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공자, 태묘에 들어가 모든 절차를 묻다
3-15.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 제사가 진행됨에 매사(每事)를 물으시었다. 3-15. 子入大廟, 每事問. 혹자가 말하기를: “그 누가 저 추인(鄹人)의 자식을 일러 예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와 매사를 물으니.”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묻는 것이 곧 예니라.” 子聞之曰: “是禮也.” |
곡부에 가면 지금도 주공 단을 모신 태묘가 웅장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무분별한 홍위병의 상흔이 아직도 지난 시절의 무지와, 역사의 홍류 속에서 끊임없이 휘몰아치곤 하는 비공(批孔)의 함성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 소조한 뜨락, 기나긴 신도와 하늘을 가르는 청동빛 서린 측백나무의 늘어진 모습들은 원성(元聖)의 권위와 기나긴 사도(斯道)의 발자취를 함축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 주공 태묘 한 가운데 서서 바로 이 장의 공자의 외침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태묘에 들어갔다[子入大廟] 하는 것은, 공자가 대사구가 된 이후의 일이다. 주공의 사당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예는 천자(天子)의 예에 준한 것이므로 평민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장의 사건은 공자 50 세 이후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여기 “추인지자(鄹人之子, 추인의 자식)‘라는 말은 매우 심한 경멸을 함축한 표현이다. 추(鄹)는 공자(孔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재임(在任)하였던 곳의 지명이다. 그러므로 여기 ’추인(鄹人)‘이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추(鄹)라는 곳은 좀 편벽된 곳이요, 괴팍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었으므로 ’추인(鄹人)‘이란 말 자체가 좀 비꼬는 톤을 함축하고 있다. 아 그 ‘추인의 자식’이라는 표현에는, ‘아 그 전라도내기’라든가, ‘경상도내기’, ‘함경도내기’하는 식의 경멸적 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대사구인 높은 지위의 공자를 지칭하여 뒤켠에서 수군거린 이야기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 야유의 톤은 노골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를 지명하지 않고 ‘혹왈(或曰)’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 혹자[或]는 분명 공자의 빠른 출세를 질투한 야비한 정적(政敵)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태묘에 들어가서 제식이 진행됨에 따라 모든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每事問]. 여기에 심한 아이러니가 있다. 공자는 원래 ‘예의 전문가’로 이름을 드날린 인물이다. 공자는 누구보다도 고례의 문헌(문헌자료 + 구두자료)에 밝기 때문에 그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사구가 되어 태묘에 들어오니까 하나도 모르는 듯, 매 절차의 순간마다 구차스러울 정도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혹자는 뇌까린다: “아니 그 누가 저 추인 새끼를 예의 전문가라고 했단 말인가? 저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묻기만 하는 맹충이 자식인데!” 그 비판자의 지적은 너무도 당연하다. 장엄한 제식이 일사불란하게 예악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는 판에 대사구가 일일이 묻고 앉아 있다니! 그 얼마나 눈에 가시같이 걸리는 장면이 었을까?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무어라 답했든가?
시례야(是禮也)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다. 이 ‘시례야(是禮也)’라는 함축적 표현에는 공자의 예악사상의 매우 다양한 측면들이 집약되어 있다.
첫째, 예라는 것은 고정불변의 절차적 지식이 아니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적(situational)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예의 전문가로서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여기 이 상황에 벌어지고 있는 태묘의 제식은 나에게 물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고정적 관념으로서 임하면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나의 묻는 행위가 오히려 이러한 상황적 함수를 고려할 때, 더 상대방에 대한 사려깊은 정중한 행위며, 그것이 곧 예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셋째, 나의 물음 그 자체가 예라는 것이다. 예라는 것은 나의 물음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것이며, 그러한 물음을 통해 예는 변증법적으로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예는 존재(Being)가 아닌 생성(Becoming)이다. 사회적 질서가 생성이 아니고 존재가 되어버릴 때 그것은 인간을 질식시키는 독선이 되어버릴 뿐이다. 예는 영원히 물음의 외피일 뿐이요, 물음의 결과일 뿐이다. 예는 끊임없는 우리의 물음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고정불변의 예는 없다.
『논어』라는 이 희대의 명저가 나의 일갑(一甲)의 생애에서 항상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각인된 두 마디를 들라 한다면 나는 두 시(是)를 꼽는다. 그 하나가 여기 ‘시례야(是禮也)’ 또 하나가 「술이(述而)」 23의 ‘시구야(是丘也)’이다.
‘大’는 ‘태(泰)’라고 발음한다. ‘鄹’는 측류(側留) 반이다. ○ ‘태묘(大廟)’는 노나라에 있는 주공의 묘이다. 이 사건은 아마도 공자가 처음 벼슬했을 때에, 태묘에 들어가 제사를 도운 일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추(鄹)’는 노나라 성읍의 이름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일찍이 추읍의 대부 노릇을 했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에 밝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므로 ‘혹(或)’이라고 표현된 어떤 사람이 이것을 기화로 공자를 꾸짖은 것이다. 공자께서 ‘시례(是禮, 이것이야말로 예)’라고 말씀하신 것은 공경과 근엄의 극치이며, 이것이야말로 예를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인 것이다.
大, 音泰. 鄹, 側留反. ○ 大廟, 魯周公廟. 此蓋孔子始仕之時, 入而助祭也. 鄹, 魯邑名. 孔子父叔梁紇, 嘗爲其邑大夫. 孔子自少以知禮聞, 故或人因此而譏之. 孔子言是禮者, 敬謹之至, 乃所以爲禮也.
○ 윤언명이 말하였다: “예는 경(敬)일 뿐이다. 안다 해도 또 묻는 것은 삼감의 극치이다. 경(敬)을 실천함이 이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자 보고 예를 모른다고 지껄이는 놈이 어찌 족히 공자를 알 수 있으리오!”
○ 尹氏曰: “禮者, 敬而已矣. 雖知亦問, 謹之至也, 其爲敬莫大於此. 謂之不知禮者, 豈足以知孔子哉?”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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