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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23.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23.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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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2-23. 자장이 여쭈었다: “열 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2-23. 子張問: “十世可知也?”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본받아 덜고 보태고 한 바 있어 열세 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본받아 덜고 보태고 한 바 있어 열 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자가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백 세대의 일일지라도 미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이 장은 많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해석해 넘기지만, 실상 자세히 뜯어보면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심히 명료하지 않다. 이 장의 해석에 있어 나는 다산(茶山)의 설()을 취하였다. ‘문질삼통(文質三統)’시대에 따라 문()한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질()한 분위기가 있다. 삼통이란 역법상의 문제로서 개정삭(改正朔)을 말한다. 역성혁명이 있게 되면 정월(正月)과 삭일(朔日)의 기준을 바꾸어 새 역()을 선포한다. 하정(夏正)13월이며 인통(人統)이라 하고, 은정(殷正)12월이며 지통(地統)이라 하고, 주정(周正)11월이며 천통(天統)이라 한다. 모두 손익(損益), 즉 변화의 대상이다 운운하는 번쇄한 고주 이래의 잡설들을 각설하고 나의 생각을 곧바로 진술하겠다.

 

우선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십세가지야(十世可知也)’()’를 모두 주희(朱熹)의 주석에 따라[王者易姓受命, 爲一世] 역성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한 왕조의 시간길이로 본다. 그렇다면 이 자장의 질문은 열 왕조 후의 일을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적당한 시간 길이가 아니다. 한 왕조의 흥망이 짧은 단위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 불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열 왕조의 흥망의 시간은 너무도 긴 시간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평범한 역사의 시간길이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당하다. 즉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십세(十世)300년 정도의 시간길이가 될 것이다. 중국인의 시간개념이 인도인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역사의식 속에서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기실 십세가지(十世可知)’라는 말은 자장(子張)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자장당시에 유행했던 어떤 기존의 관용구적인 속어였을 것이다. 그 속어를 빗대어 공자의 생각을 물은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자장은 매우 훌륭한 질문자였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고 공자에게 묻는 성향이 있는 젊은이였다. 자장과 공자의 나이 차이를 생각할 때, 이 질문이 자장이 20세 전후에 물었다 해도 이미 공자의 나이 70세였다. 공자말년의 대화 인 것이다.

 

십세가지야(十世可知也)?’란 질문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역사에 정칙(定則)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에 어떤 불변의 패턴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세(十世) 300년 후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어떤 역사의 정해진 법칙이 있느냐는 것이다. 즉 인간세의 변천의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에 관한 매우 소박한 질문인 것이다. 그것을 십세(十世)라는 시간 단위를 빙자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과연 어떠했을까?

 

공자는 여기서 헤겔의 역사철학이 말하는 절대정신(absolute Geist)의 변증법적 법칙과도 같은 어떤 일반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공자는 구체적인 역사의 사례를 들어 그것을 논증할 뿐이다. 그러한 사례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피력할 뿐이다. ‘은인어하례(殷因於夏禮), 소손익(所損益), 가지야(可知也)’라는 문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야(可知也)’의 지()의 목적을 소손익(所損益)’으로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그렇게 되면 가지(可知)의 내용이 질문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진다. 여기서 가지야(可知也)’는 질문의 의미맥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비록 생략되었지만 십세가지야(十世可知也)’의 줄임말로 보아야 마땅하다. 공자의 대답의 전체구조는 십세가지야(十世可知也)’수백세가지야(雖百世可知也)‘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구조 속에서 발견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손익(所損益)’은 하나의 은인어하례(殷因於夏禮)’십세가지야(十世可知也)’를 매개하는 어떤 수식적인 구문에 불과한 것이다. ()은 하례(夏禮)를 본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본받은 것이 아니라 하례(夏禮)를 손익(損益)해서 즉 가감(加減)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례(夏禮) 그 자체가 완벽한 것이 아니었기에 은인(殷人)들은 그것을 가감(加減)하여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손익(損益)계승의 경우라도 십세(十世)의 일은 앞내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역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어 그 손익(損益)계승의 상황을 잘 파악하면 300년의 미래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본받았다. 이 경우 또다시 은()나라 의예 그 자체가 완벽한 것이 아니었기에 주()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손익(損益)해서, 가감(加減)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손익(損益) 계승의 상황을 잘 파악하면 300년의 미래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나라 이후의 상황은 어떠한가? 공자는 헤겔이 마치 프러시아 제국을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의 최종적 실현으로 간주하듯이, 주나라를 하() 나라와 은()나라의 문물제도를 손익하여 완성한 최종적인 문명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것은 공자의 편견인 동시에 이상적 구성(ideal construction)이다. 따라서 누군가 진정으로 주()나라를 계승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기혹계주자(其或繼周者)’에서 기혹(其或)은 바로 이러한 불확정적 상황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 주()나라의 문물전장(文物典章)은 완벽하므로 더 이상 손익가감(損益加減)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손익가감(損益加減)이 필요없는 상황에서는 비단 십세(十世)가 아니라, 비록 백세(百世)라 할지라도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하자(繼夏者) 유소손익(有所損益) 십세가지(十世可知)
계은자(繼殷者) 유소손익(有所損益) 십세가지(十世可知)
계주자(繼周者) 무소손익(無所損益) 백세가지(百世可知)

 

결국 이것은 공자의 주()나라에 대한 예찬의 한 표현이다. 팔일(八佾)14에서 말하고 있는 주감어이대(周監於二代), 욱욱호문재(郁郁乎文哉)! 오종주(吾從周)’라는 탄식의 변주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茶山)은 말한다.

 

 

하례는 완벽하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은나라가 비록 그것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익한 바가 있었다. 은례는 완벽하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나라가 비록 그것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손익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전장법도는 주나라에 이르러 크게 구비되었고 완벽하게 좋고 완벽하게 아름답게 되었다. 그래서 손익할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상적 군주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한결같이 손익없이 주례를 따를 것이니 백세라도 변함 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누군가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백세라도 미리 알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이상적 군주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잡란되고 망령되이 역사를 운영할 것이니 망망하여 정해진 기준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역사의 변화를 예측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 누군가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라는 것은 미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夏禮未盡善. 故殷雖因之, 而有所損益. 殷禮猶未盡善, 故周雖因之, 而又有所損益. 典章法度, 至周而大備, 盡善盡美, 無可損益. 有王者興, 必一遵周禮, 百世不變, 故曰: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若王者不興, 雜亂妄作, 茫無定準, 則其變不可知, 故曰其或, 其或者, 未定之辭.

 

 

다산(茶山)의 명료한 주석으로 더 이상 나의 해설이 필요없을 것이다. 꾸 옌우(顧炎武, 1613~1682)일지록(日知錄)에서 역사에는 도량형이나 기물ㆍ의복과 같이 변하는 측면과 친친(親親)ㆍ존존(尊尊)과도 같은 변하지 않는 상륜(常倫)의 측면이 있는데 공자는 변하지 않는 측면에서 주나라의 문화를 평가하고 있다고 간파했다.

 

 

육덕명(陸德明)경전석문(經典釋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는 어느 판본에는 ()’로 되어있다.” 왕자(王者)가 성을 바꾸는 정치혁명을 일으켜 명()을 새로이 받는 것을 1(一世)라 한다. 자장이 지금으로부터 10세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陸氏曰: “, 一作乎.” 王者易姓受命爲一世. 子張問自此以後, 十世之事, 可前知乎?

 

마융(馬融)은 이에 대해 주를 했다: “‘()’한다는 것은 삼강오상(三綱五常)과도 같은 불변의 가치를 인습한다는 뜻이고, ‘손익(損益)’한다는 것은 문질삼통(文質三統)과도 같은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을 가감한다는 뜻이다.”

馬氏曰: “所因, 謂三綱五常. 所損益, 謂文質三統.”

 

나 주희는 생각한다. 삼강(三綱)이란 임금 이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비가 자식의 벼리가 되고, 지아비가 지어미의 벼리가 된다는 것이다. 오상(五常)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을 일컬은 것이다. 문질(文質)은 하가 충()을 숭상하고, 상이 질()을 숭상하고, 주가 문()을 숭상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삼통(三統)이란, 하나라가 정월을 인월(寅月)로 세워 인통(人統)이 되고, 상나라가 정월을 축월(丑月)로 세워 지통(地統)이 되고, 주나라가 정월을 자월(子月)로 세워 천통(天統)이 된 것을 일컫는다. 삼강ㆍ오상은 예의 대체(大體)라서 삼대가 서로 계승하여 거기에 인()하니, 근본적으로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손익(損益)한 바라고 하는 것은 문장ㆍ제도나 약간 과()하거나 불급(不及)한 것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지금 우리가 다 볼 수 있다. 그러한즉슨 지금으로부터 주나라를 이어 왕 노릇하는 자가 태어난다면, 비록 백세의 긴 시간이라 할지라도 인습하고 개혁하고 하는 일들이 다 여기서 말하는 범위를 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단지 10세의 일만 알 뿐이겠는가? 성인이 앞으로 전개될 일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 대저 이와 같으니, 이것은 후세의 참위(讖緯)나 술수(術數)의 학문이 떠벌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愚按: 三綱, :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妻綱. 五常, : , , , , . 文質, : 夏尙忠, 商尙質, 周尙文. 三統, : 夏正建寅爲人統, 商正建丑爲地統, 周正建子爲天統. 三綱五常, 禮之大體, 三代相繼, 皆因之而不能變. 其所損益, 不過文章制度小過不及之間. 而其已然之迹, 今皆可見. 則自今以往, 或有繼周而王者, 雖百世之遠, 所因所革, 亦不過此, 豈但十世而已乎! 聖人所以知來者蓋如此, 非若後世讖緯術數之學也.

 

 

주희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세상일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항상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미래의 예측은 명백한 상식적 함수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점쟁이에게 물어보고 상수나 참위로 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빤히 망할 짓만 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점쟁이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국가의 정치도 매일 반이다.

 

 

호인이 말하였다: “자장의 물음은 대저 미래를 알고 싶어한 것인데, 성인께서는 이미 지나간 일을 말씀하시어 그것을 밝힌 것이다. 대저 수신(修身)으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루라도 예가 없을 수는 없다. 하늘의 차 서와 질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共由)해야 할 바이니, 예의 근본인 것이다. 이런 것은 상()나라가 하()나라의 것을 바꿀 것이 없고, ()나라가 상()나라의 것을 바꿀 것이 없다. 이른바 천지의 항상스러운 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나 문위(文爲)로 말할 것 같으면, 너무 지나치면 당연히 손()을 해야하고 너무 부족하면 당연히 익()을 해야한다. 익하고(더하고) 손하는(덜어내는) 것이 때에 맞추어 마땅히 이루어지고 인()해야 할 불변의 가치들은 훼손됨이 없는 것, 이것은 고금의 통의(通義)인 것이다. 지나간 것을 인()하여 올 것을 추측[]하는 것은 비록 백세의 긴 시간이라 하여도 이러한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胡氏曰: “子張之問, 蓋欲知來, 而聖人言其旣往者以明之也. 夫自修身以至於爲天下, 不可一日而無禮, 天敍天秩, 人所共由, 禮之本也. 商不能改乎夏, 周不能改乎商, 所謂天地之常經也. 若乃制度文爲, 或太過則當損, 或不足則當益, 益之損之. 與時宜之, 而所因者不壞, 是古今之通義也. 因往推來, 雖百世之遠, 不過如此而已矣.”

 

 

내가 몇 년 전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알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 )라는 미래학 학자가 강연을 하는데 우연히 들렀다가, 그가 오직 정보사회의 도래라는 테마 하나만을 가지고 인류문명의 필변의 충격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변하는 측면에서도 생각해야 하지만 변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 많다. 그대 가 제3의 물결 운운하면서 그러한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러한 변화에 대한 집념이 인류사의 묵시론적 필변에 대한 환상처럼 우리에게 군림하면서 결국 거 대 다국적기업들이 바라는 사회구조로 인류사회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실로 하찮은 미제국주의의 전도사밖에는 안되는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비쳐질 수도 있다. 우리는 변할 수 없는 삼강ㆍ오상의 가치와 연관된 매우 정감적 세계와 그와 더불어 지속되어야 할 사회체제나 환경문제에 대한 한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과연 이러한 동방적 가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당시 사회를 본 아나운서가 정동영이었다. 내 말이 너무도 큰지 알빈 토플러는 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근원적으로 동방인과 서방인의 사관의 차이의 한 측면을 드러낸 장면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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