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사엔 예(禮)보다 정성이 먼저다
3-12. 제사를 지낼 적에는 있는 것 같이 하라 함은, 하느님을 제사 지낼 적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것 같이 하라는 뜻이다. 3-12. 祭如在, 祭神如神在.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직접 참여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 |
‘자왈(子曰)’ 앞에 있는 문장은 분명 공자의 말이 아니며, 공자의 말에 선행하는 당대의 관용적 표현이거나 어떤 고전의 인용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 인용문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이다. 정자(程子: 이천伊川)는 ‘제여재(祭如在)’의 ‘제(祭)’는 자기 조상을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 것이요,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의 ‘제신(祭神)’은 자기 조상 외의 신들을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 것으로 풀었다.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은 효(孝)를 주로 하는 것이요, 선조 외의 신들을 제사 지내는 것은 경(敬)을 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祭, 祭先祖也; 祭神, 祭外神也. 祭先, 主於孝; 祭神, 主於敬]. 다시 말해서 ‘제여재(祭如在)’와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를 두 개의 병치되는 대립구로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공자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자(程子)의 해석은 이미 고주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왈(子曰)’ 앞의 문장을 잘 뜯어보면, 제(祭)와 제신(祭神)을 대립적으로 구분지어 해석하여, 그냥 제(祭)는 조상신의 제사며, 제신(祭神)은 외신(外神)의 제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사자(死者)의 세계에 있어서 선조(先祖)와 외신(外神)이 그렇게 명료히 구분된다는 것도 어색하다. 죽으면 나의 조상신이나 여타 다른 신도 모두 동일한 차원의 신이 될 따름이다. 죽음의 세계에서는 삶의 세계적 구분이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용문은 ‘제여재(祭如在)’에 국한시키는 것이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제여재(祭如在)’만이 공자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고전의 말이며,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는 이 장의 기자가 ‘제여재(祭如在)’의 뜻을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두 말 사이사이에 신(神)을 삽입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전 | 제여재(祭如在) |
해설 |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 |
이것은 소라이(荻生徂徠)의 생각인데 나는 이 장의 해석에 관한 한 소라이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소라이는 『논어』 상당부분이 공자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이미 공자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고전이나 격언이나 관용구적 표현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이것은 그가 선왕지도(先王之道)를 존숭하는 철학적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공자는 어디까지나 선왕지도(先王之道)의 제작자는 아닌 것이다. 그의 선왕지도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공자는 선왕지도에 대한 수동적인 해설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동경대학 유학시절에 토가와 요시오(戶川芳郞) 교수 수업시간에 소라이의 『론고쵸오(論語徵)』(논어징)를 읽었다. 젊은 시절 소라이의 『론고쵸오』로부터 받은 철학적 충격은 참으로 나의 내면세계를 굉동(轟動)시키고도 남을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20세기 한국에 있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왜놈’ 사상가 소라이의 『론고쵸오』를 읽는 사람은 나 도올 한 사람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19세기 초엽의 다산(茶山)이 이미 소라이의 학문적 세계에 관하여 인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소라이의 논어 해석을 그의 『논어고금주』에서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82년 귀국 직후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다산의 소라이 인용은 『고금주』에서 50회에 달하고 있다. 우선 본 장에 관한 소라이의 론고쵸오 원문과 다산의 인문(引文)을 한번 비교하여 보자.
‘제여재(祭如在)’는 고경(經)의 말이다.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는 그 고경(古經)의 말을 해석한 말이다. 그리고 아래로는 공자의 말을 다시 인용하여 그 해석을 증명한 것이다. 이것은 「향당(鄕黨)」편 18장의 ‘색사거의(色斯擧矣)’장의 구조와 동일한 것이다. -소라이-
祭如在, 古經之言也. 祭神如神在, 釋經之言也. 下引孔子之言以證之, 如色斯擧矣章也. 『論語徵』
소라이는 말한다: “위로는 고경과 그것을 해석한 전(傳)의 문장을 들었고, 아래로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향당(鄕黨)」의 ‘색사거의(色斯擧矣)’장과 같은 한 예이다.” 나는 논박하여 말한다: “그렇지 아니하다.” -다산-
荻曰: “上擧古經ㆍ傳之文, 下引孔子之言以證之, 與色斯擧章一例.” 駁曰: “非也.” 『論語古今注』
이 두 문장을 비교하여 보면 다산의 ‘적왈(荻曰)’의 내용은 소라이의 『논어』의 직접인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라이가 『논어』에서 논술한 내용을 소화된 언어로 다시 편집한 것이다. 『고금주』에 나오는 ‘적왈(荻曰)’의 내용을 모두 검토해본 결과 다산이 『논어』에서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다산이 소라이의 『논어징』을 보았을까?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다산이 소라이(荻生徂徠)의 직전제자인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1680~1747)의 『논어』 주석서인 『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의 발문(跋文)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발문은 『여유당전서』제1권 「시문집(詩文集)」 제1집 14권 23b에 실려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엔쿄오(延享) 원년(1744) 목각판인 『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江都書肆嵩山房梓行)을 구해 보고나서 모든 의문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다산의 오규우 소라이 그리고 이토오 진사이의 인용은 모두 슌다이의 『외전』을 재인용한 것이다. ‘적선생왈(荻先生曰)’을 ‘적왈(荻曰)’로 고쳤을 뿐이다. 때로는 소라이의 설로써 슌다이가 논의하고 있는 대목을 그냥 ‘적왈(荻曰)’로 인용하고 있을 때도 있다【인용형식은 ‘왈(曰)’이 43개, ‘운(云)’이 6개, ‘설(說)’이 한 개】.
다산이 이토오 진사이의 『논어고의(論語古義)』와 오규우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을 직접 구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슌다이의 단편적 인용을 통해서는 도저히 진사이에서 시작되어 소라이에서 만개(滿開)된 코가쿠(古學)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산은 일본인들은 “오로지 거짓으로써 지략을 삼으며, 경생호살(輕生好殺)하는 잔인성이 있으며, 연해제국(沿海諸國)을 표략(剽掠)하고 보화양백(寶貨糧帛)을 약탈하여 목전의 욕심만을 채우기 때문에 아방(我邦)의 큰 우환이다”라고 통념적인 일본관을 전제하면서도 진사이-소라이-슌다이에 이르는 코가쿠(고학)의 찬란한 성과에 충격을 받은 듯, 이 정도의 학문이 승(勝)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나라를 침략할 걱정은 없다라는 낙관론을 펴기도 하였다. 문(文)이 없을 때는 예의가 없어 약탈을 일삼게 되지만 이토록 심하게 문승(文勝)할 정도라면 무력으로 경거망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튼 다산의 낙관론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고학파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학자로서의 정직한 충격의 일면을 우리는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다산의 일본관과 고학사상연구에 관해서 참고할 만한 책이 하나 있다. 하우봉(河宇鳳),『朝鮮後期實學者의 日本觀硏究』 서울: 一志社, 1989】.
우리가 옛 사람을 볼 때, 항상 우리보다 정보에 어둡고 편협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다. 나는 20세기 후반에 아무도 유학하지 않는 동경대학 중국 철학과에 가서 외롭게 공부하며 어렵게 에도사상을 흡수했다. 나는 유구한 한학의 전통을 지닌 동경대학 중국철학과에 정식 입학한 최초의 한인 유학생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그 많은 일본유학생이 있었지만 아무도 동경대학 중국철학과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20세기 우리나라 고등문명이 한학에 본질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의 한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귀국했을 때 우리 한국 대학사회는 내가 흡수한 지식을 공평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나는 고려대학교에 ‘일본철학’이라는 과목 하나를 개설하는 데도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동경대학에 ‘한국철학’이라는 과목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 대학에 ‘일본철학’을 개설할 수 있는가라고 교수회의에서 반대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영국 캠브릿지대학에 ‘한국철학’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 대학에 ‘영국경험론’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는 막무가내였다. 에도 유학은 철학의 자격이 없다. 소라이(荻生徂徠) 고학(古學)은 철학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초엽의 조선왕조의 한 사상가는 이미 저 땅끝 강진 다산(茶山)의 초당에서 현해탄의 거센 풍랑을 초월하여 슌다이의 저작을 통해 진사이와 소라이의 학문세계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오히려 현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폭넓게 세계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중국의 문헌과 일본의 문헌과 서양과학ㆍ기독교의 문헌을 될 수 있는 대로 폭넓게 수용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체적 입장을 잃지 않았고 또 그만큼 상대방의 세계로 편견 없이 천착해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다산(茶山)의 저작을 정독해보면 다산이 과연 내가 20세기 동경에서 받았던 소라이의 충격을 느꼈을런지는 퍽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소라이(荻生徂徠)의 학문세계에 대한 해석이, 다산의 시대에는,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포스트 마루야마’【마루야마 마사오 이후의 학문관】 식의 소라이 학문에 대한 폭넓고 심도 있는 해석의 수준에 미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다산이 소라이의 철학적 입장을 압축한 『변도(弁道)』나 『변명(弁名)』과 같은 논서(論著)를 접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다산은 소라이를 총체적 세계관을 지닌 대사상가로서라기 보다는 일개의 논어주석가로서 단편적으로 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말ㆍ19세기 초에 이미 당대에 가능했던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학문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다산의 열정에 비추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세계인식에 관하여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신(God)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제사 지낼 적에는 마치 신이 그곳에 강림하여, 나와 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만 그 제사의 의미 가 있다. 여기 중요한 것은, 이 장의 문장이 신(神)이 존재론적으로 선재(先在)해 있고 그 신(神)에게 내가 참여한다는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여신재(如神在)’는 ‘마치 신이 있는 것처럼’의 뜻이다. 이미 신의 존재는 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신은 이미 비신화화되어 있고, 인간의 내음새 속에 젖어있다. 신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제사를 위하여 경건되게 요청하는 존 재인 것이다. 이러한 ‘마치 ……처럼’의 요청이야말로 오히려 신의 의미를 절대적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인식의 변화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를 왕래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는 말한다. 신의 존재는 오로지 내가 제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확보되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일방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의 실존의 유무와 상관없이 고존(孤存)하는 불감(不感)의 존재태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감응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갖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무슨 바쁜 일이 있어, 제사에 남을 대리출석시켰다면, 사실 그 제사는 안 지낸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제신여신재(祭神如在祭)’라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하여 공자는 ‘오불여제(吾不與祭), 여부제(如不祭).’라고 하는 주체적 인식의 명제를 제시한 것이다: “내가 직접 참여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신은 나와 더불어 감응하는 장(場)에만 존재한다. 신의 궁극적 의미는 나의 감응(Feeling)의 장(場)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틸리히의 말대로 나의 실존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일 수도 있고, 불트만의 말대로 나의 실존의 ‘종말론적 순간’일 수도 있다.
다산(茶山)이 포씨(包氏)의 고주를 비판하고, ‘주제(主祭)’와 ‘여제(與祭)’는 분별적으로 사용된 개념이며, 공자는 장자(맏아들)가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주제(主祭)’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고 운운하는 것은 사소한 고중가의 병폐에 불과하다.
정자가 말하였다: “맨 앞의 ‘제(祭)’는 선조(先祖)에게 제사하는 것이요, 그 다음의 ‘제신(祭神)’은 집안 선조 이외의 외신(外神)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선조를 제사하는 것은 효(孝)를 주로 하고, 하느님(외신)을 제사하는 것은 경(敬)을 주로 하는 것이다.”
程子曰: “祭, 祭先祖也. 祭神, 祭外神也. 祭先主於孝, 祭神主於敬.”
나 주희가 생각컨대 이는 문인들이 공자께서 제사를 지내실 때 성의를 다하시는 모습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愚謂此門人記孔子祭祀之誠意.
이상은 주희가 첫 구절인 ‘제여재(祭如在),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에 대 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정자의 해설을 인용해놓고도, 자기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회의 설인즉 소라이(荻生徂徠)처럼 이것이 객관화된 격언이라고 생각지도 않으며, 정자처럼 앞의 제는 조상숭배이고, 뒤의 제신은 외신숭배 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공자의 문인들이 공자의 제사지낼 때의 성의를 다하는 경건스러운 모습을 기술해놓은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與)’는 거성이다. ○ 그 다음에는 또다시 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여 공자의 실천하는 모습을 천명한 것이다. 그것은 곧, 당신이 제사를 지낼 때를 당하여 부득이한 연고가 있어 참여할 수 없을 때 타인으로 대신케 하면 조상이 그 제사에 임하신 듯한 정성을 다할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제사는 지냈으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아 제사 지낸 적이 없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與, 去聲. ○ 又記孔子之言以明之. 言己當祭之時, 或有故不得與, 而使他人攝之, 則不得致其如在之誠. 故雖已祭, 而此心缺然, 如未嘗祭也.
○ 범순부가 말하였다: “군자의 제사란 7일 전부터 조심하는 계(戒)에 들어가고, 3일 전부터 목욕하는 재(齋)에 들어가는 것이니 막상 제삿날에는 제사 지내는 대상을 반드시 보게 되는 것은 성(誠)의 극치이다. 그러함으로 교제(郊)를 지내면 하느님(天神)이 이르고 사당[廟]에서 제사를 지내면 조상들의 귀신이 이르러 흠향케 되는데, 이는 모두 나로 말미암아 하느님들이 오시게 되는 것이다. 나의 정성이 있으면 하느님이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이요, 나의 정성이 없으면 하느님도 없으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몸으로 제사에 참여치 아니 하면 제사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공자님 말씀은 곧 정성이 곧 제사의 실내용이고, 예라는 것은 헛껍데기라는 것이다.”
○ 范氏曰: “君子之祭, 七日戒, 三日齊, 必見所祭者, 誠之至也. 是故郊則天神格, 廟則人鬼享, 皆由己以致之也. 有其誠則有其神, 無其誠則無其神, 可不謹乎? 吾不與祭如不祭, 誠爲實, 禮爲虛也.”
범순부의 말이 실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왜 일요일 예배를 가는가? 그것은 결국 야훼제사를 지내든가 예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다. 일요일 예배도 결국은 제사의 독특한 하나의 형식이다. 많은 사람이 조상에게 지내는 시제가 너무도 번거롭고 돈 많이 들고 횟수가 많다고 투덜거리지만 사실 매일 일요일 교회 가는 제사에 비하면 횟수도 너무 적은 것이요, 교회헌금에 비하면 돈도 적게 들고 그리 번거롭지도 않은 것이다. 범순부의 말대로 성(誠)이 실(實)이요, 예(禮)란 본시 허(虛)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예배나 집안제사나 결국 그 목적은 ‘신의 강림’에 있다. 그래서 펀더멘탈리스트(fundamentalism, 근본주의)적인 교회일수록 ‘성령의 강림’ 운운하면서 온갖 제스쳐를 다 동원하지만, 결국 모든 제사가 ‘제여재(祭如在)’의 원칙 아래서 운용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키에 유교의 제사가 너무 형식화되어 있어 진정 제사의 대상이 강림하여 사람들과 같이 하는 그런 모습을 느끼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의 형식은 변하는 것이므로 제사도 좀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할 필요도 있다. 설위진기(設位陳器), 참신(參神), 진찬(進饌),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유식(侑食), 합문(闔門), 계문(啓門), 사신(辭神), 납주(納主), 철(徹), 준(餕) 등의 제식을 보다 예술적으로, 보다 의미있게 내용과 형식을 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형제들끼리 상의하여 국악팀을 초청할 수도 있고, 집안에 음악하는 자가 있으면 활용하여도 좋고, 또 째즈스타일의 제사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조상들의 살아 생전의 육성도 남아있을 수도 있고 영상자료도 활용할 수 있고, 하여튼 그 원칙은 ‘제여재(祭如在)’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인간은 모순투성이의 존재라 할지라도 죽고나면 추상화되어 버린다. 그 추상성을 극단화시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기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을 버리고 교감키 어려운 외신인 예수귀신이나 야훼귀신을 섬긴다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미신일 수가 있다. 우리민족이 한번 반성해볼 만한 대목이다. 유교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와 악이 같이 가야한다. 제례(祭禮)와 더불어 제악(祭樂)이 필수라는 것을 말해둔다. 자신의 본원(本源)과 교감하는 삶은 고귀한 삶이라는 것이 유교의 신념이라는 것만 여기 명기해둔다.
인용
'고전 > 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4. 공자는 주나라를 이상향으로 여기다 (0) | 2021.05.27 |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3. 아랫목 신보다 부뚜막 신에게 아첨해야 하지 않소 (0) | 2021.05.27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1. 체제사를 알면 나라를 다스림은 쉽다 (0) | 2021.05.27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10. 노나라가 참람되이 천자의 제사인 체(禘)제사를 지내다 (0) | 2021.05.27 |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9. 문헌이 부족하여 증명할 수가 없네 (0) | 2021.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