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미 사라진 예법이지만 흔적이 남아 있길
3-17. 자공이 초하루를 알리는 제식에 바치는 희생양 제도를 없애려 하였다. 3-17. 子貢欲去告朔之餼羊.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구나,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
이 장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칼렌다(calendar)’ 즉 역(曆)이라고 하는 인류 문명의 특유한 현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曆)이란 일정한 시간의 길이를 나누는 시스템의 총칭인데, 이 역이란 것은 문명화된 삶의 기본적 사무를 규율화시키는 가장 본질적인 제도인 것이다. 농업, 상업, 정치, 종교, 과학이 모두 이 역(曆)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인지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간의 주기성은 낮과 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과 같은 사계절,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7일) 같은 것은 전혀 인위적인 구분으로서 인간의 자연상태에서는 전혀 인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위적 구분은 문명에 따라 다르게 성립한다. 오늘 우리가 쓰는 주일의 개념은 고대 유대인의 창조설화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을 후대에 로마인들이 계승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1년에 7일 1주 역(曆)을 받아들였고 태양의 날(Sun-day)을 주(週)의 시작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으로 10일을 단위로 하는 순(旬)의 개념을 썼다.
그러나 하루가 되었든 일 년이 되었든 정확한 등분(等分)이 되기 어렵다는 데 역(曆)의 문제점이 있다. 달을 기준으로 삼으면 한 달(月)의 개념은 쉽게 성립하지만 일 년(年)의 개념은 성립하기가 어렵다. 달은, 한 달을 주기로, 기울고 차기만 하기 때문이다. 해를 기준으로 삼으면 일 년의 개념은 쉽게 성립하지만 한 달의 개념은 쉽사리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모두 이 두 체계를 혼합했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태양력은 태양이 지나다니는 황도(黃道)를 관찰하여 만든 것이다. 그 기준은 동지와 하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춘분(春分, vernal equinox)이다. 태양이 동일한 고도에 있게 되는 춘분과 춘분 사이를 1년으로 삼 는데, 이것은 365.242199일이 된다. 그리고 이 때의 하루는 24시간 3분 56.55초의 길이를 갖는다. 하루는 태양이 자오선(the meridian)을 한번 통과해서 그 다음 통과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에는 태음력이 지배적이었다. 고대중국은 물론 유대인ㆍ이슬람도 달의 주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음력을 썼다. 달의 주기가 태양의 주기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the synodic month)는 29.530588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태양력과 태음력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달의 주기로 달을 결정하고 해의 주기로 해를 결정할 때, 음력의 열두 달은 354.36706일이 되며, 한 해에 거의 11일이 모자라게 된다. 태양력의 1년은 음력으로는 12.3682월이 되는 것이다. 이 주기를 계속 반복해나가면 계절이 전혀 맞아 떨어지지를 않게 된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소위 3년 만에 한 번씩 끼워넣는 윤달이라는 것이다【정확하게는 19년 동안에 7번 윤달을 삽입한다. 윤달을 정월 다음에 오게 할 때는 윤정월(閏正月)이라고 하는데, 통상 윤달은 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러니까 윤달이 있는 해는 일 년이 13달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개명한 정보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약속된 연ㆍ월ㆍ일을 아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역(曆)이란 그렇게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이란 대체적으로 지배자들이 제식을 통해 반포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칼렌다는 곧 제식이었고, 그것은 문명의 질서였다.
그런데 고대사회에서 매달 첫날(삭朔)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만월(滿月)의 보름(15일)은 시각적으로 알아보기가 용이하지만, 그 보름과 보름 사이의 삭(朔)은 확정지우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보름과 보름사이는 29.530588일이 된다. 그러므로 기계적으로 보름에서 15일을 거슬러 올라간 날을 삭(朔)으로 정하면, 오차가 누적되어 역이 틀려지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음력에는 반드시 윤달이 끼어들게 마련이고, 그러면 달과 계절이 맞아 떨어지지 않으므로, 새롭게 조정해야하는 필요성이 생긴다.
이러한 곤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달이 기울고 차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서도 태양력의 일년을 고려하여, 봄(춘春)은 정월부터 3월까지, 여름(하夏)은 4월부터 6월까지, 가을(추秋)은 7월부터 9월까지, 겨울(동冬)은 10월부터 12월까지라고 규정하여 달의 이름과 계절을 유동적으로 조절시킨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의 역법(曆法)이 이미 태고의 제왕 요(堯)의 시절부터 확립되었다고 전설은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는 보다 세련된 역법이 있었을 것이나, 그때까지만 해도 매월의 삭일(朔日)에 종묘에 임금이 나아가 희생제물을 바치고 “오늘이 몇월의 시작이옵니다”하고 선조의 신(神)들께 고(告)하는 제사의 풍속이 존속되었다. 이것을 ‘곡삭(告朔)’이라고 했던 것이다【이 경우는 특별하게 ‘곡삭’으로 읽는다. 즉 고가 입성이 되는 것이다[告, 古篤反고독반].】. 이러한 곡삭의 의식을 결정하는 역(曆)이 중앙의 주(周)나라의 왕실로부터 반포되었던 것이다.
노나라의 곡삭(告朔)의 행사는 물론 군주(君主)가 친림(親臨)하는 행사였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보다 1세기를 앞선 문공(文公, 원꽁, Wen Gong, BC 626~609 재위)의 시절부터 군주(君主)가 임석(臨席)을 하지않고, 단지 형식적으로 희생양(희양餼羊)을 바치는 의식만이 존속되었던 것이다. 자공이 노나라의 고관노릇을 하고 있었을 때 자공은 이러한 희생양의 의식을 폐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여기 ‘거곡삭지희양(去告朔之餼羊)’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자공이 폐지하려 했던 것이 양을 죽여 바치는 번거로운 제식절차만을 폐지시키려했던 것 인지, 형식적으로만 존속하고 있던 곡삭(告朔)의 제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어 곡삭(告朔) 그 자체를 폐지시키려 했던 것인지 그 정확한 함의를 확증지울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자공은 곡삭(告朔)이 이미 시대적으로 의미를 잃었으며, 군주(君主)도 등한시하는 제식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주는 임팩트도 옛날같은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희양(餼羊)의 제도를 폐지하면 자연스럽게 곡삭(告朔)의 제도도 폐지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도개혁’과 관련하여 흔히 만나게 되는 상황의 한 전형이다. 의미가 상실된 형식적 제도는 혁파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하는 판단은 상식적이며 진보적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판단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반발은 사회개혁에 대한 매우 보수적인 공자의 입장을 드러내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어서 곡삭(告朔)의 의미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례(古禮)의 실상을 전달해주는 것이며 그것은 단지 형식적 무의미성에 그치는 것이 아닌 현실적 예(禮)의 효용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공자가 중시한 것은 역사의 연속성(Historical Continuity)이며, 사회적 가치의 안정적 전이였으며, 역사적 다양성의 공존이었다. 예(禮)라는 것의 가치가 결코 한 시점의 효용성에 의해서만 공리주의적으로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공자에게는 강했던 것이다.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공자의 이 말씀은, 무엇이든지 사회적 효용의 기준에 의하여 삭삭 자취도 없이 바꾸어버리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하는 요즈음의 세태에 대한 한 경종(警鐘)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문화유산을 아껴야하는가? 단지 관광수입 때문일까? 우리는 이 장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爾)’는 ‘여(汝)’와 성모가 동일한 글자로 같이 2인칭의 의미로 쓰인다. 2인칭의 이(爾)와 여(汝)의 관계는, 1인칭의 오(吾)와 아(我)의 관계와 비슷하다. 주격ㆍ소유격으로 문장의 앞에 오는 2인칭에는 이(爾)가 쓰이며, 목적격으로서 문장의 뒤에 오는 2인칭에는 대개 여(汝)가 쓰인다.
또 곡삭(告朔)이라는 것은 노(魯)나라의 군주가 매월의 첫날(삭朔)에 종묘에서 고(告)하는 제식이 아니라, 전년(前年)의 세모에 주나라의 천자로부터 익년(翌年)의 역(曆)을 각국에 포고(布告)하는 사자(使者)가 노나라에 오는 것을 맞이하는 제식이라는 설(說)을 청(淸)의 고증학자 유보남(劉寶楠)은 열렬히 펼치고 있으나, 이러한 설은 우리나라의 다산이 이미 그에 앞서 명료히 지적한 것이다. 다산은 말한다:
곡삭(告朔)이란 천자(天子)의 사신이 노나라에 와서 정월초하루를 알려주는 제식이다. 『주례』에 의하면 태사가 제후의 나라에 곡삭(告朔)을 반포한다【「춘관(春官)」을 볼 것】. 희양(餼羊)이란 빈객을 예로써 맞이할 때 사용하는 희생이었다【「빙례(聘禮)」를 볼 것】. 주나라가 쇠퇴하여 다시는 태사가 오지 않는데도 유사는 그를 맞이할 양을 길렀으므로, 자공이 이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다.
告朔, 謂天子之使來告正朔也. 周禮, 太史頒告朔于邦國. 餼羊, 禮賓之牲也. 周衰大史不復至, 有司猶畜其羊, 故欲去之.
이 장에 관한 다산의 해석은 매우 정교하고 또 풍요로운 경전지식을 활용하고 있다. 대학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나는 이 장의 해석에 있어 신주의 입장을 따랐다.
‘去’는 기려(起呂) 반이다. ‘告’은 고독(古篤) 반이다. ‘餼’는 허기(許氣) 반이다. ○ ‘곡삭(告朔)’의 예는 옛날에 천자가 항상 섣달[季冬]에 다음해 열두 달의 첫날을 반포하면, 제후들이 그것을 받아서 조묘(祖廟)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매월 초하룻날이 되면 한 마리의 좋은 양을 가지고 종묘에 고유(告由)하면서 청하여 이를 시행하는 것이다. ‘희(餼)’는 날고기 희생이다. 노나라는 문공(文公) 때부터 이미 초하루에 고유하는 예를 돌보지 않았다. 유사가 아직도 쓸데없이 양만 죽여 바치고 있었다. 그래서 자공이 그 허례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去, 起呂反. 告, 古篤反. 餼, 許氣反. ○ 告朔之禮: 古者天子常以季冬, 頒來歲十二月之朔于諸侯, 諸侯受而藏之祖廟. 月朔, 則以特羊告廟, 請而行之. 餼, 生牲也. 魯自文公始不視朔, 而有司猶供此羊, 故子貢欲去之.
‘애(愛)’는 아낀다는 뜻이다. 자공은 그 실(實)이 없이 쓸데없이 낭비만 하는 것을 아깝게(애석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는 비록 폐지되었어도 양이라도 존속되고 있으면 언젠가 고례를 기억하여 복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양마저 함께 없애버리면 이 예는 마침내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예 를 아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愛, 猶惜也. 子貢蓋惜其無實而妄費. 然禮雖廢, 羊存, 猶得以識之而可復焉. 若倂去其羊, 則此禮遂亡矣, 孔子所以惜之.
○ 양중립이 말하였다: “‘곡삭(告朔)’이란 제후가 천자가 친히 반포하는 것을 품명(稟命)하는 것이니 참으로 예의 큰 것이다. 노나라 군주가 초하루에 고유하는 예를 살피지 않았으나 희생양이라도 존속되면 곡삭이라는 명칭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그 실상을 이로 인하여 다시 복원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아깝게 여기신 것이다.”
○ 楊氏曰: “告朔, 諸侯所以稟命於君親, 禮之大者. 魯不視朔矣, 然羊存則告朔之名未泯, 而其實因可擧. 此夫子所以惜之也.”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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