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을 모시기 위한 주공의 고군분투
주공악발(周公握髮)
『史記』曰. 武王崩, 周公相成王. 使其子伯禽, 代就封於魯, 戒之曰: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 愼無以國驕人.”
해석
『史記』曰.
『사기』에 실린 내용이다.
무왕이 붕어(崩御)하시자 주공이 성왕을 도왔다.
而使其子伯禽, 代就封於魯, 戒之曰:
아들 백금에게 대신하여 노나라의 봉지(封地)로 나가게 하며 그를 경계했다.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나는 문왕의 자식이고 무왕의 아우이며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성왕의 숙부로 나는 천하에 또한 천하지 않다.
然我一沐三握髮,
그러나 나는 한 번 머리 감을 때 머리카락을 세 번 쥐어야 했고
一飯三吐哺,
한 번 밥 먹을 때 세 번 먹던 걸 뱉고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일어나 선비를 맞이했지만 오히려 천하의 어진 사람을 잃을까 걱정했다.
子之魯, 愼無以國驕人.”
네가 노나라로 가거든 삼가며 제후로 백성에게 교만 떨지 말렴.”
해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겸손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예전부터 강조되어 온 공직자의 미덕이지만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
특히 정권이 바뀌고 이전 시대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새로운 정권의 상층부에 올라가면 기고만장해진다. 항상 주인보다 마름이 더 가혹하듯이 통치자가 아무리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어도 그의 손발들이 당하고 배운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경우가 많다.
「주공악발(周公握髮)」와 「채옹도사(蔡邕倒屣)」의 두 이야기는 겸손함으로 인재를 끌어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주공악발(周公握髮)」에서 주공은 나라를 연 지 얼마 안 되는 주나라 왕조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중국 문화의 기초를 다졌으며 공자가 현실 속에서 실패했을 때 ‘꿈속에서 주공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됐다[久矣吾不復夢見周公]’고 한탄할 정도로 이상적인 정치인이고 사상가였다.
여기 실려 있는 이야기는 하나라 우왕 부분에도 적혀 있어 실화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채옹도사(蔡邕倒屣)」에서 채옹의 경우는 특정 인물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왕찬은 나이가 젊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당대의 대학자로서 조정의 여망을 짊어진 채옹에게만 눈에 띄었다.
후한시대 말기는 인물 평가가 굉장히 유행하던 시대이다.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관상학이 탄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후한시대 이후로 삼국지의 배경 시대였던 위진남북조시대는 대단한 난세였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인재를 시험하고 평가할 수 없었다. 한번 보고 쓸 만한 인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짓는 문제였다. 인재를 선택하는 데는 그 나름의 기준과 경험이 필요했고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관상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고대인의 인상 경험과 부족한 과학지식이 또 하나의 탄생 배경인 것이다. 요즘 미아리나 종로에 관상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미래도 사람도 불확실한 난세인가 보다 헌제가 도읍을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긴 것은 동탁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동탁은 왕찬의 아버지 왕겸이 모시고 있던 대장군 하진의 명령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입성한다.
하황후의 오빠인 하진이 환관을 제거하기 위해 동탁의 군사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중간에 새어나가 하진은 살해 당했다. 그 뒤 입성한 동탁은 환관을 모두 죽이고 소제를 폐한 뒤 헌제를 옹립하는 등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렀다. 그 때문에 동탁을 물리치기 위한 군벌 동맹이 생겨 낙양을 몇 겹으로 포위하자, 동탁이 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위세가 등등한 동탁을 사도 왕윤이 그의 부장인 여포를 이용해서 암살했다.
왕윤은 채옹을 동탁에게 협력했다고 해서 처형했지만 자신도 급히 돌아온 동탁의 부장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때 상황은 「칠애시(七哀詩)」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물론 『삼국지』에도 실려 있는 이야기다.
뒤에 왕찬은 조조의 밑으로 가서 문학을 좋아하는 조조 부자에게서 사랑 받고 뛰어난 다섯 자로 된 오언시를 많이 지었다. 이른바 위나라의 건안시대 일곱 명의 대문호인 ‘건안칠자(建安七子)’로 일컬어지는 문학자들의 가장 연장자로 오언시의 확립에 기여했다. 채용에게서 인정받았던 재능이 꽃을 피웠다고 말해도 좋겠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22~24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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