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아첨과 용기 없음에 대해
2-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사를 지내야 할 하느님이 아닌데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2-24.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
여기 ‘귀(鬼)’를 정현고주(鄭玄古注)에 ‘조고(祖考)’로 본 것을 다산(茶山)이 통렬히 반박하고 있는 것에 나는 동감이 간다. 여기서 귀(鬼)라는 것은 단순히 내 조상귀신만을 말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귀(鬼)는 천신(天神), 지시(地示), 인귀(人鬼)를 총칭하는 일반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응당히 받들지 말아야 할 산천제사를 지낸다든가(부당한 태산제사 등), 받들지 말아야 할 타종족의 제사라든가, 하는 등등의 상황을 폭넓게 수용하는 명제라는 것이다. 나는 ‘귀(鬼)’를 ‘귀신’으로 번역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신(神)의 현대어적 맥락도 그 궁극을 소급하면 모두 ‘귀(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귀(鬼)’와 ‘하느님(God)’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는 모든 학구적 논의가 기독교 유일신관의 허구성에 물들은 하찮은 언설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의 종교성을 공평하게 이야기한다면, 모든 종교는 필연적으로 다신론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의 발생부터 종교의 멸망까지 그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다신이지 유일신일 수가 없다. 유일신을 말하는 유일한 종교가 셈족의 일부 특수한 민족종교에 국한된 것인데 마치 이것이 모든 보편적 종교발달의 당연하고도 지고한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인지(人知)의 저열함을 나타낼 뿐이다. 헤브라이즘의 유일신관도 철저히 다신론적 환경 속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무리하게 선택된 것으로서 주장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유일신관은 사실의 체계가 아니다. 야훼라는 귀신을 유일한 귀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당위일 뿐이다.
이 당위성은 그들의 민족사적 특수환경이 만들어낸 특수한 가치일 뿐이다. 야훼를 포함하여 구약에 나오는 모든 신이 『논어』 및 기타고경에서 말하는 귀신과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귀신의 유일신화는 폭력적 강제성을 수반하는 것이며, 로마의 기독교공인 이후에나 서구문명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상태에 있어서 인간의 종교적 심성은 귀신의 다원화를 당연한 사태로 용인한다. 유일신관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으며, 그것처럼 인류역사에 폐악을 끼친 것도 없다. 유일신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무서운 폭력의 근원이다. 공자는 말한다. 모셔야 되지 않을 하느님을 모시는 것, 이것은 졸렬한 인간들의 아첨의 극치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해서 벌어지는 인간의 허약한 추태의 극단적 사례이다.
‘견의불위(見義不爲), 무용야(無勇也)’는 이렇게 그 의미맥락을 바꾸어도 무방하다: 불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비겁이다. 의를 보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나,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모두 같은 인간의 비겁함이다. 의를 보고 실천하지 않는 비겁자일수록 받들지 말아야 할 하느님을 받드는 아첨꾼들일 뿐이다. 물론 본 장의 두 명제가 각기 별도의 전승이었는데 한곳으로 묶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에서의 아첨과 사회윤리적 차원에서의 비겁을 하나의 의미론적 평면에서 대비시키는 공자의 메시지는 참으로 강렬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인간은 용기가 없을 때, 종교에 빠진다. ‘용기 없음’과 ‘아첨’은 동일한 인간의 나약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 두 명제를 병기함으로써 두 명제의 각각의 의미맥락을 호상적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곡례(曲禮)」 하에서 말한 바 ‘음사(淫祀)’라는 것도 본 장에서 말하는 아첨과 비슷한 의미맥락으로 쓰인 것이다. 받들어서는 아니 될 하느님을 받드는 것은 사회적 불의를 묵과하는 것과도 같은 인간의 나약함일 뿐이다. 남들이 믿기에, 예배하는 곳에 참여하지 않으면 괜히 외톨이가 되는 것 같기에, 사회적 불이익이 따르는 것 같기에, 문화적으로 뒤처지는 것 같기에, 어영부영 예배에 참여하는 인간들, 이들이야말로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대중적 종교성에 매몰되어 있는 나약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본장은 종교적 제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본래 「팔일(八佾)」편에 속했던 것일 수도 있다. 『논어』 전체를 편집할 때에 「팔일」편에서 누락된 파편을 이곳 「위정(爲政)」 편으로 편입시켰다는 설도 있다. 「팔일」편의 주자의 편해를 참고하라.
카이즈카(貝塚茂樹)는 고대 중국에서는 자기 조상신을 제사지내는 것이 정당 한 것이며 예에 합당한 것인데, 당시 노나라에 그러한 조상신과 무관하게 무녀가 떠받드는 신을 예배하는 새로운 신흥종교가 유행했고, 당시의 권력자들이 그 신흥종교에 쏠렸기 때문에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종교성향에 대하여 제동을 거는 발언을 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한 종교적 발언이 사회적 정의관과 결부되어 있었고, 또 그러한 발언을 한다는 것이 용기를 요하는 것이었기에 ‘용기’를 운운하는 메시지가 같이 병치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풀이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종교현상을 분석해보아도 상응되는 면이 있는 매우 합당한 공자의 비판이라 할 것이다.
‘비기귀(非其鬼)’라는 표현은 마땅히 제사 지내어야 할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험(諂)’은 잘 보이기를 구하는 것이다.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용기가 없는 것이다.
非其鬼, 謂非其所當祭之鬼. 諂, 求媚也. 知而不爲, 是無勇也.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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