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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22.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22.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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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사람이 믿음이 없다면

 

 

2-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으로서 신실함이 없으면, 그 사람됨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큰 수레에 큰 멍에가 없고, 작은 수레에 작은 멍에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 수레를 가게 할 것인가?”
2-22.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여기 ()’이라 함은, 계속 공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언어생활에 관한 것이다. ()이란 언어의 신험성, 그 신빙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엄밀한 요구, 그것은 공자의 삶을 일관하고 있는 주제이다. 그리고 이 ()’이라는 주제는 논어에 나오는 정치관련 언급기사를 훑어보면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정치를 하는 군자에게 있어서 신험 성 있는 말과 행동이란 정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 라의 정치현실을 보아도 이해가 간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구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어떤 신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인격을 성립시키는 근본이다. 공자가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이 말하는 바, 언어적 개념의 대상적 사실과의 대응관계를 말하는 그러한 엄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엄밀한 명제이론의 맥락이 공자에게는 부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그림 속에서 공자가 ()’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인간의 언어생활이 그 인간의 도덕적 인격성의 잣대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최소한 이 세계의 사실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인 것이어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그의 신념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언어의 진실성이 곧 인간의 성실한 삶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진실성의 잣대로서 그는 종교나 미신이나 형이상학이나 인간의 임의적 비도덕성을 다 배격한다. 나는 이러한 ()’을 총체적으로 신실함으로 번역하였다. 인간이 신실()하다는 것은 곧 인간이 자신의 언어를 믿음성 있고 진실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신실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곧 신험할 수 있고, 실천될 수 있는 말만 하는 것이다. ‘저기 꽃이 있다라는 말은 신험(verification)이 있지만, ‘나는 귀신을 보았다는 말은 인간에게 공유될 수 있는 신험성이 부족 한 것이다. 후자와 같은 명제를 배제시킨다 해도,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무궁무진한 모험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신()이 없다면, 나는 그 가()함을 알 수가 없다. ‘그 가함[其可]’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이다. ()이 없는 인간, 신실함ㆍ성실함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한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없는 인간은 예측불가능(unpredictable)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간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의 기본이 형성되지 않은 인간은 그 재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하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재주가 탁월한 인물이 말에 신험이 없어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타락해버리고 마는 상황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은 문맥으로 보아 대거(大車, 큰 수레)와 소거(小車, 작은 수레)로 대비된 것이므로, 그 싸이즈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같은 기능의 물건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고주에 이르기를

 

 

포씨가 말하였다. 대거(大車)는 소달구지다. ()라는 것은 수레채 끝의 가로지른 나무이다. 이 나무로써 액()에 묶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거(小車)는 사두마차이다. ()이라는 것은 수레채 끝의 위로 굽은 것인데, 이것으로써 형()에 묶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苞氏曰: 大車, 牛車. 輗者, 轅端橫木, 以縛枙者也. 小車, 駟馬車也. 軏者, 轅端上曲, 拘衡者也.

 

 

이 문장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대거(大車)는 소달구지 우거[牛車], 소거(小車)는 사두마차 병거(兵車)라는 것이다. 그런데 원()이란 수레 채라는 것으로 뒤에 달리는 수레 자체에 양 옆으로 길게 나와 있는 연결막대이다. 이 수레채 끝에 횡으로 달려있는 막대가 바로 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로써 액(=)에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나 ()이라는 것은 소 나 말 자체에 얹는 멍에를 말하는 것이다.

 

  수레채 연결장치 멍에
대거(大車) () () ()
소거(小車) () () ()

 

사실 주석마다 그 부분 명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나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우거(牛車)나 마차[馬車]의 모습이 시대적으로 변천했기 때문에 그 정확한 모양새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고주주자의 집주도 고주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예()나 월()이 수레와 마차를 연결시키는 어떤 관건(關鍵)의 장치임을 알 수 있다. 다산은 말한다.

 

 

수레와 소는 본래 두 개의 다른 물건일 뿐이다. 그 몸뚱이가 각기 별개래서 서로 연접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예나 월로써 단단히 묶어 연접시킨 연후에나 수레와 소ㆍ말은 한몸이 되어, 소가 가면 수레 또한 가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이를 가지고서 ()’에 비유한 것이다. 나와 타인은 본래 두 개의 사람일 뿐이다. 믿음으로 굳게 결속됨이 없다면 같이 걸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與牛本是二物, 其體各別, 不相聯接. 惟以輗軏固結而聯接之, 然後車與牛爲一體, 牛行而車亦行, 所以喻信也. 我與人本是二人, 不以信固結之, 則亦無以行.

 

 

다산(茶山)의 설명이 명료하다. 나는 정확히 대응되는 번역은 아니지만, 독자 에게로의 전달력을 고려하여, ()큰 멍에, ()작은 멍에로 번역하였다. ‘행지(行之)’수레를 가게 하다로 번역하였는데, 이때의 수레는 소ㆍ말과 수레를 다 포괄하는 개념의 수레이다.

 

참고로 웨일리(Arthur Waley)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The Master said, I do not see what use a man can be put to, whose word cannot be trusted. How can a waggon be made to go if it has no yoke-bar as a carriage, if it has no collar-bar?

 

 

는 오혜(五兮) 반이다. ‘()‘로 읽는다. 대거(大車)’는 평지에서 짐을 싣는 수레를 일컫는다. ‘는 수레채[]의 끝에 가로지른 나무이니, 멍에()를 묶어서 소에게 매는 것이다. ‘소거(小車)’는 밭에서 쓰는 쟁기(전거田車), 군사용 수레(병거兵車), 여행용 수레(승거乘車)를 다 통칭하는 것이다. ‘()’은 수레채() 끝에 위로 굽은 것인데 거기에 멍에()를 걸어서 말에 매는 것이다. 수레에 이 두 가지가 없으면 갈 수가 없으니, 사람으로서 ()’이 없으면 또한 이와 같 은 것이다.

, 五兮反. , 音月. 大車, 謂平地任載之車. , 轅端橫木, 縛軛以駕牛者. 小車, 謂田車, 兵車, 乘車. , 轅端上曲, 鉤衡以駕馬者. 車無此二者, 則不可以行, 人而無信, 亦猶是也.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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