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랫사람을 부림과 윗사람을 섬기는 방법
3-19. 정공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3-19.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禮)로써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해야 합니다.”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
앞의 18장의 내용도 결국 정공(定公)시절의 공자의 삶을 배경으로 한 것 으로 보아야 한다면 18장과 19장은 내재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수집된 파편일 것이다. 그리고 19장은 ‘자왈(子曰)’이 아닌 ‘공자대왈(孔子對子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1장과 함께 공자학단 외부전승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1장과 19장은 인민의 지배자는 예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주제의식에 있어서 상통한다. 20장부터는 『시경』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본 편의 분위기가 좀 달라진다. 여기 19장까지가 「팔일(八佾)」편의 제1차 편집으로 간주되며, 20장부터는 후에 부록으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키무라 설).
정공은 노나라의 군주였다. 형 소공(昭公)이 ‘삼가(三家)’의 대부들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국외에서 객사를 하고 만 후에, 권신들에 의하여 옹립되어 BC 509년에서 495년까지 15년 간 재위하였다. 양공(襄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송(宋)이다. 정공의 재위기간을 공자의 나이로 말하자면 43세부터 57세 사이의 기간이다. 그러니까 공자가 노나라에서 대사구의 자리에까지 중용(重用)된 것은 모두가 이 정공이라는 인물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공은 매우 여린 성격의 인물이었다. 공자에 대한 애ㆍ증이 항상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누구보다도 공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공자의 말을 실천하기를 두려워하는 분열적 인간상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선조(宣祖)와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라고 해야할까? 공자가 수상과도 같은 실권자의 지위에 오른 것도, 또 삼환(三桓)의 무장해제시도나 개혁정치의 단행을 계기로 실각의 고배를 마시고 기약 없는 유랑의 슬픈 여정을 떠나게 된 것도 모두 이 정공이라는 인물이 계기가 된 사건들이었다.
공자가 대신(大臣)의 지위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양호(陽虎)라는 인물의 실각이라는 사건이 있다. 양호의 전횡으로 국가가 혼란에 빠진 후, 그 뒷수습을 하면서 대신의 자리에 오른 공자에게 정공은 호기심이 있었고 또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어떤 묘방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공은 공자에게 이와 같이 물은 것이다: 임금은 신하를 어떻게 부려야 하며, 신하는 임금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군신관계의 마땅한 모습이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에 정공은 실망했을 것이다. 묘책이 아닌 원칙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예의로 대해야 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공자는 예(禮)의 전문가다. 예(禮)란 그에게 있어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적 질서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식(常識)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관적 질서인 동시에 상식을 통하여 객관화될 수 있는 규범이다. 군(君)은 신(臣)을 예(禮)로써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즉 상식적인 도덕적 규범 속에서 부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臣)은 군(君)을 충(忠)으로써 섬길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충(忠)은 물론 협의의 충의(忠義)나 충성심이나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충(忠)이란 가슴 속[中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眞情)이요 진심(眞心)이다. 그것은 로얄티(loyalty)가 아닌 어펙션(affection)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성의의 표출이다. 군신관계의 하이어라키(hierarchy, 위계질서)에 구애되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해서 소라이(荻生徂徠)는 또 하나의 기발한 해석을 내렸다. 사회계 약적인 근대정신을 투영하고 있는 그의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일관되게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군사신이례(君使臣以禮), 신사군이충(臣事君以忠)’의 앞 구문을 뒷 구문의 조건절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이라면 하게 될 것이다’의 ‘if-then-’의 구조가 장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군주의 예(禮)는 신하의 충(忠)을 도출해내기 위한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린다면, 신하 또한 임금을 충으로써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라이에게 있어서 단지 군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군신관계의 이니시어티브는 항상 군(君)이 장악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군(君)의 강력한 책임의식을 묻는 맥락이 깃들어 있다[然施之必由君始焉].
공안국(孔安國)의 고주는 ‘정공의 시대에는 신하들이 실례를 일삼았다. 그래서 정공이 이를 걱정하여 공자에게 물은 것이다[시신실례(時臣失禮), 정공환지(定公患之), 고문야(故問也)]’라 했는데, 앞 장과 일관된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황간의 소(疏)는 ‘임금이 만약 무례하면, 신하 또한 불충할 뿐이다[군약무례(君若無禮), 즉신역불충야(則臣亦不忠也)]’라 하여 군신의 관계가 조건적 관계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신하가 임금을 따르는 것은 풀이 바람결에 좌우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며, 임금이 능히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만 비로소 신하도 임금을 섬기는데 있어 충(忠)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자의 답은 신하들의 무례함을 암시하는 정공을 오히려 야단치는 맥 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孔子答因斥定公也. 言臣之從君如草從風, 故君能使臣得禮, 則臣事君必盡忠也. 君若無禮, 則臣亦不忠也].
소라이(荻生徂徠)의 입론(立論)은 황간의 소를 이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고주소(古注疏)의 입장을 거의 논박하는 입장을 취하나 소라이는 고주소(古注疏)가 대체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정공(定公)’은 노나라 군주이며 그 이름은 송(宋)이다. 본장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사항은 리(理)의 당연(然)이다. 군주와 신하가 각기 스스로 해야 할 바를 다하려고 노력해야 할 뿐이다.
定公, 魯君, 名宋. 二者皆理之當然, 各欲自盡而已.
○ 여여숙(여대림)이 말하였다: “신하를 부릴 때에는 신하가 불충(不忠)할까를 걱정치 말고, 자기가 예를 다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한다. 임금을 섬길 때에는 임금이 무례(無禮)할까를 걱정치 말고, 자기의 충(忠)이 부족할까 걱정해야 한다.”
○ 呂氏曰: “使臣不患其不忠, 患禮之不至; 事君不患其無禮, 患忠之不足.”
○ 윤언명이 말하였다: “군신의 사이는 의(義)로써 결합된 것이므로, 임금이 신하 부리기를 예(禮)로써 하면 신하가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 하는 것이다.”
○ 尹氏曰: “君臣以義合者也. 故君使臣以禮, 則臣事君以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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