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 한반도 중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정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측의 상견례는 영 험악한 분위기다. 고구려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쿠데타가 발생할 즈음, 그러니까 167년에 신라가 3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한강 중류까지 치고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히 신라의 병력을 보고 겁을 먹은 백제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전투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는 장차 백제와 신라가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될지를 말해주는 예고편인 셈이었다.
사실 두 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00년 전부터다. 백제의 다루왕(多婁王)과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시절이던 기원후 64년에 두 나라는 오늘날 충북 보은에서 전쟁을 벌인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백제는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해서 괴롭혔다. 그런 탓에 마치 당시에 이미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쟁패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신라는 아직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소국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아직 자기 지역의 패자로 발돋움하지도 못한 상태였다(앞서 보았듯이 102년에 신라의 파사왕은 가야의 수로왕에게 중재를 구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굳이 신라를 타깃으로 삼아 공격하려 한 게 아니라 아직 무주공산이 많이 남아 있는 동쪽으로 진출하려 했을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에 기재된 백제와 신라의 초기 다툼에서는 신라의 규모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신라는 역사에 이름조차 누락된 여러 소국들과 함께 위로는 진한, 아래로는 변한과 가야를 두고 있었으므로 충청도 일대까지 진출할 힘은 없었다. 따라서 그 기록을 더 정확히 다듬는다면 백제가 장차 신라의 영토가 될 충청도 일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현지 세력과 빚은 마찰이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역사를 이해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이름과 역사가 전해지는 백제와 신라라는 나라에 익숙한 나머지 막연하게 두 나라를 처음부터 안정되고 고정된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사실 김부식도 그런 오류를 저질렀다). 그러나 사람도 그렇듯이 나라도 생성과 성장과 쇠멸의 과정을 겪는다. 기원후 1세기 무렵까지 백제와 신라는 형성기에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신라는 당시 사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국호로 보면 존재하지도 않은 나라다(신라라는 국호가 정해진 것은 5세기 지증왕 때의 일이다). 아마 당시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 무수한 부족국가와 도시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군신화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문명 이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으니 나라 이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 사람들과 그 땅들을 초기 백제와 신라의 백성과 영토로 볼 수는 없다(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영토와 주권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가 아니었으니 설사 특정 지역을 정복했다고 해도 거기에 말뚝을 치고 국경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면 신라의 국력도 크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3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실제로 동원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상당한 규모였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과연 간헐적으로 조우했던 100년 전과는 달리 백제와 신라는 2세기 중반부터 치열한 다툼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도 이 무렵부터는 초기에 두 나라를 괴롭혔던 말갈 같은 외부 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거의 두 나라의 관계만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실상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백제가 일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고 신라는 방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는 신라를 압도하지 못했고 신라도 역시 크게 패배하거나 뒤로 밀려나는 일 없이 잘 버티었으나, 공격과 수비가 분명히 나누어진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아무래도 공격 측에 더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할 듯싶다. 바꿔 말해 당시 백제와 신라의 힘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생존의 단계를 넘어 한창 뻗어나가는 팽창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신라는 아직 생존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두 나라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243년 정월에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은 커다란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다(제사라니까 혹시 대단치 않은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고대국가에서 제사라면 가장 큰 국가적 행사다). 그 전에도 백제의 왕실에서는 아마 여러 가지 제사 의식을 거행했겠지만 기록에 나오는 것은 이게 처음일뿐더러 특히 주목할 것은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과 산과 강, 그 중에서도 특히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백제가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 오늘날로 치면 주권을 지닌 독립국이 되었음을 뜻한다. 건국한 지 200여년이 지나 비로소 백제는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셈이다(고이왕이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관제를 정비한 데는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그 반면에 신라는 새 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여러 차례 전하는데, 제사 장소는 시조묘로만 국한된다(고구려는 천제와 시조제를 함께 지냈다). 같은 제사이고 국가적인 대행사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낸 백제에 비해 건국시조를 제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신라가 여전히 부족국가의 체질을 완전히 벗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제사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고이왕(古爾王) 때는 그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260년에 여러 가지 관제를 신설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백제 고유의 관직, 예컨대 좌평과 달솔, 은솔, 장덕, 시덕 등의 관직명이 바로 그 무렵에 생겨났으며, 관직의 품계도 그때 정해졌다. 이렇게 고이왕대에 이르러 백제가 여러 가지 변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 시기에 비로소 백제가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한국 최초의 역사학 박사로 꼽히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그렇게 주장했는데, 물론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사실 무엇을 고대국가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냐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별 쓸모도 없다. 적어도 국가라면 일정한 영토와 백성, 왕계, 군대, 달력, 국호, 각종 제도 등의 요건이 필요한데, 그 요건들이 역사가들의 구미에 맞게 한꺼번에 생겨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부터 고대국가였느냐는 문제는 역사가들의 사치스런 고민거리는 될지언정 역사의 본령은 아니다】.
고이왕(古爾王)은 또한 처음으로 북쪽의 정세에 눈을 뜬 왕이기도 하다. 노상 남쪽의 마한, 동쪽의 신라와 토닥거리기만 했던 전대의 왕들과는 달리 그는 선진 문명의 통로인 반도 북부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해온 245년에 고이왕은 북부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낙랑과 대방의 남부를 공략해서 상당한 영토와 백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로써 백제는 황해도 남부까지 손에 넣었는데, 눈에 보이는 그 성과보다도 더 큰 성과는 백제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북진을 시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뼈가 굵지 못한 백제로서 북진은 다소 무리였다. 고이왕은 성공리에 북진을 끝냈지만 그 후유증은 엉뚱하게도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닥쳐온다. 아들 책계왕(責稽王, 재위 286~298)은 백제의 휘하에 들어온 대방을 지원하다가 고구려와 마찰을 빚어 걱정해야 했고, 급기야는 낙랑의 침입으로 전사하는 비운을 당한다. 또 고이왕(古爾王)의 손자인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낙랑을 침공했다가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하지만 2대에 걸친 백제 왕실의 비극은 오히려 북진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미 북으로 옮기기 시작한 발길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북진에서 백제가 거두는 성공을 보기 전에 먼저 신라의 3세기를 보고 넘어가자.
▲ 도성으로 사용된 토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삼국 가운데 가장 혜안이 있었던 나라는 백제다. 왜?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서울 강남에 도읍을 정했으니까. 위 사진은 당시 백제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몽촌토성이고, 아래는 몽촌토성의 목책이다. 도성에 어울리지 않게 흙으로 쌓은 토성이지만 한강 유역에 쓸 만한 석재가 없었을 테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다. 쌓은 시기는 3세기로 추정되니 아마 고이왕 시대쯤 될 법하다.
생존이 미덕
먼저 고구려가, 그 다음에는 백제가 차례로 선진 문명권에 합류하면서 한반도의 북부와 서부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에 비해 신라가 자리 잡은 동남부는 아직 잠잠하기만 하다. 이주민 국가로 시작한 출발부터 그랬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이질적인 성격이 다분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문명권의 막내로 생겨났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대륙을 향하게 된 것과 달리 신라는 처음부터 대륙 문명과는 별개로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장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이질성이 상당 부분 잔존해 있었다(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한반도의 토착 문명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역사에서 과연 어느 것을 토착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런 이질성 중 하나가 단일한 성씨로 고정되지 않은 왕계다. 초기 신라에 영향을 준 게 중국의 농경문명보다 중국 북부와 만주의 유목문명과 일본의 해양 문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 신라의 독특한 왕계는 유목문명의 자취인지도 모른다. 유목 민족의 국가에서는 지도자의 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여러 부족장들이 돌아가며 왕위를 잇는 게 전통이기 때문이다. 유리와 탈해가 잇금으로 연장자를 가려 왕위계승자를 정한 것이나, 탈해가 자신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김알지(金閼智)를 계승자로 정하려 했던 것도 그런 전통에 따른 관습일 터이다. 어쨌거나 탈해왕(脫解王)이 한 차례 왕위에 오른 것을 제외하고 대체로 박씨가문이 위주였던 신라의 왕계는 9대 벌휴왕(伐休王, 재위 184~196)에 이르러 다시 석씨로 바뀐다. 전임자인 아달라왕에게 아들이 없었던 탓이지만 다른 성씨의 왕위 승계에도 별다른 파장이 일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꾸로 보면 아직도 신라의 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왕권이 중시될 만큼 신라의 국력도 크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에 비해 뒤처졌다는 것은 신라에게 결코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었다. ‘선발주자의 벌금(penalty)’이라는 사회학의 용어를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신라는 ‘후발주자의 이득(benefit)’을 톡톡히 누렸다고나 할까?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생존과 성장을 위해 정복이라는 인위적인 수단으로 영토와 백성들을 늘려야 했지만, 신라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생존이 곧 미덕이라는 말은 바로 신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그냥 존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신라는 하나의 풀(pool)이었다. 처음에 신라와 엇비슷한 처지였던 주변의 소국들은 신라의 풀이 조금씩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풀로 고여들었다. 북쪽의 말갈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지면 그 유민들은 신라로 내려왔다. 낙랑과 대방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바다 건너 신라로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벌휴왕 시절에는 일본에서 기근을 피해 1천여 명의 유민들이 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중요한 것은 신라가 그 외래인들을 적대시하기는커녕 전혀 낯설게 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토박이가 없는 이주민 국가였고 초기 왕계도 여러 외래인 세력이 얽혀 형성되었던 만큼 신라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신라를 찾아오든 배척하지 않았다. 초기 신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이 열린 태도에 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힘을 키운 신라는 마침내 백제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에 힘입어 3세기 초반에 내해왕(奈解王, 재위 196~230)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소극적인 방어 자세 대신 성을 쌓고 경계하는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방어 태세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윽고 파사왕 이래 대가 끊겼던 정복군주도 다시 등장했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助賁王, 재위 230 ~247)은 231년 현재 김천에 해당하는 감문국을 공격해서 영토화하고, 다시 5년 뒤에는 영천의 골벌국을 병합한다. 김천은 경상북도의 남서부, 영천은 남동부에 있으니까 당시 신라의 영토는 적어도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의 지역적 패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형적으로 나라꼴을 갖추었으니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내부 정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단연 왕계를 바로잡는 일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박씨와 석씨가 탁구공처럼 왕위를 주고받는 식으로는 정식 왕국으로 새로 태어난 신라를 이끌 수 없다. 때마침 왕계를 손보기에 좋은 기회가 생긴다. 조분왕이 어린 아들만 남기고 죽은 것이다. 일단 왕위는 조분왕의 동생 첨해왕(沾解王, 재위 247~261)이이었는데, 고구려의 경우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형제 계승이 이루어진 경우다. 문제는 첨해도 겨우 15년 동안 재위하고 죽는다는 점이다. 그의 아들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있었다 해도 나이가 아주 어렸을 것이다. 첨해가 남긴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조분왕의 사위이자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이기 때문이다.
사위가 장인의 왕위를 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특이한 일이다. 유목 문명권에서는 원래 모계 사회의 전통이 강했는데, 그 문명의 일부가 전해진 신라에서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나중에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할 때도 나오지만, 중동의 유목 민족들은 아들보다 사위가 장인의 지위를 상속하는 게 더 일반적이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줄기」 2장 참조). 하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모계 사회의 전통보다도 왕실의 근친혼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초기부터 신라의 왕실에서는 박, 석, 김의 세 성씨 내에서만 통혼이 이루어졌으므로 근친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들과 사위의 구분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조분왕과 내해왕의 촌수를 따져보자(물론 ‘촌수’란 훗날 유학이 전래되면서 생긴 개념이지만). 둘은 벌휴왕의 손자로서 사촌형제 사이지만 내해의 아내가 조분의 누나이므로 처남-매부 사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분의 아내가 내해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분은 내해의 처남이자 사위가 된다(아울러 내해의 아내, 즉 조분의 누나에게는 조분의 아내가 딸이자 동생의 아내, 즉 올케였을 테니 서로 어떻게 대했을지가 궁금해진다). 조분은 조카딸과 결혼한 것이니 후대의 유학 예법으로 치면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른 셈이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고대에는 그런 근친혼이 많았으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그런 근친혼 덕분에 신라 왕실에서는 아들과 사위가 얼마든지 같은 성씨일 수 있었고, 따라서 얼마든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었다【신라 특유의 갈문왕(葛文王) 관습은 여기서 비롯된다. 갈문왕이란 신라 초기에 왕의 아버지, 장인, 형제 등에 두루 주어지는 일종의 관직 같은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위계승권이 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들에게 현직 왕이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여하는 작위라고 보면 된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를 추서(追敍)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있었고(하권에서 보겠지만 대원군이라는 직함이 그런 예다) 유럽의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왕의 외가까지 전혀 차별 없이 대우한 경우는 드물다. 신라 왕실은 근친혼 때문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왕의 직계 후손이었고, 따라서 친가와 외가의 구분이 모호했으므로 그런 식의 갈문왕 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사위라 해도 어느 왕의 아들, 즉 왕족의 신분이었으니까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후대에 신라에서 여왕이 탄생하게 되는 사건도 바로 그 근친혼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미추왕의 즉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사위로서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김씨 최초의 왕이라는 사실이다.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삼아 김씨 성이 생긴 이래 신라 왕실에서 김씨는 주로 왕비 가문을 이루었을 뿐 직접 왕을 배출한 적은 없었다. 물론 이후 신라의 왕통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한 미추왕에 굳이 주목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미추왕 다음으로 세 명의 석씨 왕 ― 유례, 기림, 흘해 ― 이 등장한 뒤 그 다음 17대 내물왕(奈勿王)부터 신라 왕통은 무려 500여 년 동안 김씨의 단일 성씨로만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후 신라의 김씨 왕들은 제사를 한 번 더 지내야 했다. 시조인 박혁거세와 더불어 김씨 왕의 시조인 미추왕에게도 따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게다가 미추왕의 직계 후손들은 재임시에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내지 못한 조상에게 ‘사후 업적’을 만들어 붙여주기도 했다. 유례왕(儒禮王, 재위 284~298) 시절인 297년에 이서국이 신라의 수도에까지 침략해 왔을 때 미추왕릉 주변에 있던 대나무잎들이 병사들로 변신해서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서국이라면 지금의 경상북도 최남단에 있는 청도에 해당한다. 석씨 유례왕으로선 신라의 강역을 남쪽으로 더욱 확장하는 업적을 세웠으면서도 김씨 후손들의 역사 조작으로 정작 그 공로는 죽은 미추왕에게 돌아갔으니, 죽어서도 억울하지 않았을까?
▲ 김씨 왕의 시조 경주에 있는 미추왕의 능이다. 그 전까지의 왕릉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데 비해 미추왕릉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미추왕이 김씨 왕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신라 왕실은 잠시 동안 세 성씨 간에 오락가락하지만 4세기 중반 내물왕(奈勿王)부터는 이후 500여 년 동안 김씨로 고정된다. 후대의 김씨 왕들은 자신의 4대 직계 조상들 이외에 시조인 미추왕릉에도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신라가 뒤늦게나마 김씨로 대권후보를 통일하고 단일한 왕계를 꾸리기 시작할 무렵 백제는 이미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신라와의 키재기는 여전했지만 반도 북부의 상황 변화로 인해 이제 백제에게는 동쪽보다 북쪽의 일이 더 궁금해지고 시급해진 것이다.
그 상황 변화란 말할 것도 없이 낙랑이 멸망한 사건을 가리킨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낙랑과 대방을 한반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 그러니까 지금의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국 국적의 두 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낙랑과 대방은 한나라가 무너지고 중국이 분열시대로 접어든 이후부터는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존속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지역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이건 백제에게 뭘 의미할까?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낙랑과 대방은 두 나라의 완충지다. 이런 ‘공동경비구역’이 사라졌다는 것은 곧 이제부터는 두 나라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는 뜻이다. 백제로서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동쪽의 신라와 벌였던 자잘한 영토 다툼은 앞으로 다가올 고구려와의 충돌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백제는 위기를 맞은 걸까, 아니면 기회를 맞은 걸까?
위기의 상황은 대개 기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사실 상황 자체로만 보면 구별할 수도 없고 구별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주체적 역량이다. 주체의 힘이 약하면 위기가 되고 힘이 강하면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당시 백제의 힘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관제를 확립함으로써 백제를 명실상부한 독립 왕국으로 발전시킨 고이왕(古爾王) 시대를 계기로 백제는 한창 물이 오르는 중이었다. 비록 책계와 분서 두 왕이 북방과의 관계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두 왕의 치세는 합쳐서 20년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한창 뻗어나는 백제에게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두 걸음 전진을 위한 한 걸음 후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두 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백제 전체를 위해선 행운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백제 왕실은 자칫 큰 화로 번질 뻔했던 한 가지 문제, 즉 권력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했던 2세기의 미스터리가 관계된다.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던 3세기 중반 백제의 왕권은 두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 두 갈래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2세기의 왕인 개루왕에게서 이어진다. 그에게는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각 계파의 원조가 된다. 일단 맏아들(초고왕)이 왕위를 잇기는 했으나 둘째 아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기록에는 그 둘째 아들이 고이왕이라고 되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이로 따지면 불가능하므로 고이왕은 아마 둘째 아들의 후손일 것이다).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과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의 시대 70년이 지나도록 그 세력은 계속 왕권을 노렸다. 이윽고 234년에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자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옹립한다. 사반왕이 퇴출된 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그랬다면 왜 얼마 가지도 못할 왕위를 굳이 계승시켰을까? 따라서 사반왕이 쫓겨나고 고이왕이 즉위한 사건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을 조상으로 하는 계파가 백제 왕실의 권력을 찬탈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서 본 것처럼 고이왕이 새삼스럽게 백제의 관직을 정비하고 하늘과 땅에 대규모 제사를 지낸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은 마치 자신들이 나라를 새로 건국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호들갑을 떨지 않던가? 그러나 아들 책계와 손자 분서가 비명에 죽음으로써 고이왕(古爾王)의 지극정성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가 마련해 놓은 국가 발전의 기틀은 다음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은 원래의 첫째 계파인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의 동생)인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이었다【여기에도 또 한 번의 왕계 미스터리가 있다. 비류왕이 즉위한 해는 304년인데, 구수왕이 죽고 사반왕이 폐위되고 고이왕이 즉위한 해는 그보다 무려 70년이나 앞선 234년이다. 따라서 비류왕은 구수왕의 아들과 사반왕의 동생이 될 수 없고, 아마 구수왕의 손자이거나 증손자였을 것이다. 이렇듯 4세기까지도 왕계가 불확실할 만큼 백제의 초기 역사에는 불완전한 측면이 많다. 이 점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백제 역사가 홀대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가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신라는 백제를 늘 원수로 여겼으며, 오로지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중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또한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金富軾)이 신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삼국사기』에는 백제 부분이 가장 적을 뿐 아니라 내용도 가장 빈약하다)】.
모처럼만에 왕통을 바로잡은 탓에 비류왕(比流王)은 외정(外征)보다 내치에 주력하면서 왕권을 다지기에 힘쓴다. 아마도 그가 재임한 40년 동안 백제의 백성들은 역대 어느 시절보다도 태평한 세월을 누렸으리라(그 기간 한 차례 반란 사건 이외에는 전쟁을 벌인 기록도 없다).
그러나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은 백제는 마냥 그런 태평성대를 향유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백제의 지배층도 그런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정(靜)’의 시기에 ‘동(動)’을 준비하지 않으면 장차 다가올 것은 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 화(禍)가 될 것이다. 그 준비의 첫째는 후방 다지기이고, 그 후방 다지기의 첫째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다. 그래서 322년에 비류왕은 신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곧이어 신라도 사신을 보내오면서 두 나라는 사실상 정식 수교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과거에도 두 나라 사이에 유화적 분위기가 감돈 적은 간혹 있었지만 모두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에 비해 이번은 상당 기간 지속적인 관계가 될 전망이다.
건국 이후 줄창 크고작은 싸움으로만 일관해 온 두 나라가 갑자기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긴 이유는 공동의 적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적이란 바로 북쪽의 고구려다.
낙랑이라는 완충지가 사라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남부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서쪽의 대륙 정세에만 골몰해 있었던 고구려, 그러나 생존의 단계를 넘어 팽창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고구려의 눈에 처음으로 한반도 중남부, 그리고 그곳에 자리잡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북방의 사태 변화는 자기 지역의 문제에만 집착해 왔던 백제와 신라에게 처음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기에 족했다. 두 나라는 이제 우물 밖의 세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두 나라의 접근은 필연적이다.
비류왕(比流王)의 후방 다지기에서 둘째 과제는 아직도 전라도 일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한의 숨통을 완전히 끊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늙은 비류왕의 몫이 아니라 그의 아들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몫이 된다【비류왕은 고이왕 계열의 세력과 원한을 덧쌓지 않고 타협을 이룬 듯하다. 왜냐하면 344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 대신 분서왕의 아들인 계왕(契王, 재위 344~346)이 잠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나이가 어려 비류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바 있었으니 두 정치 세력은 아마 그때 평화 협상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왕이 3년 만에 죽고 비류의 아들 근초고가 왕위를 잇는 것으로 ‘두 계파의 문제’는 사라졌고 이후 백제의 왕통은 다시 왕계의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로 2세기 이후 사실상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마한은 한반도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그러나 근초고왕을 백제의 역대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로 만들어 준 사건은 마한 정복이 아니다. 아버지 비류왕(比流王) 때부터 그랬듯이 이제 백제에게 중요한 방향은 남쪽이나 동쪽이 아니라 북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한 정복은 본 과제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과제에 불과하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향해 남침해 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사건이고 튼튼히 대비를 해두었으니 백제로서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지금의 황해도 백천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맞아 근초고왕은 우선 태자를 보내 공격하게 한다. 그로서는 고구려의 힘을 한 번 테스트해본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예상 외로 백제의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고구려 군 5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고구려의 남침 야욕을 꺾었다.
고구려와의 사상 첫 접전에서 완승을 거둔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자신감을 얻은 반면 승리를 낙관했던 고국원왕은 당황했다. 굳어진 확신과 싹트는 회의, 결국 이 차이가 최종 승부를 갈랐다. 2년 뒤 고국원왕은 다시 남진에 나섰으나 일취월장하는 백제의 힘은 2년 전과도 또 달랐다. 예성강에서 매복 작전으로 서전을 승리한 근초고왕은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직접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본토 공격에 나섰다. 선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퇴만 거듭하게 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수도 평양까지 추격해 온 백제군에게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운의 최후를 맞는다(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 남쪽이었으니 백제군이 어디까지 북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고국원왕이 고국에 바친 마지막 기여는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고국원왕이 죽자 백제군은 그 성과에 만족하고 철수를 한다. 그때 백제가 끝까지 고구려의 목을 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답을 추측하기 어려운 가정이지만 근초고왕이 조금만 더 욕심을 냈더라면 왕을 잃은 고구려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동천왕(東川王)도 위나라에게 몰려 수백 리 산길을 달아났지만, 그래도 목숨을 부지한 탓에 재건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그 정도로도 대만족이었다. 오히려 그는 몇 차례나 완승을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로 귀환한 직후 그가 맨먼저 한 일은 고구려의 보복에 대비해서 평지에 있던 도성을 버리고 인근의 남한산에 산성을 쌓아 천도한 것이었다. 남한산성은 7세기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쌓고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마 문무왕 시대에도 근초고왕이 쌓은 백제의 옛 도성을 토대로 했을 것이다.
▲ 하사냐, 조공이냐 근초고왕 때 백제는 처음으로 일본과 정식 상견례를 나누었다. 그 기념일까? 근초고왕은 사진에 나온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을 일본 왕에게 주었다고 한다. 날이 일곱 개라서 역사가들은 칠지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칼의 몸체에 백제가 일본에게 준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역사가들은 백제가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 역사가들은 백제왕이 하사한 것이라고 맞섰다. 당시에는 그냥 두 나라의 수교를 축하하는 기념품이었을 텐데, 쓸데없이 지금 와서 열을 올리는 격이다.
어쨌든 승리의 대가는 무척 컸다. 당대의 평가로 보면 고구려의 남진을 분쇄하고 북쪽의 영토를 개척한 게 가장 큰 성공이었겠지만, 역사적으로 그보다 훨씬 중요한 성과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전까지 백제는 반도 남쪽과 동쪽의 소국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수준이었으므로 문명적으로 보면 오히려 어두운 오지를 항해 팽창하려 했던 셈이다. 그러나 북쪽의 강호 고구려를 압도적으로 물리치자 당연히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맨먼저 그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넓은 중국 대륙이다.
372년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진(晉, 동진)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맺는다. 중국으로 가는 육로는 고구려에 막혀 있을 뿐 아니라 백제로서는 ‘ㄷ’자형으로 빙 돌아가는 격이니 수교길은 당연히 뱃길이다. 그런데 뱃길이라고 하면 중국으로 가는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서쪽으로 황해를 가로지르면 동진에 닿지만, 마침 마한 정복으로 남해 뱃길이 트여 있으므로 동쪽으로 가면 일본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근초고왕은 일본과도 첫 수교의 테이프를 끊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일본에 간 첫 백제인이 아직기(阿直岐)라는 사람이다【왕조 시대가 빨랐던 한반도와 달리 당시 일본은 몇 개의 나라로 된 세계가 아니었다. 일본에 고대국가가 생긴 시기는 7세기지만 이후에도 수많은 호족 가문들이 사실상 독립국을 이루고 쟁패하는 역사가 오래도록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중국과 비슷하게 별도의 ‘천하’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수교한 ‘일본’도 실제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으며, 앞으로 계속 언급될 일본도 일본 내 일부 세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후 그의 추천을 받아 왕인(王仁)이 『논어(論語)』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했으며, 그것을 계기로 일본도 한자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백제의 성장은 백제의 국제화로 이어졌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권을 완성하는 역사적 변화를 낳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이왕(古爾王)이 대내적으로 백제 왕국을 완성했다면 근초고왕은 대외적으로 백제 왕국의 존재를 알린 군주라고 할 수 있다【근초고왕이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우리 문헌이 아니라 일본 측 고대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와 『고사기(古事記)』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일본의 한국사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근초고왕 이전까지의 백제 역사가 모두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일본 측 사서에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백제 왕이 근초고왕이라는 게 그 근거다. 하지만 『고사기』는 역사라기보다 신화에 가까우며, 정사를 표방한 『일본서기』 역시 일본 중심적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더욱이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지의 여부가 사실의 진위를 입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으므로 이마니시의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실제 삼국시대보다 수백 년이나 늦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비해 7~8세기의 문헌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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