다면서 편지를 끝맺고 있다. 그 절규를 지금도 한번 되새겨 볼 만하지 아니 한가?

 

나는 동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치열한 고증학의 방법을 배웠다.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의 대석학적 학식과 그 인품을 생각하면 항상 옷깃을 여미게 되고, 나도 후학들을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할 텐데 하는 사명감이 가슴에 서리지만 이미 은퇴를 한 구각(軀殼)으로 어찌 할 바가 없다. 일본 근세석학들의 책을 보면 나는 내가 직접 배운 선생님들이거나, 그들의 사우관계에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 향기를 직접 느낄 수 있다. 그들이 기여한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존숭의 염은 우리가 지닐 필요가 없겠지만, 그들의 학문의 정직성과 엄밀성은 우리가 본받고 또 본받아야 한다.

 

나는 중국고전에 있어서 금문과 고문의 전통을 편견없이 수용하려고 노력하지만 대체적으로 고문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효경을 기준으로 삼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고문효경이 그 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문효경효경의 본래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나는 인치본고문효경(仁治本古文孝經)을 본서의 텍스트로 삼았다. 인치본에 관한 해설은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효경학논집(孝經學論集)3편을 참고해주면 한다. 그것도 엄청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논의하지 않는 것이 독자들의 피곤을 덜어줄 것이다. 인치본(닌지혼)을 수중에 구할 수가 없어, 인치본을 경문으로 사용한 다음의 두 책을 기준으로 하였다.

 

1.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 孝經. 東京: 明德出版社, 1981.

2. 쿠리하라 케이스케(栗原圭介). 孝經. 東京: 明治書院, 2004.

 

그런데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텐메이(天明) 신축(辛丑, 1781)년 일본목판본(淸原宣條 校)이 키요하라 가문의 정본(淸家正本)이며, 인치본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그 대강의 틀을 계승하고 있다. ‘청가정본이라고는 하나 후대의 교정을 거친 매우 세련된 판본으로 인치본의 모습과는 많이 멀어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중에 조선총독부고서 청구기호 古古1-29-72’로 되어있는 공안국전 고문효경(古文孝經)이 서지정보 미상이지만 인치본(仁治本)에 가장 가깝게 가는 정본이다일본연활자본(日本鉛活字本)으로 간행연도는 에도 후기일 것이나 인치본을 옮긴 고본이다. 관심있는 독자는 누구든지 국립중앙도서관의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하여 이 두 자료를 직접 열람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우수한 서비스 시스템에 나는 감복하였다. 관계자들의 노력을 치하한다.

 

 

이것이 내가 준거로 삼은 고문효경이다. 고문효경으로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본일 뿐 아니라 가장 정밀한 본래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판본에는 공서(孔序)는 들어있지 않다. 인치(仁治) 2(1241), 키오하라노 노리타카(淸原敎隆, 1199~1265)의 교점본인데 동양사학자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 1866~1934)의 소장이 되었다가 1934년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키요하라노 노리타카는 카마쿠라 학문 융성에 크게 기여한 대학자로서 본명은 중광(仲光), 쇼오군(將軍)의 시강(侍講) 노릇을 했다.

카마쿠라 중기의 무장 호오죠오 사네토키(北條實時, 1224~76)를 가르쳤는데, 사네토키는 키요하라의 도움을 입어 카네사와문고(金澤文庫)를 건립하였다. 키요하라는 대대로 박사 집안으로서 누대에 비전되어 내려오는 비본(秘本)에 의거하여 교점(校点)을 단행하였는데, 키요하라 판본이야말로 전사의 오류가 없이 원본에 충실하게 교감을 보아 가장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선본(善本)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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