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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3. 아랫목 신보다 부뚜막 신에게 아첨해야 하지 않소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3. 아랫목 신보다 부뚜막 신에게 아첨해야 하지 않소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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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아랫목 신보다 부뚜막 신에게 아첨해야 하지 않소

 

 

3-13. 왕손가가 공자에게 물어 말하였다: “아랫목 신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부뚜막 신에게 잘 보이라 하니,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3-13.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이에 관해서는 구구한 주석이 많으나 다 각설하고 내 생각대로 간결하게 해설하겠다.

 

왕손가(王孫賈), 헌문20에 공자자신의 말 속에서 잘 해설되어 있듯이, 위나라의 현신(賢臣) 삼인(三人) 중의 한 사람이다. 위국(衛國)의 대부인데, 주나라 왕손으로 위국으로 출사(出仕)했다는 설도 있고, 원래 위나라 사람으로 왕손은 성씨일 뿐이라는 설이 있다.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 위령공의 패정에도 불구하고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중숙어(仲叔圉)가 빈객(賓客)을 잘 다스리고(외교), (祝鮀)가 종묘(宗廟)를 잘 다스리고(종교ㆍ문화), 왕손가(王孫賈)가 군려(軍旅)를 잘 다스리어(군사), 적재적소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공자는 위나라의 정세를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좌전정공() 8년조는 위령공이 대국 진()과 맹약을 맺으려할 때 진()나라 신하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은 사건을 기재하고 있다. 이때 왕손가가 상대방의 무례함을 지적하고, 자국민들에게 분노를 표명하여 국론을 통일시켜 진나라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애국적 행동을 결행하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왕손가가 요번에는 공자에게 묘한 발언을 하여, 공자에게 꼼짝 없이 역습당하고 마는 스릴있는 장면이 여기 논어에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미어오(與其媚於奧), 녕미어조(寧媚於竈)’는 당시 유행하던 속담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지신밟기나 마당굿 같은 습속으로부터 쉽게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오묘한 구석이란 뜻인데 이것은 안방 아랫목을 관장하는 신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집돌이굿 중, ‘큰방성주풀이에서 모시는 신으로 생각하면 족할 것이다. ()란 인간의 가옥 삶의 구조에서 가장 비천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는 부엌의 신이다. 부엌을 관장하는 자가 실권을 장악한 자이지만 그는 항상 윗사람들을 모시는 비천한 자리에 있다. ‘어히여루 지신아 조왕지신 울리자, 큰솥은 닷말치 작은 솥은 서말치 …… 울리소 울리소 만대유전을 울리소. 잡귀잡신은 물알로 만복은 이리로 ……조왕지신풀이에서 모시는 신이 곧 조()인 것이다. 주자는 방의 서남쪽 귀퉁이를 오()라 한다. ()는 다섯 제사 중의 하나로서 여름에 제사지 내는 곳이다[室西南隅爲奧. 竈者, 五祀之一, 夏所祭也].’라 하였고, 다산은 이에 관하여 매우 장황한 논의를 펴고 있으나 모두 쇄설(瑣說)에 불과하다. 소박한 의미의 맥락에 따라 그 주제의 뜻이 통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는 아첨한다, 잘 보인다는 뜻이다[, 親順也]. 안방마님이 사시는 곳의 성주대감신에게 아첨하기보다는, 차라리 저 부엌뜨기가 사는 비천한 듯이 보이는 저 곳 부엌의 조왕신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실속이 있지 않겠소? ()와 조()는 각운(脚韻)을 밟고 있는 아름다운 시구다. 여기서 오()는 위령공이나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를 가리키고, ()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위치는 낮지만 실권자인 왕손가 자신을 가리킨다. 왕손가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공자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아니 되었을 것이다. 왕손가는 이때 자기 나라에서 실각의 고배를 마시고 유랑의 길에 올라 여기저기 끼웃거리며 벼슬길 을 구하고 있는 공자를 매우 얕잡아 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벼슬길의 코넥션을 구하러 다니는 한 또라이 유세객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때 공자의 자세는 준엄하다. 공자의 언어의 힘은 상대방의 논리에 대한 치밀한 인과적 고리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급격하게 그 모든 논리를 묵살시키는 새로운 차원을 도입해서 상대방을 무색케 만드는 힘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내 어찌 아첨하는 사람이랴! 나는 성주대감에게도 조왕신에게도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인간세의 이득을 형량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늘 아래 떳떳하게 서고자 할 뿐이다. 나는 성주대감이나 조왕신에게 호감을 사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하늘에 죄를 얻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빌 곳이 없는 인간처럼 비열한 인간이 어디 있으리오!

 

혹자는 이 장의 내용이 왕손가와 공자와의 직접적 대화가 아니라, 왕손가가 자기 처세에 관하여 공자의 자문을 구한 것으로 푸는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즉 이 상황에서는 오()는 영공이 될 것이요, ()는 남자(南子)미자하(彌子瑕)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이 장의 대화의 텐션이 풀려버리는 지극히 나른한 해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왕손가(王孫賈, 왕쑨 지아, Wang-sun Jia)는 위나라의 대부이다. ‘()’는 친하게 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방의 서남쪽 모퉁이를 ()’라고 일컫는다. ‘()’라는 것은 오사(五祀)계절마다 지내는 다섯 제사 중의 하나로서, 여름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대저 오사를 제 지낼 때에는 모두 미리 신주를 설치하고 그 장소 전체에 제를 지낸다. 그리고 나서 시동을 맞이하여 오(, 서남 모퉁이)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대략 종묘에서 제사 지내는 의례와 같다. 또한 조(, 부뚜막)에 제사 지낼 때에는 신주를 부엌 입구 문 바로 밖 평평한 곳(조형)에 설치하고, 제사 를 마치면 다시 제찬(, 제사음식)을 오에 진설하고 시동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행하던 속어에 오(방 아랫목)는 항상 존엄하지만 제사의 주인격은 아니요, (부뚜막)는 비록 비천하지만 때를 당하여 실제적 일들을 관장하는 것이니, 직접 임금에게 결탁해봤자 권신에게 아부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이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는 위나라의 권신이었으니 이런 말로써 벼슬 구하러 떠도는 공자를 풍자한 것이다.

王孫賈, 衛大夫. , 親順也. 室西南隅爲奧. 竈者, 五祀之一, 夏所祭也. 凡祭五祀, 皆先設主而祭於其所, 然後迎尸而祭於奧, 略如祭宗廟之儀. 如祀竈, 則設主於竈陘, 祭畢, 而更設饌於奧以迎尸也. 故時俗之語, 因以奧有常尊, 而非祭之主; 竈雖卑賤, 而當時用事. 喩自結於君, 不如阿附權臣也. , 衛之權臣, 故以此諷孔子.

 

()’이란 곧 리(). 그 천의 존엄성이란 상대성이 없는 것이다. 오ㆍ조 수준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리에 거스르는 것은 곧 천에게 죄를 얻는 것이다. 어찌 오ㆍ조에게 아첨하여 빌어 면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 장은 사람이라면 단지 리()를 따를 뿐이니, 특별히 조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부당할 뿐 아니라 오신에게도 아첨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 卽理也; 其尊無對, 非奧竈之可比也. 逆理, 則獲罪於天矣, 豈媚於奧竈所能禱而免乎? 言但當順理, 非特不當媚竈, 亦不可媚於奧也.

 

사량좌가 말하였다: “성인의 말씀은 공손하여 타인에게 강요함이 없으니, 만약 왕손가가 이 말뜻을 알아들었다면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요, 설령 못 알아 먹었더라도 공자 본인이 화를 취할 일 또한 없을 것이다.”

謝氏曰: “聖人之言, 遜而不迫. 使王孫賈而知此意, 不爲無益; 使其不知, 亦非所以取禍.”

 

 

우리 동학사상에서도 하느님을 그냥 하늘님’(하ᄂᆞᆯ님, ᄒᆞᄂᆞᆯ님)이라고 표현했으며, ‘하느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울님따위의 표현은 전혀 용담유사와 같은 경전의 근거가 없는 말이며, 근세 동학 사상가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1884~?)가 인위적으로 만든 신조어일 뿐이다. ‘하늘님에서 인격성을 나타내는 []’을 떼어내 버리면 그냥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박하게 쓰는 하늘이 된다. 공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늘이다.

 

()이라는 글자는 갑골문이나 금문에 사람의 정면의 모습(𠑺라는 글자)에 두부가 강조된 모습인데 하여튼 이 신성을 나타낸다면 글자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분명 인격적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그냥 우리가 현대일상어에서 쓰는 하늘이라는 일반명사라기보다는, 하늘을 지배하는 인격신으로서의 고유명사라는 설이 통설이다. 다시 말해서 은나라의 최고신은 제()였는데 그것이 주나라로 오면서 천()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설을 고지식하게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천은 은나라 때도 존재했었으니까, 주나라의 역성혁명을 인정한다면 분명 주초로부터 최고신의 개념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라는 글자가 저 광활한 보편자인 하늘인 동시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에게 인격성을 부여 하는 요소도 되지만, 역으로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요소도 된다. 다시 말해 서 은에서 주로, 역성혁명을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종교적 관념을 새로운 정치사상, 새로운 인문사상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이라는 하느님의 등장은 항상 민()이라는 인간의 집단성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천심이 곧 민심이라는 둥, 천명이 곧 민의라는 생각은 주초(周初)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그 핵심적 패러다임의 전환에 주공(周公)이라는 인물이 있다고 공자는 분명하게 파악했다.

 

시경의 용풍(鄘風)군자해로(君子偕老)라는 시는 백년해로라는 말이 있듯이 남녀의 관계가 온전하게 영속되기를 기원하면서 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민간노래의 가사인데, 2절의 끝부분에 이런 표현이 있다: “어쩌면 그리도 천()과 같이 아름다울꼬, 어쩌면 그리도 제()와 같이 아름다울꼬[胡然而天也, 胡然而帝也]!”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경의 시대에만 해도 민간의 관념 속에 제와 천이라는 두 하느님이 아직 병존해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제에서 제와 천의 병존으로, 그리고 천으로, 그리고 민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리는 고대중국사상사의 한 주요흐름으로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주자가 천존무대(天尊無對)’라 말한 것은 참으로 명쾌한 언어이다. 이때 하늘은 상대[]가 없는 절대자이며 지존의 초월자이다. 조신이나 오신은 모두 그리스의 신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천은 그러한 다신의 수준을 뛰어넘는 절대적 지엄이요 지존이다. 따라서 천은 이미 유대교ㆍ기독교전통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하느님은 상대적 하느님들과 공존하면서 그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천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동시에 이치적이며 이법(理法)적인 것이다. () () () ()의 변화의 패러다임만을 생각해도 갑골문으로부터 송유의 도학에 이르기까지의 황하문명의 대체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동방인들의 사유구조 속에서는 신성성(Divinity), 인격성(Personality), 보편성(Universality), 이법성(Rationality)이 모두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포괄적이고 통합적이고 개방적인 사유구조 속에서 우리는 논어를 해독하고, 공자의 로기온을 이해해야 한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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