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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비류왕, 근초고왕, 고국원왕, 아직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비류왕, 근초고왕, 고국원왕, 아직기)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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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신라가 뒤늦게나마 김씨로 대권후보를 통일하고 단일한 왕계를 꾸리기 시작할 무렵 백제는 이미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신라와의 키재기는 여전했지만 반도 북부의 상황 변화로 인해 이제 백제에게는 동쪽보다 북쪽의 일이 더 궁금해지고 시급해진 것이다.

 

그 상황 변화란 말할 것도 없이 낙랑이 멸망한 사건을 가리킨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낙랑과 대방을 한반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 그러니까 지금의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국 국적의 두 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낙랑과 대방은 한나라가 무너지고 중국이 분열시대로 접어든 이후부터는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존속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지역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이건 백제에게 뭘 의미할까?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낙랑과 대방은 두 나라의 완충지다. 이런 공동경비구역이 사라졌다는 것은 곧 이제부터는 두 나라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는 뜻이다. 백제로서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동쪽의 신라와 벌였던 자잘한 영토 다툼은 앞으로 다가올 고구려와의 충돌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백제는 위기를 맞은 걸까, 아니면 기회를 맞은 걸까?

 

위기의 상황은 대개 기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사실 상황 자체로만 보면 구별할 수도 없고 구별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주체적 역량이다. 주체의 힘이 약하면 위기가 되고 힘이 강하면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당시 백제의 힘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관제를 확립함으로써 백제를 명실상부한 독립 왕국으로 발전시킨 고이왕(古爾王) 시대를 계기로 백제는 한창 물이 오르는 중이었다. 비록 책계와 분서 두 왕이 북방과의 관계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두 왕의 치세는 합쳐서 20년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한창 뻗어나는 백제에게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두 걸음 전진을 위한 한 걸음 후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두 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백제 전체를 위해선 행운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백제 왕실은 자칫 큰 화로 번질 뻔했던 한 가지 문제, 권력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했던 2세기의 미스터리가 관계된다.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던 3세기 중반 백제의 왕권은 두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 두 갈래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2세기의 왕인 개루왕에게서 이어진다. 그에게는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각 계파의 원조가 된다. 일단 맏아들(초고왕)이 왕위를 잇기는 했으나 둘째 아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기록에는 그 둘째 아들이 고이왕이라고 되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이로 따지면 불가능하므로 고이왕은 아마 둘째 아들의 후손일 것이다).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과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의 시대 70년이 지나도록 그 세력은 계속 왕권을 노렸다. 이윽고 234년에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자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옹립한다. 사반왕이 퇴출된 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그랬다면 왜 얼마 가지도 못할 왕위를 굳이 계승시켰을까? 따라서 사반왕이 쫓겨나고 고이왕이 즉위한 사건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을 조상으로 하는 계파가 백제 왕실의 권력을 찬탈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서 본 것처럼 고이왕이 새삼스럽게 백제의 관직을 정비하고 하늘과 땅에 대규모 제사를 지낸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은 마치 자신들이 나라를 새로 건국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호들갑을 떨지 않던가? 그러나 아들 책계와 손자 분서가 비명에 죽음으로써 고이왕(古爾王)의 지극정성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가 마련해 놓은 국가 발전의 기틀은 다음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은 원래의 첫째 계파인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의 동생)인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이었다여기에도 또 한 번의 왕계 미스터리가 있다. 비류왕이 즉위한 해는 304년인데, 구수왕이 죽고 사반왕이 폐위되고 고이왕이 즉위한 해는 그보다 무려 70년이나 앞선 234년이다. 따라서 비류왕은 구수왕의 아들과 사반왕의 동생이 될 수 없고, 아마 구수왕의 손자이거나 증손자였을 것이다. 이렇듯 4세기까지도 왕계가 불확실할 만큼 백제의 초기 역사에는 불완전한 측면이 많다. 이 점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백제 역사가 홀대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가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신라는 백제를 늘 원수로 여겼으며, 오로지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중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또한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金富軾)이 신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삼국사기에는 백제 부분이 가장 적을 뿐 아니라 내용도 가장 빈약하다).

 

 

모처럼만에 왕통을 바로잡은 탓에 비류왕(比流王)은 외정(外征)보다 내치에 주력하면서 왕권을 다지기에 힘쓴다. 아마도 그가 재임한 40년 동안 백제의 백성들은 역대 어느 시절보다도 태평한 세월을 누렸으리라(그 기간 한 차례 반란 사건 이외에는 전쟁을 벌인 기록도 없다).

 

그러나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은 백제는 마냥 그런 태평성대를 향유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백제의 지배층도 그런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의 시기에 ()’을 준비하지 않으면 장차 다가올 것은 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 화()가 될 것이다. 그 준비의 첫째는 후방 다지기이고, 그 후방 다지기의 첫째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다. 그래서 322년에 비류왕은 신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곧이어 신라도 사신을 보내오면서 두 나라는 사실상 정식 수교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과거에도 두 나라 사이에 유화적 분위기가 감돈 적은 간혹 있었지만 모두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에 비해 이번은 상당 기간 지속적인 관계가 될 전망이다.

 

건국 이후 줄창 크고작은 싸움으로만 일관해 온 두 나라가 갑자기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긴 이유는 공동의 적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적이란 바로 북쪽의 고구려다.

 

낙랑이라는 완충지가 사라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남부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서쪽의 대륙 정세에만 골몰해 있었던 고구려, 그러나 생존의 단계를 넘어 팽창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고구려의 눈에 처음으로 한반도 중남부, 그리고 그곳에 자리잡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북방의 사태 변화는 자기 지역의 문제에만 집착해 왔던 백제와 신라에게 처음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기에 족했다. 두 나라는 이제 우물 밖의 세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두 나라의 접근은 필연적이다.

 

비류왕(比流王)의 후방 다지기에서 둘째 과제는 아직도 전라도 일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한의 숨통을 완전히 끊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늙은 비류왕의 몫이 아니라 그의 아들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몫이 된다비류왕은 고이왕 계열의 세력과 원한을 덧쌓지 않고 타협을 이룬 듯하다. 왜냐하면 344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 대신 분서왕의 아들인 계왕(契王, 재위 344~346)이 잠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나이가 어려 비류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바 있었으니 두 정치 세력은 아마 그때 평화 협상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왕이 3년 만에 죽고 비류의 아들 근초고가 왕위를 잇는 것으로 두 계파의 문제는 사라졌고 이후 백제의 왕통은 다시 왕계의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로 2세기 이후 사실상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마한은 한반도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그러나 근초고왕을 백제의 역대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로 만들어 준 사건은 마한 정복이 아니다. 아버지 비류왕(比流王) 때부터 그랬듯이 이제 백제에게 중요한 방향은 남쪽이나 동쪽이 아니라 북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한 정복은 본 과제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과제에 불과하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향해 남침해 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사건이고 튼튼히 대비를 해두었으니 백제로서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지금의 황해도 백천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맞아 근초고왕은 우선 태자를 보내 공격하게 한다. 그로서는 고구려의 힘을 한 번 테스트해본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예상 외로 백제의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고구려 군 5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고구려의 남침 야욕을 꺾었다.

 

고구려와의 사상 첫 접전에서 완승을 거둔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자신감을 얻은 반면 승리를 낙관했던 고국원왕은 당황했다. 굳어진 확신과 싹트는 회의, 결국 이 차이가 최종 승부를 갈랐다. 2년 뒤 고국원왕은 다시 남진에 나섰으나 일취월장하는 백제의 힘은 2년 전과도 또 달랐다. 예성강에서 매복 작전으로 서전을 승리한 근초고왕은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직접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본토 공격에 나섰다. 선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퇴만 거듭하게 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수도 평양까지 추격해 온 백제군에게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운의 최후를 맞는다(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 남쪽이었으니 백제군이 어디까지 북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고국원왕이 고국에 바친 마지막 기여는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고국원왕이 죽자 백제군은 그 성과에 만족하고 철수를 한다. 그때 백제가 끝까지 고구려의 목을 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답을 추측하기 어려운 가정이지만 근초고왕이 조금만 더 욕심을 냈더라면 왕을 잃은 고구려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동천왕(東川王)도 위나라에게 몰려 수백 리 산길을 달아났지만, 그래도 목숨을 부지한 탓에 재건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그 정도로도 대만족이었다. 오히려 그는 몇 차례나 완승을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로 귀환한 직후 그가 맨먼저 한 일은 고구려의 보복에 대비해서 평지에 있던 도성을 버리고 인근의 남한산에 산성을 쌓아 천도한 것이었다. 남한산성은 7세기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쌓고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마 문무왕 시대에도 근초고왕이 쌓은 백제의 옛 도성을 토대로 했을 것이다.

 

 

하사냐, 조공이냐 근초고왕 때 백제는 처음으로 일본과 정식 상견례를 나누었다. 그 기념일까? 근초고왕은 사진에 나온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을 일본 왕에게 주었다고 한다. 날이 일곱 개라서 역사가들은 칠지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칼의 몸체에 백제가 일본에게 준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역사가들은 백제가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 역사가들은 백제왕이 하사한 것이라고 맞섰다. 당시에는 그냥 두 나라의 수교를 축하하는 기념품이었을 텐데, 쓸데없이 지금 와서 열을 올리는 격이다.

 

 

어쨌든 승리의 대가는 무척 컸다. 당대의 평가로 보면 고구려의 남진을 분쇄하고 북쪽의 영토를 개척한 게 가장 큰 성공이었겠지만, 역사적으로 그보다 훨씬 중요한 성과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전까지 백제는 반도 남쪽과 동쪽의 소국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수준이었으므로 문명적으로 보면 오히려 어두운 오지를 항해 팽창하려 했던 셈이다. 그러나 북쪽의 강호 고구려를 압도적으로 물리치자 당연히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맨먼저 그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넓은 중국 대륙이다.

 

372년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맺는다. 중국으로 가는 육로는 고구려에 막혀 있을 뿐 아니라 백제로서는 자형으로 빙 돌아가는 격이니 수교길은 당연히 뱃길이다. 그런데 뱃길이라고 하면 중국으로 가는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서쪽으로 황해를 가로지르면 동진에 닿지만, 마침 마한 정복으로 남해 뱃길이 트여 있으므로 동쪽으로 가면 일본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근초고왕은 일본과도 첫 수교의 테이프를 끊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일본에 간 첫 백제인이 아직기(阿直岐)라는 사람이다왕조 시대가 빨랐던 한반도와 달리 당시 일본은 몇 개의 나라로 된 세계가 아니었다. 일본에 고대국가가 생긴 시기는 7세기지만 이후에도 수많은 호족 가문들이 사실상 독립국을 이루고 쟁패하는 역사가 오래도록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중국과 비슷하게 별도의 천하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수교한 일본도 실제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으며, 앞으로 계속 언급될 일본도 일본 내 일부 세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후 그의 추천을 받아 왕인(王仁)논어(論語)천자문을 일본에 전했으며, 그것을 계기로 일본도 한자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백제의 성장은 백제의 국제화로 이어졌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권을 완성하는 역사적 변화를 낳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이왕(古爾王)이 대내적으로 백제 왕국을 완성했다면 근초고왕은 대외적으로 백제 왕국의 존재를 알린 군주라고 할 수 있다근초고왕이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우리 문헌이 아니라 일본 측 고대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고사기(古事記)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일본의 한국사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근초고왕 이전까지의 백제 역사가 모두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일본 측 사서에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백제 왕이 근초고왕이라는 게 그 근거다. 하지만 고사기는 역사라기보다 신화에 가까우며, 정사를 표방한 일본서기역시 일본 중심적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더욱이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지의 여부가 사실의 진위를 입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으므로 이마니시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실제 삼국시대보다 수백 년이나 늦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비해 7~8세기의 문헌인 고사기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백제의 도약

생존이 미덕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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