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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자로의 첫 대면과 비장한 최후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자로의 첫 대면과 비장한 최후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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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로의 첫 대면과 비장한 최후

 

 

자로와 공자가 처음으로 상면하는 장면과, 자로의 최후를 기록한 두 장면은 공자 일생의 드라마를 가장 생생한 콘트라스트(contrast) 속에서 전달해주는 감동의 씬들이다. 첫 장면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장면은 사기(史記)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에 자세하다.

 

자로와 공자가 첫대면하는 장면을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6에서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스켓치하고 있다.

 

 

자로는 본성이 야인기질이 있어 거칠었다. 용감하고 힘쓰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 심지가 강직하고 직설적으로 뒤받기를 좋아했다. 수탉의 꼬리를 머리에 꽂고 산돼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그리곤 공자를 업신여기며 공자를 때릴려고까지 하였다.

子路性鄙, 好勇力, 志伉直, 冠雄雞, 佩豭豚, 陵暴孔子.

 

공자는 자로를 예로써 대하며 살살 달래어 인도하였다. 후에 자로는 유복을 입고, 폐백을 드려 죽음의 충절을 맹세하고, 문인들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孔子設禮稍誘子路, 子路後儒服委質, 因門人請爲弟子.

 

 

자로는 변(, 삐엔, Bian)땅의 사람이었다. ()땅은 노()와 위() 사이에 있는 새로운 개간지였다. 집해(集解)에 자로는 변의 야인(野人)’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야인이란 곧 사의 신분이 아닌, 국 밖의 야에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제에 예속됨이 없는 방외인이었고, 도였고, 깡패였다. 그의 외관의 형용이 무척 재미있다. 머리에 수탉의 깃털을 꼽았고, 허리에 산돼지 가죽주머니를 찼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had a leather girdle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마가1:6)

 

 

자로의 무인다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례요한의 모습이나 변땅의 자로의 모습은 같은 야인으로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만나 물의 세례를 주려 했지만, 자로는 공자를 만나자마자 쥐어 팰려고하였다. 자로는 무지막지한 깡패였다. 이러한 야인 자로를 공자는 같은 무력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예를 설()하였다. 그리고 인격으로 감화시켰다. 강직한 자로는 공자의 인격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는 평생, 공자 곁을 지켰다. 한번 굳게 맺은 맹서를 자로는 평생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강직한 사람이었다. 사실 공자는 자로 덕분에 그의 정치적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가 대사구가 되어 삼환(三桓)의 습성을 무너뜨리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혁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자로 덕분이었다. 그리고 실각하자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첫 망명지로 삼은 것도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 옌 주어쩌우, Yan Zhuo-zou)가 위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로는 위나라에 대소가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공자는 평생을 자로의 보호 속에 살았다. 공자는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9에서 고백하였다.

 

 

내가 자로를 얻게 된 후로부터는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

自吾得由, 惡言不聞於耳

 

 

공자가어(孔子家語)』 「자로초견(子路初見)에는 두 사람의 만남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시작하고 있다.

 

 

자로가 처음 공자를 만났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子路見孔子, 子曰: “汝何好樂?”

 

자로가 대답하였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對曰: “好長劍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의 능한 바에다가 학문을 얹히기만 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따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孔子曰: “吾非此之問也, 徒謂以子之所能, 而加之以學問, 豈可及乎

 

자로가 말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도움이 될 것이 있는가?”

子路曰: “學豈益哉也?”

 

공자가 말하였다: “임금이 되어서 간해주는 신하가 없으면 실정하게 되고, 선비는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귀가 멀게 된다. 미친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을 수 없고, 활을 당길 때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가 없다.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물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 ()을 어지럽히고 사()를 미워하면 사회와 마찰을 일으켜 감방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孔子曰: “夫人君而無諫臣則失正, 士而無敎友則失聽御狂馬不釋策, 御狂馬者不得釋箠策也操弓不反檠弓不反於檠然後可持也木受繩則直, 人受諫則聖, 受學重問, 孰不順哉毁仁惡仕, 必近於刑謗毁仁者憎怒士人必主於刑也君子不可不學

 

자로가 굴복하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남산에 푸른 대나무가 있는데 휘어잡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짤라 화살로 쓰면 가죽과녁을 뚫어버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뭘 또 배울 것이 있겠는가?”

子路曰: “南山有竹, 不柔自直, 斬而用之, 達于犀革以此言之, 何學之有?”

 

공자가 타이르며 말했다: “그 대나무 밑둥아리를 잘 다듬어 깃털을 달고, 그 앞머리는 쇠촉을 달아 날카롭게 연마한다면, 그 가죽을 뚫는 것이 더 깊지 않겠는가?”

孔子曰: “括而羽之, 鏃而礪之, 其入之不亦深乎

 

이에 자로가 무릎꿇고 두 번 절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子路再拜曰: “敬而受敎

 

 

[長劍]에 배움[學問]! 이것이 곧 공자교단의 출발이었다. 자로는 공자보다 아홉 살 연하였고, 제자 중에서는 가장 연상의 한 사람이었다. 사실 자로는 공자의 막역한 친구였다. 자로의 비장한 최후는 공자 723세 고령 때의 사건이었다. 14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노로 돌아온 후 자로는 공자 곁을 떠나 위()나라에 가서 당시의 재상이자 대부였던 공회(孔悝, 콩 퀘이, Kong Kui)의 읍재(邑宰)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라에는 본시 불민한 임금 영공(靈公)이 있었다. 영공에게는 총애하는 부인 남자(南子, 난쯔, Nan Zi)가 있었다. 남자는 본시 송()나라의 귀족의 딸이었는데, 그녀가 위나라에 시집온 것은 이미 송의 공자인 조(, 츠아오, Chao: 송조宋朝라고도 부름)라는 색골의 미남자와 염문을 뿌린 후였다. 남자는 보기 드문 음녀(淫女)였다. 공자를 불러들여 자로를 불쾌하게 만든 음녀였다. 각색된 이야기이겠지만 남자는 살랑거리는 침실의 옥구슬 발에 가린 채 공자를 접견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하늘에 맹세코 나는 아무 일 없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雍也).

 

이 남자가 영공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괴외(蒯聵, 콰이 퀘이, Kuai Kui)였다. 괴외가 과연 영공의 자식인지, 송조의 자식인지도 알 바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소문이었다. 그런데 영공 39, 괴외는 음녀인 엄마 남자의 횡포를 보다 못해 엄마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전에 발각되어 송나라로 도망갔다가 뒤에 진()나라로 갔다. 그 후 영공이 죽자 위나라는 도망친 괴외의 아들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출공(出公, 츠우 꽁, Chu Gong)이다. 출공이 즉위한 후 12년이 되도록 괴외는 귀국하지 못했다. 출공은 막강한 신하들을 동원하여아버지 괴외의 입국을 막았다. 그러나 괴외는 집요하게 복위를 꾀하였다. 기나긴 부자간의 싸움이었다.

 

괴외는 마침내 출공 막하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잡았다. 괴외의 누나, 그러니까 위령공의 큰 딸, 백희(伯姬, 뿨지, Bo-ji)는 위대부(衛大夫) 공어문자(孔圉文子, 꽁 위 원쯔, Kong Yu Wen-zi)에게 시집을 갔다. 그 공문자(孔文子, 콩원쯔, Kong Wen-zi)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자로가 섬기고 있는 대부, 공회(孔悝)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공문자(공회의 아버지)가 죽고 나자 공회의 엄마 백희는 그 공씨집에 있었던 젊고 잘생긴 노비[] 혼양부(渾良夫, 훈 리앙후우, Hun Liang-fu)와 정을 통하였다. 혼양부는 공회의 엄마 백희와 괴외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괴외의 복귀를 도왔던 것이다. 괴외는 혼양부에게 성사만 시켜주면 모든 죄를 감면해주고 대부의 높은 지위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누이 즉 공회의 엄마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부추겼다.

 

드디어 백희는 괴외를 공회의 집으로 끌어들여 공회를 협박하여 외삼촌, 괴외를 도와 출공을 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출공은 드디어 노나라로 도망을 갔고 출공의 뒤를 이어 괴외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장공(莊公, 주앙 꽁, Zhuang Gong)이다. 여기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에는 공회와 자로의 관계가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질 않다. 공회는 자기 엄마가 종놈인 혼량부와 밀통하여 외삼촌 괴외를 즉위시키려는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리 없다. 그러나 공회는 엄마의 엄명 때문에 할 수 없이 반란에 휘말려 들었을 것이다.

 

공회가 괴외에 의하여 높은 누각 위에 붙잡혀 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우직한 자로는 공회의 집으로 뛰어갔다. 공씨집에 들어가려는 참에 같은 동문의 제자로서 공회의 가신을 지내고 있었던 자고(子羔, 쯔까오, Zi Gao)()은 고(), ()은 시(), 자고(子羔)는 자()를 만났다. 자고는 공씨집을 나와 피신하려던 참이었다.

 

자고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자로에게 충고하였다. 공연히 개입하여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그러나 자로는 개의치 않고 공씨집의 밥을 먹고 있는 이상 이 집의 재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공씨 문안으로 단신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자로는 괴외가 공회를 붙잡고 있는 누각 밑에 떡 버티고 서서 소리를 지른다: “공회를 풀어 놓아라!” 괴외가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러자 자로는 그 누각에 불을 지르려 한다. 그러나 괴외는 날쌘 검객 두 명, 석걸(石乞, 스치, Shi-qi)과 호염(壺黶, 후엔, Hu-yan, 혹은 우염盂黶)을 파견한다. 자로는 이미 늙었다. 젊은 검객들의 날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날쌘 장검이 얼굴을 스치며 갓끈이 끊어지고 갓이 땅에 뒹굴었다. 그 순간 자로는 이미 자기의 최후를 감지한다.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가운데 자로는 유유히 손을 들어 외친다(중니제자열전9).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

君子死, 冠不免!

 

 

자로는 정좌하고 땅에 떨어진 갓을 다시 쓰고 단정하게 갓끈을 맨다. 순간 두 검객의 시퍼런 칼날들이 엄숙하게 정좌한 자로의 등을 갈랐을 것이다. 자로는 태연하게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스러져 갔다. 서늘한 칼날이 그의 심장을 에는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이와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 형님!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한 치도 어김없이 살았소.

이제 나는 당당한 군자(君子)가 되었소.

군자로서 갓끈을 매는 순간에 형님 곁으로 갈 수 있어 나는 행복하오.

나는 형님의 가르침대로 사()로서 살고 사()로서 작별하오. …… 굿바이,

 

 

자로의 인생의 출발은 숫닭 꽁지깃털과 산돼지 불알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마감은 죽음 앞에 태연히 정좌하고 앉아 갓끈을 매는 모습이다. 수탉꽁지털에서 갓끈으로의 트란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바로 이것이 공자의 삶의 본질이며, 자로의 삶의 도약이며, 향후 모든 의 의미를 규정하는 인류사의 교양(studia humanitatis)의 전범을 이루는 것이다. 자로의 삶의 도약이 곧 사()를 규정하였고, 공자의 교단의 성격을 규정하였고, 제자백가의 인문학을 규정하였고, 제민(齊民)의 통일제국에로의 새로운 길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곧 내가 말하는 무()와 무()에서 사문(斯文)을 창출해낸 공자의 위대성이다. 장자(莊子)도척(盜跖)4편에는 도척이 공자를 힐난하면서 자로를 꾀어낸 죄를 크게 꾸짖는 장면이 있다.

 

 

천하사람들이 왜 널 도둑놈 짱구[盜丘]라 아니 부르고, 하필 날 도둑놈 척[盜跖]이라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너는 달콤한 말로 자로를 설복시켜 너를 따르게 했다. 자로로 하여금 높은 무사의 관을 벗게 하고, 긴 칼을 풀게 하고, 너의 가르침만을 받게 만들었다. 그래서 천하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공구는 폭력을 그치게 하고 비리를 금지시키는 힘이 있다고 했다.

天下何故不謂子爲盜丘, 而乃謂我爲盜跖? 子以甘辭說子路而使從之. 使子路去其危冠, 解其長劍, 而受敎於子. 天下皆曰: ‘孔丘能止暴禁非.’

 

그러나 그 결과가 뭐냐? 자로는 위군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몸은 동강나 소금에 절여져 위나라 동문 꼭대기에 걸리고 말았다. 이것은 곧 너의 가르침이 아직 모자란다는 뜻이다.

其卒之也, 子路欲殺衛君而事不成, 身菹於衛東門之上, 是子敎之不至也.

 

 

무량사석각(武梁祠石刻)의 공자제자들. 자로의 무인다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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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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