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동양이라는 말
보통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말하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가 동쪽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 동양이라는 명칭은 사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나마도 그들이 아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와 인도에 불과했고, 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북에 국한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남쪽에 있으므로 동서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서쪽에 있다고 믿었고, 유럽에서 동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아시아를 동양(East)이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직 동방의 끝까지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주로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을 동양이라고 불렀다.
점차 유럽인들은 그들이 동양이라고 부르는 대륙이 실상 엄청나게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유럽과 연관이 있는 서아시아 지역만이 동양의 전부인 줄 알고 이를 오리엔트(Orient)라고 불렀으나 그 오리엔트보다 더 동쪽에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넓으면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에 가까운 동양을 근동(近東, Near East, 서아시아) 가장 먼 아시아 동쪽 끝을 극동(極東, Far East) 이라고 불렀다.
순전히 유럽인들이 자기중심적으로 붙인 이름이지만, 이렇게 해서 한반도와 일본은 서구인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아주 멀고 외딴 곳으로 인식되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지도를 사용하지만, 대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세계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일본은 맨 오른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 ‘극동’이라는 이름이 꽤나 어울려 보인다. 이런 세계지도에 익숙해진 탓에 오늘날까지도 서구인들 중에는 극동을 마치 오지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런 편견은 우리에게도 있다. 태평양 중심의 세계지도에 익숙한 우리는 대서양이 그렇게 넓은 바다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며, 대서양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에 남북 아메리카와 유럽, 아프리카 등 다양한 문명권이 활발히 교류한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만큼 동서의 관념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메리카 대륙의 초기 문명들이 후대에까지 연장되면서 발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일찍부터 태평양으로 진출했더라면, 지금의 동양은 서양이 되고 유럽은 극서(Far West)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또 수백년 전까지 그랬듯이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면, 중국인들은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유럽을 서양, 태평양 너머 아메리카를 동양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실제로 중국인들은 언제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동양사의 세 가지 축
동양이라는 말이 서양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 해서 무작정 폐기 처분할 것까지는 없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일본은 7세기 무렵에 그전까지 ‘왜(倭)’라고 불리던 자기들 이름을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당시 일본의 지배자였던 쇼토쿠(聖德) 태자는 중국 수 제국에 보내는 서신에 이렇게 썼다.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일본과 중국을 대등하게 간주한다는 말인데, 물론 수의 황제인 문제(文帝)는 크게 노여워했다. 그러나 해는 일본에서 떠서 중국에서 진다는 뜻이니, 당시 동양인들 역시 당시 서양인들처럼 자기네 지역을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 것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본다면 유럽인들이 스스로를 중앙, 아시아를 변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리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인 동양과 서양으로만 부른 것에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중국(中國)’이라는 나라 이름에서 보듯이 자기중심적 사고는 서양인보다 중국인이 훨씬 강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은 원래 상대적인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동양사라는 말도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동부, 즉 아시아의 역사를 가리키는 용어다.
아시아는 남북 아메리카를 합친 면적 혹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친 면적보다도 넓고, 세계 인구의 60퍼센트가 모여 사는 거대한 대륙이다. 동양사라고 해서 이 드넓은 지역과 수많은 민족의 역사를 모조리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몇 군데를 제외해보자.
일단 지리적으로 볼 때 시베리아나 동남아 열대 지역은 문명이 발달하기 어려운 자연조건을 지녔다. 또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 걸친 이슬람권은 동양사보다는 서양사의 영역에 속한다. 일찍이 오리엔트 문명이 에게 해와 그리스로 전달되면서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여기서 비롯된 이슬람 문화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중세 서양 문명은 유럽과 이슬람권을 아우른다). 그리고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는 세계사의 무대에서 핵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인도와 중국 등 주변 큰 나라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극동(極東), 즉 동북아시아와 인도가 남는다. 우선 뭐니 뭐니 해도 동양사의 가장 큰 기둥은 중국의 역사다. 한반도와 일본은 크게 중국의 영향권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 대륙에 가까운 한반도에 비해 일본은 상대적으로 고립된 덕분에 독자적인 역사를 가질 수 있는 폭이 넓었다. 그러므로 각기 독자적인 역사를 꾸려 왔다는 측면에서 동양사의 세 가지 축은 인도와 중국, 일본으로 잡을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이 세 나라에 사는 인구는 무려 20억이 넘으므로(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20세기에 인도에서 분리되었으므로 여기에 포함시켜도 된다) 인구만으로 따질 경우 이 세 나라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셈이다.
혹시 일본사를 동양사의 한 축으로 집어넣는 것에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사를 바라볼 때 편협한 민족적 편견을 버리는 게 좋다.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은 중국의 영향권에서 상당히 독립된 역사를 전개해왔으므로(특히 9세기 이후) 동양사의 한 축을 담당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현대의 일본은 인구 1억이 넘고 세계 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는 나라다. 굳이 ‘과거는 오늘을 읽는 창’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역사는 동양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떻게 시대를 나눌 것인가
수천 년에 이르는 동양의 역사시대 전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살펴보기는 어려울뿐더러 섣부르게 달려들다간 산만해지게 된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사실 시기 구분의 문제는 역사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시대를 정치적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사회경제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시간 순서에 따라 편의적으로 고대, 중세, 근세, 현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역사를 ‘연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목적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구분을 택하기로 한다. 모든 개별 역사는 발생하고 성장하고 세계사에 섞이는 시대를 거친다. 마치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어 사회에 뛰어들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이 태어남과 자람, 뒤섞임의 세 단계로 나누어 동양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렇게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기존 역사학에는 없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가장 손쉽고 정확한 방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역사 연구자가 아니니까.
중국과 인도, 일본의 역사는 각기 별도로 생겨나서 점점 힘을 키우고 강역을 넓혀나가다가 마침내 서양의 역사와 합쳐지면서 세계사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1부에서는 중국과 인도, 일본의 역사가 시작된 과정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그들 역사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장과 발전을 해온 과정,
그리고 3부에서는 세 역사가 하나의 전 지구적 역사, 세계사 속에 통합되고 편입되는 과정을 보기로 한다.
세 나라가 별개의 역사를 전개했으므로 이 세 역사를 넘나들면 마치 접시돌리기처럼 어지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 역사의 탄생과 성장, 융합을 시간순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세 역사를 별개로 맞추면 독립된 세 나라의 역사가 된다. 독자의 필요에 따라서는 중국사, 인도사, 일본사의 세 부분을 각각 연속으로 읽어도 좋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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