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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편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편해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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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일 제상(八佾 第三)

 

 

편해(篇解)

 

 

팔일(八佾)편 역시 최초의 장에 공자의 말로서 나타나는 두 글자를 가지고 편 전체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통례와 같다. 그런데 이 편의 특징은 편 전체가 매우 단일한 주제를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편찬된 내음새를 강렬하게 풍긴다는 것이다. 팔일편이야말로 논어전편 중에서 단일한 주제(monothematic)를 중심으로 통일성이 가장 높은 편임에 틀림이 없다고 주자는 말한다. 그 단일한 주제는 예악(禮樂)’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를 구성하는 제식적 질서(ritual)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제식적 질서는 새롭게 태동하는 혁신적인 국가체제에는 권위를 부여하며, 또 격동하는 사회에는 어떤 심리적 안정성이나 역사적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의 예에 관한 테마는 지배자의 참월을 강렬하게 비판하는 논조로써 강한 선율을 그려나가고 있다. 1, 2, 3, 6, 10, 22, 26장이 모두 그러한 선율 속에 엮어져 있다. 그리고 5장과 24장은 예()보다는 정치적 테마를 다루고 있어 이 편의 성격에서 좀 벗어나므로 후대의 삽입으로 간주되는 것이 옳다고 브룩스는 말한다. 지배자의 참월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 편의 논조는 공자 당대의 사건에 대한 직접적 평어라기보다는, 공자 사후 한참 후대에 전개된 노()나라 계씨가문의 마지막 발악시기의 역사적 현실을 대상으로 한 편집구성을 방증하고 있다고 브룩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기는 계씨(季氏)가 마릉(馬陵)의 전역에서 위()를 패배시키고 칭왕(稱王)()나라의 ()’ 호를 참칭BC 342년의 사건과 관련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기(史記)』 「세가에 기록되어 있는 공부가(孔府家)의 리더들의 족보로 말하자면 자상(子上)을 이은 자가(子家)의 시대에 해당된다고 보고 이 편의 성립시기를 대강 BC 342년으로 비정한다. 이러한 정확한 편집시기의 재구에는 많은 논란이 예상될 수 있다. 팔일(八佾)편이 제10편인 향당(鄕黨)과 제11편인 선진(先進)편과 같은 주제의 발전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제11선진후에 자리잡아야 할 편으로 간주하는 브룩스의 설은 하나의 가설로서 고려의 가치는 있다. 그리고 계씨팔일무(季氏八佾舞)’에 대한 공자의 극렬한 비판도 공자 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공자 사후 훨씬 후대의, 사그러져가는 노나라의 계씨(季氏) 발호에 대한 폄하의 논변이라는 가설 또한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것이지만, 일고의 가치가 있다. 공자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계씨(季氏)의 영주들은 계평자(季平子)ㆍ계환자(季桓子)ㆍ계강자(季康子) 삼인(三人)인데 계환자(季桓子)는 공자와 같이 각료로서 활동한 사람이고, 계강자(季康子)는 공자를 생애 말년에 노나라로 되돌아오도록 주선한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 팔일무의 주인공은 횡포(橫暴)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계평자(季平子, 계손의여季孫意如)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1장의 공자의 계씨 팔일무에 대한 분노의 표현은 공자가 입각()하기 이전의 젊은 날의 평어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데, 그 어조나 정황으로 보아 웬지 어색한 느낌이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팔일무 참월의 주인공을 계환자(季桓子, 계손사季孫斯)로 보고 있는데, 실제로 계환자(季桓子)와 공자의 사이는 그토록 서로 저주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며, 또 그 인간자체가 그렇게 참월만을 일삼는 독재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본 편을 살펴보면 단일한 주제를 중심으로 직전제자들로부터 전송되어 내려온 파편들을 노나라 공문학단 내에서 편집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성립시기도 브룩스의 가설과는 달리 23()의 꽤 초기제자들에 의한 것으로 보여지며, 대강 위정편과 비슷한 시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위정(爲政)편은 정치를 테마로, 팔일(八佾)편은 예악을 테마로 하여 나뉘어진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제1장부터 제19장까지가 1차편집분이었으며 20~22장이 2차편집, 23~26장이 부록으로서 제3차편집에 속한다고 보는 키무라의 설은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제1장과 제19장만이 공자(孔子)’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본 장이 학단 내에서 내려오는 전송에 외부전송을 삽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1장의 계씨 팔일무 비판은 이미 당대에 일반에게 잘 알려진 사건으로서 학단 외에서도 회자되었던 내용인 것 같다. 19장의 정공(定公)과의 대화는 주자의 말대로 국군을 높이기 위하여 겸칭으로서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학단 내의 전송일 수도 있다.

 

각 장이 모두 예악에 관련된 것으로 잡연(雜然)하게 나열된 인상을 주지만 이 편 역시 1-2-3, 4-5-6, 7-8, 9-10-11-12-13-14, 15-16-17-18, 19, 20-21-22, 23-24-25-26의 소그룹으로 나뉘어지며 그 배열에는 그 나름대로의 치밀한 질서가 있다. 의도된 편집임이 분명하다. 26장 마지막 장은 치자의 비례(非禮)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제1장과 관련하여 치자의 예에 대한 태도를 훈계하는 내용으로서 전편을 마무리짓는 성격이 있다. 본 편은 노나라 공문학단의 초기편집에 속하는 것이나 증자문하에서 성립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 팔일이라는 편명에 관하여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논어의 편명은 무조건 앞의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별 생각없이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3편이 그러한 원칙을 따랐다면 편명이 당연히 팔일이 아니라 계씨(季氏)’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제16편이 계씨로 시작되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본 편을 팔일로서 작명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논어의 체제가 단순히 우발적인 편린(片鱗)들의 축적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총체적인 편집을 거쳐 오늘의 형태로 안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편명을 고려하여 제1장을 특별하게 안배했다는 가설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 하여튼 논어의 오늘의 형태를 함부로 갈아엎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논어의 자생적 형성과 정과 잡연한 편린성을 관철하는 유기적 일관성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죽간의 발견 이후, 춘추말기로부터 전국말에 이르는 300여 년의 역사를 치우침 이 없이 균등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연구동향인 동시에 나 도올의 생각이기도 하다.

 

 

 

모두 26장인데 전 편의 끝 2장은 이 편과 통한다. 모두 예ㆍ악의 일을 논하고 있다.

凡二十六章. 通前篇末二章, 皆論禮樂之事.

 

 

주희는 최소한 텍스트에 관한 인식이 있다.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편집된 유기적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앞 편의 두 장에 대해서도 그것이 예와 관련된 것임을 인식하여 본래 이 편에 속했던 로기온파편이라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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