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태어남
황허 문명을 계승한 중원 문명은 발상지를 중심으로 점차 문명의 빛을 밝힌다. 주나라는 중국 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 사상의 토대가 놓인다.
종교의 나라답게 인도의 역사는 처음부터 종교와 밀접하게 맞물린다.
일본은 대륙에서 문명을 전해받지만 중국과 다른 ‘작은 천하’를 이루면서 특유의 고립된 역사를 전개한다.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나는 바오밥 나무란 교회만큼이나 큰 나무라는 것을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영리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오밥 나무도 크기 전에는 조그마할 거 아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추어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싹수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건국신화라는 인데, 잘 만들어놓으면 신생국의 정통성에 큰 도움이 된다.
중국인들만큼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따지는 민족도 없다. 중국의 역대 한족(漢族) 왕조들은 언제나 개국 초기부터 이전 정권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전 정권이 백성들의 원망을 받았을 경우에는 몇 다리 건너뛰어 ‘옛날의 좋았던 때’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나중에 보겠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 ‘좋았던 때’란 대개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존재했던 주나라를 가리킨다).
그렇게 전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국이 원래 농경 사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농경민족은 유목민족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 여러 대에 걸쳐 살아간다.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조상이다. 조상 대대로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는 말이 자긍심의 원천이자 정통성의 기반이다.
▲ 황제가 발명했다는 수레. 황제는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동이족의 우두머리인 치우(蚩尤)의 대군에게 승리함으로써 중원을 지켜내고 중국 문명을 보호했다고 한다. 이 수레는 황제가 발명해 당시 전쟁에서 큰 몫을 했다는 지남차(指南車)다.
그렇게 조상을 중시한다면 당연히 최초의 조상이 있을 것이다. 중국 민족이 최초의 조상으로 받드는 인물은 황제(黃帝)【직위로서의 황제(皇帝)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다. 그런 위상에 걸맞게 황제는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밖으로는 동이족의 치우와 싸워 이겨 중원(황하 중류)의 비옥한 평원 지대를 정복했는가 하면, 안으로는 문자와 역법, 화폐, 수레 등을 발명하고 보급했다. 가히 팔방미인이며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러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과장과 신화화를 포함한다. 어느 한 사람이 불현듯 나타나 안팎으로 튼실한 중국이라는 나라를 우지끈뚝딱하고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제는 기원전 2704년에 태어나 일곱 살에 임금이 되었다고 전하지만, 언제 죽었다는 기록조차 없는 걸 보면 실존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추측하자면 황제는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에 존재했던 지배 집단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조상이나 아버지의 이름을 후손들이 물려받는 관습은 『구약성서』에도 나오고 중세 유럽에도 있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1908세까지 살았다는 우리 역사의 단군도 그럴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설사 단일 인물이 아니라 지배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전까지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을 완전히 새로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부모가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황제의 조상은 누구였을까?
▲ 황제의 초상. 중국 민족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황제(黃帝)는 전형적인 중국인의 용모에 의젓한 황제(皇帝)의 풍채다. 하지만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 해도 이 한 사람의 힘으로 문자와 역법, 화폐, 수레 등 온갖 문물과 사회제도를 발명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비록 황제의 분묘와 비문이라고 알려진 유적이 전해지지만, 그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당시에 존재했던 지배 집단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일 것으로 추측된다.
황제도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로 어려울 정도라면 그 이전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황제 이전의 시대는 역사보다 신화에 속한다. 실제로 그 시대를 해주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건국신화에 당하는 삼황(三皇)의 전설이다. 삼황이란 신농씨(神農氏)ㆍ복희씨(伏羲氏)ㆍ수인씨(燧人氏)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화인 존재다. 신농씨는 농경을 발명했고, 씨는 수렵술을 발명했으며, 수인씨는 불을 발명했다. 이 삼황이 문명의 기반을 닦았고, 그 토대 위에서 황제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삼황은 신화적인 존재이므로 더 이상의 조상을 찾을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삼황은 인류 역사의 시작이고, 황제는 중국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 인신우두(人身牛頭)의 신. 삼황 가운데 하나인 신농(神農)의 초상이다. ‘농업의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쟁기를 만들었고 백성들에게 화전농법과 약초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원래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고 전하는데, 그래서인지 머리에 뿔 모양의 형상이 돋아 있다.
황제 이후에도 전설은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황제 다음에 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의 네 임금이 중국을 다스린다. 이 다섯 명의 임금을 통칭해 오제(五帝)라고 부른다. 삼황(三皇)과 오제의 시대중국의 건국 시대이자 신화의 시대가 된다. 역사학자들은 삼황신화로 보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오제에 관해서는 갈린다. 오제를 실존 인물로 보는 이도 있고, 신화적 인물로 이도 있다. 하지만 실존 인물이었다 해도 오제는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지배 집단을 통칭하는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연도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오제의 시대가 끝나는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0년 무렵이다. 그런데 황제는 기원전 28세기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약 800년의 간극이 생기는데, 오제(五帝)의 다섯 임금만으로 메우기에는 시대적 차이가 너무 크다. 오제는 다섯 명의 임금이라기보다 다섯 개의 왕조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제 가운데 마지막 두 임금인 요(堯)와 순(舜)은 오늘날까지도 꽤나 유명세를 치르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日出而作 日入而息 |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네 |
鑿井而飮 耕田而食 |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먹고 사는데, |
帝力何有於我哉 | 제왕의 권력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
당시에 널리 불렸다는 「격양가(擊壤歌)」라는 노래다. 따지고 보면 임금이 필요 없는 세상, 정치가 백성들의 관심이 되지 않는 사회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가장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孔子)가 ‘요순시대(「옹야」28, 「헌문」45)’라는 말을 만들어 쓴 이래 지금까지도 요순시대라고하면 태평성대, 동양식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순시대의 통치 덕목 가운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선양(禪讓)의 제도다. 요임금은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높은 순을 발탁해 여러 가지 시험을 치른 끝에 왕위를 넘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선양이다. 또 순임금도 한동안 나라를 다스린 다음 우(禹)임금에게 왕위를 넘겼다. 우는 특히 치수(治水) 사업에 큰 공을 세워 명망이 높았다【고대 농경 사회에서 홍수를 다스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치수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 다른 문명의 발상지에서도 공통적인 중요 과제였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항상 요순시대의 전통인 선양을 덕목으로 꼽으면서도 막상 선양을 몸소 실천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기야 현대의 공화정에서도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순순히 내주는 경우는 없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요순시대의 선양도 미덕이라기보다는 아직 왕조의 세습이 이루어지기 전인 원시 국가 형태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 치수 작업을 지휘하는 우임금. 돌에 새겨진 부조물인데, 맨 왼쪽에서 백성들을 독려하는 사람이 우임금이다. 그는 자주 범람하는 황하의 치수에 13년간이나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구름 속의 왕조를
치수(治水) 사업의 공적으로 선양을 통해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임금에 이르러 중국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중국의 첫 고대국가는 하(夏)나라다. 하나라는 기원전 약 23세기 말부터 기원전 18세기 중반까지 500년 가까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는 전하지만 그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공자(孔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 등장하지만, 공자 역시 자신의 시대보다 1000년 이상이나 앞선 옛날의 역사를 정확히 기록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공자가 상상만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 그의 시대까지는 전설이나 기록이 전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역사 자료라고 할 만한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황허 중류, 지금의 뤄양(낙양, 洛陽)이 있는 지역에 자리 잡았고, 사(姒)씨 성의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였다고 전한다. 건국자인 우는 선양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고대적 관습을 답습하지 않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왕위의 세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하나라만이 아니라 뒤이은 은나라 때까지도 언제나 왕위가 부자간에 세습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의 왕위 세습은 특별한 경우다. 당시 전 세계 문명 가운데 왕위의 세습이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한 나라는 이집트 정도였다.
하나라는 주변 씨족들과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 한편 여러 가지 정치적ㆍ군사적 연합을 이루면서 발전했다. 비록 아직까지는 하나라의 유물이라고 확정지을 만한 것이 없지만, 기록에 전하는 양성(陽城)ㆍ정저우(鄭州, 정주), 뤄양 등 하나라의 도읍지들을 제대로 발굴한다면 언젠가 그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다만 그러려면 어릴 때 들은 트로이 전설을 역사로 믿고 결국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낸 슐리만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러 씨족과 경쟁하거나 연합하면서 존속하던 하나라는 기원전 18세기 중반에 상(商)이라는 성씨를 가진 강성한 씨족에게 멸망을 당했다. 상족의 왕인 탕(湯)은 새로 은(殷)나라를 세웠는데, 하나라가 기록에 명칭이 전하는 중국 최초의 국가라면 은나라는 유물로 실증되는 최초의 국가다(상족이 세운 탓에 은나라를 상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은허(殷墟)라고 불리는 은나라의 유적지가 발굴된 것은 바로 슐리만 같은 중국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899년에 청의 학자인 왕의영(王懿榮, 1845~1900)과 그의 제자 유철운(劉鐵雲, 1857~1909)은 약재로 쓰려던 동물의 뼈에 묘한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냥 약재상이나 아이의 장난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금석학(건축물이나 비문에 새겨진 옛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한 두 사람은 그 문자들이 현대의 것이 아님을 알아보고 뼈의 출처를 열심히 조사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난 은나라 유적지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 발굴되었고, 고대에 중원 일대에서 널리 세력을 떨쳤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왕의영과 유철운이 발견한 그 고대 문자는 바로 한자의 옛 형태인 갑골문자였다. 은의 유적지에서는 각종 청동기와 도기, 석기, 농구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지만, 그 역사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갑골문자였다. 비록 문헌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어도 갑골문은 중국 최초의 역사 기록물인 것이다.
▲ 중국의 중원. 황제가 중국 문명을 일으킨 이래 하ㆍ은ㆍ주의 삼대 왕조가 발흥한 황허 중류의 중원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쳐 양쯔 강 이남의 강남이 개발되면서 중국은 중원과 강남이라는 두 개의 지역적 중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강남은 경제적 중심에 그친 반면 중원은 한족만이 아니라 북방 민족들에게도 언제나 중화의 중심이었다.
갑골문의 내용은 점괘였다. 점괘를 어떻게 역사 기록물로 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은나라의 성격을 알면 해소된다. 은나라는 점을 쳐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제정일치의 신정(神政) 국가였다【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종교를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종교로 여기면 곤란하다. 당시의 종교는 오늘날처럼 개개인이 신앙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 방식 자체였다】. 그러므로 갑골문은 어느 것보다 은나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훌륭한 기록이다.
갑골의 재료로는 사슴ㆍ양ㆍ돼지ㆍ소 등의 뼈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갑골(甲骨)’이라는 뜻 그대로 거북의 등껍데기도 썼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을 때면 은나라의 지배 집단은 이런 동물 뼈의 한 면에 몇 개의 홈을 판 다음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뼈를 불에 지지거나 구웠다. 그 결과 뼈 뒷면에 갈라진 무늬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판독해 하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무늬 자체가 글씨의 형상을 만들어내지는 않으므로 당연히 무늬를 판독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판독이 곧 점괘가 되었다. 은나라 초기에는 왕이 직접 제사장의 자격으로 점괘를 해석했으나, 점차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고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후기에는 정인(貞人)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무당이 그 일을 대신하고 해석의 결과만 왕에게 보고했다(그렇다면 갑골문은 왕에게 제출하는 국정 보고서인 셈이다). 정인들이 맡았으므로 그 행사를 정문(貞問)이라고 불렀다.
정문은 원시적인 주술처럼 하늘의 뜻을 묻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정치외교적인 행사였다. 그런 탓에 갑골문에는 점괘의 내용과 더불어 은나라 시대의 지명과 관직명, 그리고 전쟁을 비롯한 당시의 수많은 사건에 관한 기록도 있다. 어느 갑골문 기록에 따르면, 은나라는 강씨족(羌氏族)【산둥 반도를 근거지로 삼은 씨족으로, 훗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는 강태공의 성씨다】 포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친 일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은나라의 국세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갑골문은 은나라 시대의 생활상도 보여준다. 은나라는 청동기시대에 속하지만 당시 청동기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청동기는 무기나 각종 제기(祭器), 지배 집단의 사치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을 뿐 백성들의 일상용품에 사용되지는 못했다. 농민의 농기구는 돌칼이나 돌낫 등 여전히 석기였다. 이런 석기로 논밭을 갈고 벼와 보리를 베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구의 한계 때문에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기가 불가능하다면 노동력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은나라의 농경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일하는 집단 경작의 형태를 취했다. 효과적인 치수와 관개, 그리고 인분을 비료로 쓰는 선진적인 농법이 사용되었지만【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는 것은 동양의 관습이자 지혜다. 서양에서는 동물의 배설물을 오래전부터 비료로 사용했지만 인분은 사용하지 않았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그리스도교 이념에 따라 사람의 배설물을 식물의 먹이로 쓴다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분을 비료로 쓰는 것은 농사에도 도움이 되지만 도시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데도 크게 기여한다. 서양의 도시에서는 예부터 인분의 처리가 골칫거리였다. 고대에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 세계를 여러 차례 강타한 흑사병의 유행은 도시가 불결한 데도 원인이 있다】, 아무래도 농기구의 후진성으로 은나라의 농업 생산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이권을 놓고 싸우는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은나라 시대의 전쟁은 주로 씨족들 간의 다툼이었을 뿐 이권 다툼의 성격은 없었다. 이는 뒤이은 주나라 시대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전쟁과 크게 다른 점이다.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에도 은나라의 존재는 기원전 2세기의 역사서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와 있었으나 그전까지는 이 기록을 믿지 않는 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은나라의 유물을 눈앞에서 보는 이상 이제 은나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하나라와 더불어 구름 속의 왕조였던 은나라는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구름을 걷고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 은나라의 제사장은 짐승의 뼈를 불에 구워 갈라지는 금을 보고 점을 쳤다. 이 소뼈에 새겨져 있는 문자들은 그 점괘를 기록한 것이다.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하나라와 은나라는 말기의 현상이 매우 비슷하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은 말희(妹喜)라는 미녀에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탐닉한 폭군이었다. 둘 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었다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인물들이다. 수백 년이나 존속한 두 왕조가 결국 한낱 여인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공교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 왕조가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쿠데타의 주역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전 나라의 마지막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중국 역대 왕조의 특기이기도 하다.
폭군인 걸왕(桀王)을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당연히 걸왕과 정반대로 자애롭고 고매한 인덕을 가진 인물로 기록된다. 또한 은나라의 주왕을 타도하고(그는 궁전에 불을 지르고 그 불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도 마찬가지로 후대에 현군으로 전한다. 하기야, 새 왕조의 건국자 치고 역사에 인품과 지혜를 갖춘 인물로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주족(周族)은 은나라 말기인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은나라의 서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씨족이었다. 그들을 경계한 주왕은 주족의 문왕에게 서백(西伯)이라는 관직을 주고 왕국의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은나라가 이미 지는 해라는 사실을 간파한 문왕은 도읍을 동쪽 풍(豊)으로 옮기고 은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던 차에 문왕이 병사하고 그 대신 아들 무왕(武王)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때마침 주왕은 동쪽 변방의 원정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때문에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 틈을 타서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1111년경에 주나라를 세웠다. 은나라는 하나라보다 더 오랜 700년 가까이 존속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내내 중원을 강력히 지배한 왕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나라 때부터는 왕국의 성격이 한층 뚜렷해지고 체제도 훨씬 견고해진다. 사실상 중국 역사의 첫 왕조나 다름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수천 년 뒤, 나아가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의 영원한 고향 같은 왕조로 남게 된다. 물론 출범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생국 주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은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국토부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어졌다. 그런 광대한 중원에는 여전히 수많은 씨족사회가 분립해 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엄청난 격전을 치렀는데, 이는 은나라의 잔존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은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어도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선진국 은나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서 무왕은 은나라의 옛 지배 집단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나라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도록 했다. 다른 귀족들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영토를 나누어주고 지배권을 부여했다. 물론 철저한 감시가 따르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면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무왕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은나라 잔존 세력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식 봉건제(封建制)의 기원이다【중국식 봉건제는 중세 유럽의 서양식 봉건제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성격에서는 크게 다르다. 서양에서는 상급 군주가 하급 군주에게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넘겨준 데 반해, 중국에서는 오로지 최고 지배자만이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적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천하의 단독 주인, 즉 황제만이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권자였다. 이 차이는 중앙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서양에서는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강력한 중앙 권력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후대에 두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게 된다】.
무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을 맡게 되는데, 그의 통치 시기에 주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형이 다스리던 시대에 비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주공은 아예 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봉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은나라는 존속 기간이 길었어도 수백 개의 씨족국가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성한 나라였을 뿐 특별히 중심지라 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약소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평상시에 그들에게서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의 군사를 동원할 뿐 별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주나라는 공식적으로 중원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주변의 나라들을 휘하에 거느리고자 했다.
흔히 서양 중세 영주들의 작위를 공작ㆍ후작ㆍ백작ㆍ자작ㆍ남작 등으로 구분하는데, 원래 이 5관등의 작위는 주나라 시대에 성립된 것이다. 주나라 왕실은 주변 제후국들에 다양한 작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자치에 맡겨두었지만,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나라 왕실을 방문해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공(朝貢)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공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주요한 외교(때로는 무역) 수단이 된다.
이렇게 보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제법 합리적이고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제도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은나라가 망한 이유는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은나라는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동쪽 변방에 있는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갑골문에 나와 있는 은나라의 국가 행사들은 대부분이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은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은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주나라는 주변 약소국들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했다. 그런데 드넓은 중원 일대를 주나라 혼자만의 힘으로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각 지역마다 일일이 주나라 군대를 파견하거나 주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봉건제였던 것이다.
▲ ‘중국형’ 인물도. 왼쪽부터 주나라 건국의 핵심 인물들인 문왕, 무왕, 주공의 초상이다. 보다시피 앞서 본 황제의 모습과 거의 닮은 얼굴이다. 이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초상도 대개 비슷하다. 중국인의 영원한 고향인 주나라는 인물에서도 중국인의 전형적인 표준인 걸까?
그러나 주나라에서 아무리 애쓴다 해도 이웃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제후국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무왕이 동생들을 제후국에 파견했듯이, 주나라 왕실은 가족 관계와 혼인 관계를 이용해 인근 나라들과 봉건적 연관을 맺었다. 말하자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서양 중세의 봉건제처럼 계약에 의한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본가와 분가의 관계와 같았다. 이렇게 혈연에 기반을 둔 관계를 종법(宗法) 봉건제라고 부른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100개가 훨씬 넘었는데, 그 가운데는 주나라 왕실의 성인 희(姬)씨 제후국이 3분의 1 이상이었다【제후국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정식 국경을 가진 나라를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의 국가들은 서로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니라 도시국가에 가까웠다. 제후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읍을 조성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것을 ‘국(國)’이라고 불렀다】.
또한 각각의 제후국도 나름대로 혈족을 바탕으로 지배 집단을 구성했다. 제후는 휘하에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관등 위계를 두어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으며, 주의 왕실에서 영지를 분봉받았듯이 귀족들에게 다시 토지를 분배했다. 경제적 생산을 담당한 것은 전통적인 농민과 노예 들이었다.
농민들은 농업 생산을 맡았다. 모든 토지는 지배 귀족의 소유였으므로 농민들은 그들에게서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납부했다. 공동체적 경작 방식으로 유명한 정전법(井田法)이 주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토지제도다【토지를 ‘井자’형으로 9등분하고 한가운데 토지는 조세 납부를 위한 공용 토지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밖에도 귀족을 위한 각종 노역을 담당해야 했다. 조세와 부역, 이 두 가지는 점차 제도화되면서 고대국가의 재정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주로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노예들은 농사를 담당하지 않고 건축과 무기 제조, 귀족을 위한 사치품 제작 등을 담당했다【이 점도 서양과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로마 시대부터 중세, 나아가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노예를 거의 농업 생산에만 사용했다】.
봉건제는 중심과 변방의 구분을 전제로 한다. 주나라가 봉건제를 시행함에 따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주나라는 원래 도읍인 호경(鎬京, 지금의 시안 부근)【중국 지명은 원래 중국식 한자 발음으로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시안이나 뤄양 같은 지명은 현대에도 존재하는 데 반해 호경이나 낙읍 같은 옛 지명은 지금 사용되지 않으므로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대체한다. 참고로, 중국 인명의 표기는 20세기 이전의 인물은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20세기 이후는 중국식 한자 발음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정치ㆍ경제ㆍ군사의 새로운 중심지로 뤄양 서쪽에 낙읍(洛邑)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중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봉건 제후국. 지도에 등장하는 제후국들은 오늘날과 같은 영토 국가가 아니라 성곽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다. 그러므로 그 사이의 넓은 ‘여백’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은 어느 특정한 제후국에 속한 ‘국민’이 아니다. 도시국가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가 잘 알려져 있지만 고대에는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인 국가 형태였다.
그러나 주나라는 중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인 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중심이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정치적ㆍ경제적 ‘사건’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체했다고 하지만, 사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은나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농업 생산에서는 은나라를 능가하지 못했고(농기구는 여전히 석기였고, 생산 방식도 은대와 같은 집단 경작이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그런 생산적인 분야에 기여한 게 아니라 정치 이념에서 후대에 길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말했듯이, 주나라는 건국할 때부터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강조했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해 은나라를 멸한 것은 천명이다. 심지어 주나라 문왕이 서백으로 재직할 무렵 장차 주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이 되는 여상망 태공(강태공)을 만난 것도 꿈에서 천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명을 받은 주나라의 왕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다. 천자는 당연히 천하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 바로 여기에 봉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들어 있다. 천자를 받드는 제후들은 북극성 주변을 따라 하늘을 도는 별자리들처럼 한가운데 있는 천자의 나라를 예(禮)로써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법으로 정해진 질서, 즉 종법 질서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자연히 주변이 된다. 그래서 주나라라는 천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제후국들의 관할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모두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곧 중화사상(中華思想)이며,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주양이(尊周攘夷) 혹은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중국적 전통의 시작이다.
이렇게 천자의 개념, 예의 관념, 중화사상 등 중국적 유교 질서의 싹은 모두 주나라의 봉건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는 이후 3000년 동안 중국 역대 왕조의 영원한 이상향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중국인들은 주나라를 포함해 하은주의 세 왕조가 교대한 기원전 2200년경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혼란이 시작되는 기원전 8세기까지를 삼대(三代)라고 부르며 그리워하는데, 여기에 그 이전의 요순시대까지 합치면 중국의 ‘좋았던 옛날’은 무려 2000년에 달하는 셈이다】.
▲ 주나라의 문자 기원전 8세기 서주(西周) 시대 청동 종에 새겨진 문자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그리 달라진 게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지역마다 다르게 쓰던 한자의 서체를 통일하면서 중국의 한자는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기나긴 분열의 시대
주나라의 봉건제는 일찍 도입되었으나 일순간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봉건제는 주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하고 숙성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나라식의 종법 봉건제는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가장 끈끈하지만 생명력이 짧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혈연관계란 세대교체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엷어지게 마련이니까.
주나라가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는 종법 봉건제가 별 문제 없이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역(疆域)이 팽창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혈연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종의 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로 바뀌면서 종법 질서를 발전적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 왕실과 점차 관계가 소원해지는 제후국들이 생겨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와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들 제후국은 국력이 강성해졌다. 개중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해 주나라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제후국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종법 질서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모순이 발동한 것이다.
게다가 주나라를 뒤흔드는 요소는 바깥에도 있었다. 은나라 때도 부단히 다툼을 벌였던 이른바 ‘오랑캐’ 나라들의 힘이 점차 강해진 것이다. 비록 봉건제 덕분에 제후국들이라는 방패막이 생겨 주나라는 은나라 시절처럼 심각한 위협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변방 너머까지 무력으로 확실히 복속시키지는 못한 터였다.
주나라의 중기를 넘어서면서 중원 바깥 지역의 이민족 나라들은 끊임없이 중원을 넘보며 침략해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는 주나라의 지배권 안에 자리 잡은 나라들도 꽤 있었으나, 대개는 중원의 북쪽과 남쪽에 세력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문헌에는 이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夷)ㆍ융(戎)ㆍ만(蠻)ㆍ적(狄) 등이 등장하는데, 다 오랑캐라는 의미다. 훗날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 그 오랑캐들을 방위에 따라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으로 부르게 된다.
이처럼 내부적 요소(봉건제의 동요)와 외부적 요소(이민족의 침입)가 결합되어 주나라 왕실은 이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마침내 그 동요를 붕괴로 만든 계기가 생겨났다. 역사는 가혹하게 되풀이 되었다. 하나라를 망친 걸왕과 말희, 은나라를 망친 주왕과 달기의 콤비가 주나라에도 등장한 것이다. 바로 유왕(幽王)과 포사(褎姒)가 그들이다. 유왕은 선배들보다 한술 더 떠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임명하려 했다. 왕실이 문란해졌으니 오랑캐고 뭐고 가릴 게 없었다. 유왕의 조치에 반발하는 세력은 북쪽의 이민족 국가인 견융(犬戎)을 끌어들여 주 왕실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유왕이 전사하고 수도인 호경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아직 북방 민족은 중원을 통치하려 하지는 않았다. 승리한 견융이 물러가자 제후국들은 새로 평왕(平王)을 옹립했다. 견융이 또다시 침입해올까 두려워한 평왕은 수도를 동쪽의 낙읍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기원전 770년 주의 동천(東遷)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역사학자들은 동천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원래 주나라를 서주(西周), 그 이후를 동주(東周)로 구분한다.
주의 동천(東遷)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침입이 주의 동천을 불러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렸다면, 그동안 강성해진 제후국들은 이렇게 마련된 무대에서 주나라를 조연으로 물러앉히고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를 가리키는데,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된다. 춘추시대는 주의 동천에서부터 당시 가장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晋)이 분열되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키며, 전국시대는 이때부터 중원 서쪽의 강국인 진이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가리킨다. 춘추와 전국이라는 말은 모두 문헌에서 따온 명칭이다. 춘추는 공자(孔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나왔고, 전국은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전국책(戰國策)』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춘추전국시대라는 명칭은 당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이다.
동천 이후로 주나라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중국 대륙은 열강이 지역에 할거해 다툼을 벌이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나라의 역할이다. 춘추시대에 활동한 열강들은 굳이 동주를 멸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이빨과 발톱까지 빠져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인데도 강국들은 동주를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전보다 더 보호하고 섬겼다. 주나라에 바치던 조공도 계속 유지하고 제후들이 정기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행사도 여전히 계속했다. 주나라 왕실은 사나운 제후국들 틈바구니에서 매년 천제(天祭)도 계속 지냈고, 제후국에서 새로운 제후가 왕위에 오르면 형식적으로나마 이를 승인하는 권위도 유지했다.
물론 제후국들이 실제로 옛날처럼 주나라를 성심성의껏 받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밖에 남지 않았어도 제후국들에 주나라는 여전히 천하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오히려 주나라 왕실을 보호하는 것은 주나라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적통 제후국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 덕분에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동주 시대부터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50년까지도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다(그래서 주나라는 서주와 동주를 합쳐 850여 년이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수명이 왕조가 되었다).
▲ 한자의 변천. 갑골문에서 오늘날 한자까지 변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칸이 주나라 시대의 문자에 해당하며, 네 번째 칸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한 직후 사용된 전서체(篆書體)다.
하지만 주나라라는 중심은 상징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해졌다. 그래서 제후국들은 명칭만 제후국일 뿐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해 형식적인 예의만 갖추면서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춘추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교대로 패권을 잡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잠시 정(鄭)나라가 세력을 떨치지만 본격적인 패자의 시대는 제(齊)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이른바 춘추 5패로 불리는 제(齊)ㆍ진(晋)ㆍ초(楚)ㆍ오(吳)ㆍ월(越)이 번갈아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춘추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제와 진의 지배기는 아직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상당히 살아 있던 무렵이었다. 제의 환공(桓公, 기원전 ?~기원전 643)은 제후들의 맏형처럼 처신하면서 동주를 부모의 나라처럼 받들었으며, 이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약소 제후국들을 지원하는 등 중원을 이끌었다. 제의 뒤를 이은 진(晋)의 문공(文公, 기원전 697~기원전 628) 역시 환공과 마찬가지로 중원의 관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존왕양이의 정책을 계승했다. 제와 진은 사실 그럴 만한 처지였다. 제는 일찍이 주의 개국공신인 강태공(姜太公)에게 분봉된 전통에 빛나는 제후국이었고, 진은 원래 주의 성왕(成王)이 자기 당숙에게 분봉한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는 주나라 건국 공신의 후예였고, 진은 주나라와 돈독한 혈연관계에 있는 제후국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후반기를 장식하는 초ㆍ오ㆍ월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세 나라는 황하는 물론 화이허보다도 더 남쪽인 양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남방 국가들이다. 하ㆍ은ㆍ주의 삼대는 전부 북중국의 중원을 기반으로 삼은 왕조였다. 그러므로 전통 제후국의 입장에서 보면 초ㆍ오ㆍ월은 원래 ‘양이(攘夷)’의 대상인 오랑캐들이었다.
초나라는 이미 제 환공 시대부터 남중국의 넓고 비옥한 영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중원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제 환공은 초나라의 위협을 받는 중원의 약소국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이를 무력으로 막아내고 중원을 지킨 바 있었다. 진 문공 역시 재차 북상을 추진한 초의 공격을 막는 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와 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제 초나라의 발목을 잡는 것은 사라졌다. 진 문공이 죽고 진의 대외 정책이 소극적으로 전환되는 틈을 타초의 장왕(莊王)은 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채(蔡)ㆍ정(鄭)ㆍ진(陳)ㆍ송(宋)ㆍ노(魯)ㆍ조(曹) 등의 약소국들을 복속시켜 마침내 중원의 서열 1위로 우뚝 섰다. 남중국 왕조가 중원을 정복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거칠 것이 없던 초의 발목을 잡은 것은 전통의 북중국 제후국이 아니라 같은 남중국의 오와 월이었다. 중원의 진과 남방의 초가 대립하고 있던 기원전 6세기 무렵 오와 월은 양쯔 강 이남에서 세력을 키운 뒤 북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와 월은 서로 패권을 주고받으면서 춘추시대의 마지막 50년간을 장식한다. 당시 오의 합려(闔閭) 대 월의 구천(句踐), 오의 부차(夫差) 대 월의 구천으로 이어지는 오와 월의 다툼은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로 후대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심하게 다투던 오와 월은 이후 초의 손에 멸망당했다.
▲ 와신상담의 무기. 왼쪽은 오나라 왕 부차의 동검이고, 오른쪽은 월나라 왕 구천의 동검이다. 춘추시대 장수들이 사용하던 전형적인 무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은 청동제 무기지만 전국시대에 들면 철제 무기로 바뀌고 싸움도 더 치열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춘추시대 후반기를 통해 초ㆍ오ㆍ월 같은 남중국 왕조들이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중국 문명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에서 탄생했으며, 주나라(서주) 시대까지도 북중국이 문명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양쯔강 이남의 남중국 지역까지 자연스럽게 중원 문화권에 포함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원을 포함하는 화북과 강남으로 확정된 중국의 강역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넓어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시대의 경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7세기 만주족의 정복 왕조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주가 중국의 강역에 포함되기까지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사는 춘추시대에 정해진 경계를 무대로 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춘추시대 이후에는 ‘오랑캐’라는 말도 남중국과는 무관해지고 고비 사막 너머 몽골 지역과 서북부 변방의 북방 민족들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한반도를 가리키는 ‘동이(東夷)’라는 이름도 한반도의 역사가 중화 질서에 편입되는 7세기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부터는 사라지게 된다】.
▲ 춘추 5패와 전국 7웅 양쯔강 이남에 자리 잡은 초ㆍ오ㆍ월 3국은 춘추시대를 거쳐 중원 문화권에 포함되었다. 만약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춘추시대 이전 서주(西周) 시대에 완성되었다면, 중원의 나라들은 강남의 나라들을 오랑캐로 분류하고 적대시했을지도 모른다. 강남이 중원 문화권에 포함됨으로써 이제부터 ‘오랑캐’는 북방 이민족들만 남게 되었다.
최초의 통일을 향해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 계기는 남방의 초(楚)와 대립하던 전통의 강국인 진(晉)이 와해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법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희박해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진은 일찍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대폭 제거했으므로 주 왕실과는 다른 성의 귀족들이 세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분을 빚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진(晋)은 한(韓)ㆍ위(魏)ㆍ조(趙), 세 성씨의 세력가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로써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던 진은 사라지고 한ㆍ위ㆍ조의 3국이 생겨났다.
춘추시대에 춘추 5패가 있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들은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7웅이란 진이 붕괴하면서 생긴 한ㆍ위ㆍ조를 비롯해 연(燕)ㆍ제(齊)ㆍ진(秦)ㆍ초(楚)의 일곱 나라를 가리킨다【송(宋)이나 노(魯) 같은 약소국들도 존재했으나 이들은 대세를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춘추 5패는 서로 맞교대 형식으로 패권을 장악했던 반면, 전국 7웅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각국이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을 버리지 않았지만,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은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이 더욱 강했다.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춘추 5패 | 전국 7웅 |
서로 맞교대 형식으로 패권을 장악 | 서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음 |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 | 제후국들은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 |
각국의 세력 판도도 전국시대에 들어 크게 달라졌다. 전국 7웅의 무대는 춘추시대보다 한결 넓어져 중국 대륙 전역을 아울렀다. 또 하나 춘추시대의 판도와 달라진 점은 신흥국 진(秦)이 서쪽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이제 중원은 초의 북상과 더불어 진의 동진으로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한편 전국시대에도 여전히 강대국으로 남은 초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호적수인 진(晋)이 약화된 대신 이번에는 변방에서 중원으로 접근하는 진(秦)의 진출을 막아야 하는 대표 주자의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진과 초, 양강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국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일곱 개의 나라가 맞서는 형국인 만큼 전국시대에 천하의 정세는 춘추시대와 사뭇 달랐다. 전국(戰國)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시대의 중국에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전쟁이 잇달았으며 정교하고 화려한 외교술이 등장했다.
우선 전국시대의 전쟁은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면전이 많았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주로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졌지만,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직접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에 임했다. 말하자면 춘추시대에는 지배 엘리트들의 전쟁이었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본격적인 군대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술도 춘추시대에는 차전(車戰)이 위주였지만 전국시대에는 보병과 기마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목표도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적국을 복속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전쟁의 목표였다.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바뀌어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도 다양하게 개발되었고【이 시기에 손빈이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오늘날까지 유명세를 떨친다】, 경(卿)이나 대부(大夫) 등 귀족들이 전쟁을 수행했던 춘추시대와 달리 오로지 전쟁만을 치르기 위한 순수한 무장(武將) 집단도 출현했다.
춘추시대 | 전국시대 | |
주도국 | 춘추 5패 | 전국 7웅 |
패권장악 | 서로 맞교대 형식으로 패권을 장악 | 서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음 |
각국위상 |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 | 제후국들은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 |
전쟁주역 |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짐 |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함 |
경(卿)이나 대부(大夫) 등 귀족들이 전쟁 수행 | 백성 및 전쟁만을 위한 무장집단 출현 | |
전쟁양상 | 지배 엘리트들의 전쟁 | 본격적인 군대의 전쟁 |
차전(車戰)이 위주 | 보병과 기마병 위주 | |
전쟁목표 | 적국을 복속시키는 게 목표 |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목표 |
전쟁무기 | 청동제 무기 | 철제 무기 |
그러나 전쟁 양식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다양한 외교술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전통의 제후국들은 세력이 약화되었고, 춘추시대를 거치며 이들의 대열에 초가 합류한 가운데 신흥국 진(秦)이 동진(東進)을 꾀하고 있었다. 이런 극도로 미묘한 국제 정세는 술책에 가까운 교묘한 외교술과 권모술수, 수많은 책략가를 낳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소진(蘇秦)이 제기한 합종책(合從策)과 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이다. 합종책은 7웅 가운데 6국이 연합해 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었는데, 초의 회왕(懷王)이 제안하고 주동했다. 연횡책은 그 합종책에 맞서기 위해 진이 채택한 책략으로, 6국이 진과 평화로이 공존하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비롯된 합종과 연횡이라는 말은 오늘날 복잡한 정치 상황을 묘사할 때도 흔히 사용된다. 그 밖에도 온갖 술책이 난무했으나 결국 국력에서뿐 아니라 술수에도 능한 진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통일하게 된다.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변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과정은 사뭇 극적이다. 춘추시대에 남중국의 초나라조차 오랑캐로 여긴 중원의 나라들은 당연히 진을 오랑캐로 간주했다. 그러나 진의 효공(孝公)은 위나라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책략가 상앙(商鞅)을 받아들여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과 쇄신을 단행했다(당시의 책략가들은 여러 제후국을 떠돌면서 자신의 지략을 팔고 다녔다. 공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상앙의 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가족 제도에서 군사, 조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도를 개선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조치였다.
이런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진은 일약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급속히 중원 진출을 꾀했다. 합종책과 연횡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진은 멀리 있는 나라와는 친선을 도모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들부터 하나씩 정복하는 전술을 전개했다. 이것이 이른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술인데, 쉽게 말하면 각개격파다. 이에 따라 진은 먼저 인근의 한ㆍ위ㆍ조를 고립시켜 차례로 멸망시켰다. 이제는 호적수인 초나라와 마음 놓고 전면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윽고 초마저 정복한 이후에는 진에 맞설 상대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동북쪽의 연과 제를 정복하는 것으로, 진은 마침내 전란으로 얼룩진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했다.
▲ 잔인해지는 전쟁 왼쪽은 전국시대의 전투 장면이고 오른쪽은 춘추시대의 전쟁에서 사용하던 전차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춘추시대에는 전차를 이용한 차전(車戰)이 많았고 장수들 간의 싸움이 중요했지만, 전국시대에는 기마병 전술이 많이 구사되면서 전쟁이 더욱 잔인해졌다.
동양 사상의 뿌리
분열기라고 해서 내내 전쟁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수많은 전쟁이 전개되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졌다.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농업혁명이다. 서주(西周) 시대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던 농업 생산력은 춘추전국시대에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소를 경작에 이용하고 철제 농구를 사용하게 된 덕분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집단 농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가족 단위로 단독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서주 말기부터 씨족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단독 농경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전쟁과 관련된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사실 당장의 필요 때문에 살상용 무기를 개선하려는 각국의 노력이 없었다면 중국의 철기시대는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금술(冶金術)이 발달한 것도 전쟁 덕분이다. 청동제 무기를 사용한 춘추시대에도 철이 청동보다 단단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야금술이 개발되지 않아 철을 가지고 도구를 제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강력한 무기의 필요성은 결국 철을 제련하고 가공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또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각국이 방어를 위해 앞다투어 성을 쌓는 과정에서 토목 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도시가 팽창하면 상업이 발달하는 것은 필연이다. 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각국은 서로 다투면서도 활발히 무역을 전개했으며, 도시들을 잇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상업적 유통망도 생겨났다. 이미 춘추시대 초기 제 환공(齊桓公)이 지배할 무렵에 환공의 참모인 관중(管仲)은 중상정책을 부국강병책으로 실시한 일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발전이 없었다면 진(秦)의 대륙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 전체에 걸쳐 활동한 수많은 술사와 책략가는 정치사상을 크게 성숙시켰다(당시의 책략가를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곧 사상가, 철학자다). 이 시기에 생겨나고 성장한 각종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이나 동양 사상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학문적으로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이후 수천 년간의 동양 철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토대가 확립된 사상을 해석, 재해석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흥미로운 점은 서양의 정신세계도 바로 이 무렵에 골격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그리스 고전 철학 역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해당하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에 걸쳐 완성을 보았다. 탈레스(기원전 625년경~기원전 545년경), 피타고라스(기원전 580년경~기원전 500년경),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 기원전 399), 플라톤(기원전 428년경~기원전 347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활동 기간은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경~기원전 289년경), 장자(莊子, 기원전 369~기원전 289년경) 등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철학이 신학에서 독립하지 못한 중세를 제외한다면 근대 이후의 서양 철학에서도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해석과 재해석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당시 그리스와 중국에는 도시국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학식과 경륜을 팔러 각국을 떠다닌 학자들이 많았는데, 중국에서 공자(孔子)가 그 대표 주자라면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까지 가서 어린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스승 노릇을 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19세기에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동양 철학 역시 크게 보면 공자와 노자가 확립한 철학에 대한 주석이 아닐까?】.
유가 사상(儒家 思想)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는 노나라 태생이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유서 깊은 제후국에서 성장한 만큼 공자는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가 사상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 복고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쓴 사람도 공자다. 그러나 그가 주로 염두에 둔 ‘과거’는 그의 시대보다도 1000년이나 더 전인 머나먼 요순시대가 아니라 그 바로 전대인 주나라, 즉 서주(西周) 시대였다.
하지만 공자가 오로지 과거에 대한 동경만 품고 있었다면 학문의 일가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테고 후대에 위대한 사상가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주(西周) 시대의 전통적 가치는 주나라의 건국이념이라 할 예(禮)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이 예의 사상이 종법 봉건제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공자는 이 예에다 인(仁)의 사상을 덧붙인다. 이리하여 예와 인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의 기본 골격이 생겨났다.
굳이 인의 개념을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孔子)가 최고의 가치로 꼽는 사회체제는 서주(西周) 시대의 봉건제다. 다만 그것은 좋았던 옛날이 되었고 이제는 시절이 변했다. 봉건제의 굳건한 현실적ㆍ정신적 토대이자 예의 중심이었던 천자(주나라 왕)는 서주(西周)가 끝나면서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는 인의 이념에서 파생된 도덕 정치를 봉건제의 새로운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유명무실해진 종법 봉건제를 ‘도덕적 봉건제’로 대체하자는 견해다. 종법 봉건제 시대에 통용된 혈연적 위계를 바탕으로 한 예의 이념이 무너졌으니, 이제는 도덕적 위계를 바탕으로 삼아 예의 이념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덕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신분 간의 서열, 나아가 나라 간의 위계도 정하자는 주장인데, 말 그대로 이렇게 된다면 군자가 곧 군주가 될 테니 진정한 덕치(德治)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다분히 공상적인 그런 정치사상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공자(孔子)는 자신의 뜻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10여 년간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각국의 지배자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훌륭한 제자들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고전을 정리하고 자신의 사상을 저술하는 문헌 작업에 여생을 바치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수천 년 후까지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공자의 뜻을 받아준 나라가 있었다면 그는 정치가에 그쳤을 테고 사상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는 짧고 사상가는 길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로 맹자(孟子)와 순자(荀子, 기원전 298년경~기원전 238년경)가 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사단(四端)으로 확장하는 한편, 공자가 제시한 인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중점적으로 모색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性善)의 논리를 이용해 인을 토대로 한 어진 정치[仁政]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것이 곧 왕도(王道)의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에게서 인의 이념을 강조했다면, 순자는 예의 이념을 계승했다. 그는 악과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성악(性惡)의 논리에서, 도덕적 품성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교육을 중시했으며, 군주의 임무는 예를 가르치는 교사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흔히 유학은 현실과 유리된 관념 철학으로 여기지만, 그 기원에서나 이후의 발달 과정에서 보듯 현실 정치에 대한 큰 관심으로부터 시작했고, 늘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기능하려는 강렬한 지향성을 담고 있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유학의 권력 지향성은 수백 년 뒤 한대에 구현되었고(기원전 2세기에 한 무제는 유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역대 중화 제국의 기본 이념이 되었으며, 15세기 이후에는 한반도 조선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 공자와 노자(老子)가 만났을 때. 청년 공자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받아줄 만한 나라를 찾아 10년간 여행하다가 노년에 접어들어 은둔 중인 노자와 만났다. 이 만남에서 현실 참여적인 공자와 현실 도피적인 노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했다. 그러나 좋은 대조를 이룬 덕분에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2000여 년 동안 동양 사상의 양대 뿌리를 이루고 있다.
묵가 사상(墨家 思想)
묵가는 전국시대 초기에 묵적(墨翟, 기원전 480년경~기원전 390년경)이 주창했다(묵적은 현인들을 ‘子’로 존칭하는 관습에 따라 墨子라고도 부른다). 묵가 사상가들은 주로 무기나 공구의 제작에 종사한 수공업자 집단이었다. 그래서 유가 사상이 예에 기초한 엄격한 신분 질서를 주장한 데 비해 묵가는 훨씬 평민적인 사상을 전개했으며, 이 점에서 유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묵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묵적은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차별애(差別愛)’를 버리고 화해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시대에 만연한 수많은 전쟁은 모두 자기만의 이익[自利]을 취하기 위한 차별애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겸애는 상호적인 이익[交相利]을 도모한다. 따라서 겸애를 실천하면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를 이룩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계급이 소멸된 평등한 이상 세계를 이룰 수 있다.
난세에 그런 사상이라면 현실성이 별로 없다. 이상주의가 흔히 그렇듯이 묵가 사상도 실현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묵가 사상은 전국시대 중기 간헐적으로 있었던 평화기에 한때 성행했으나 대륙 전체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말기에 이르면 급속도로 발언권을 잃고 만다.
하지만 이후 수천 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신분 질서가 고착되는 것을 고려해볼 때, 당시에 이미 신분의 해체와 만민 평등을 주장한 묵가 사상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게다가 묵가 사상가들은 유가에서 의도적으로 회피한 ‘이(利)’의 개념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혁신성을 보였다(이렇게 이익의 관점을 끌어들이면 혈연에 기초한 봉건적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은 봉건 질서의 군주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며 백성들에게 헌신하는 군주상을 제시했으며, 군주의 세습마저 부인하고 선양의 옛 관습을 칭송했다.
묵가 사상의 바탕은 이상주의에 있지만 여러모로 근대 공화정의 색채가 짙다. 묵가 사상이 제대로 발달했더라면 동양식 민주주의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묵가 사상은 동양적 풍토에서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을까?
법가 사상(法家 思想)
법가 사상은 제자백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전국시대 중기에 현실 정치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의 개념은 춘추시대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춘추시대 정나라에서 제정한 법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진(晋)에서는 형법 서적을 편찬했다고 전한다.
법가는 원래 술(術)을 중시하는 파, 세(勢)를 중시하는 파, 법(法)을 중시하는 파로 나뉘었는데, 이 세 유파를 전국시대 말기에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년경~기원전 233)가 종합해 완성했다. 법가의 기본적인 정신은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본래 도덕을 내재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의 다스림을 필요로 한다.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는 질서는 유가의 도덕이라든가 묵가의 사랑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권력과 지위에 따른 힘 관계의 반영일 뿐이다. 세치(勢治)는 군주의 권위, 술치(術治)는 군주가 신하를 대하는 것을 나타내고, 법치(法治)는 군주가 일반 백성을 다루는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군주는 지위상으로 당연히 권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하와 백성을 지배하는 술과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하와 백성은 오로지 군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든가).
이렇게 일체의 이상이나 관념을 배제하고 철저히 현실적인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법가는 다른 사상과 달리 현실 정치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륙을 통일한 진의 부국강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상앙(商鞅)이 바로 그 좋은 예다. “군주는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라고 말한 르네상스 말기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군주론의 한참 선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유럽 세계가 절대왕정을 확립하고 장차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했지만, 법가 사상은 역사상 유례없이 혹독한 군주 독재 정치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군주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법가는 철저한 우민정책과 사상 통일을 강조했다. 법 이외의 모든 지식은 쓸모가 없고 사람들이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생매장한 진시황의 만행에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 실천가 한비자(韓非子). 중국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한비자의 초상이다. 역동적이고 실천적이면서도 냉혹할 만큼 현실의 논리를 강조한 법가 사상이 그대로 인격화되어 있는 듯한 표정이다.
도가 사상(道家 思想)
도가 사상을 창시한 노자(老子)는 공자(孔子)보다 한 세대쯤 위의 인물이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공자와 만났다는 기록도 전하기는 하지만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짧은 책 한 권 이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가 사상이 발달한 것은 노자의 시대보다 수백 년 뒤인 전국시대 중기 장자(莊子)에 의해서였다.
도가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냄새가 강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유(有)다. 유는 경험 세계에 존재하며, 누구나 그 존재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를 만드는 것은 무(無)다. 유는 무에서 생성되어 운동하다가 다시 그 근원인 무로 되돌아간다. 이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과정을 관장하는 것이 곧 도(道)다.
그렇다고 해서 도가 그 과정을 사람이 도구를 다루듯이 의식적으로 집행하고 관리하는 것은 아니다.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근본적인 법칙이다. 따라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도가 스스로 자기운동한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도의 작동 원리라 할 수 있는 무위(無爲,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며 자연(自然)이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내용을 현실적인 정치사상으로 전화시키면 더 알기 쉽다. 우주 만물, 즉 국가나 사회, 인간 등은 모두 도의 생성 원리에 따라 생성하고 운동하고 소멸하므로 군주는 특정한 목적을 앞세워 신하나 백성을 닦달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다. 이 원리에 따른 구체적인 국가 형태로서 노자(老子)는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작고 인구가 적은 나라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국가로 제시했다【이런 국가상은 엉뚱하게도 19세기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수립한 실험적 공동체에서 재현된다】.
노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상을 인위적인 게 지나치게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욕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인위의 소산인 문명과 문물, 제도, 법 등은 모조리 거부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유가에서 말하는 인이나 예의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도가 사상을 도시국가에서 영토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 각축(角逐)하는 각 나라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할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도가는 현실 정치에서 실험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일반 사회에서 인기를 끌어 공자(孔子)가 창시한 유가와 함께 오늘날까지 동양 사상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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