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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화려한 분열 - 4장 진짜 삼국시대, 바뀌는 대륙풍(무령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4장 진짜 삼국시대, 바뀌는 대륙풍(무령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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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뀌는 대륙풍

 

 

317년 진(서진)이 강남으로 터전을 옮기고 북중국이 이민족들의 세상으로 바뀌었을 때, 중국은 유사 이래 최대의 혼란기를 맞았다. 1차 분열기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그 기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실을 상징적 중심으로 섬기며 쟁패했으므로 이처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족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탓에 이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배척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북중국을 주름잡는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 왕조에 의해 오랑캐로 취급되며 적대시되던 자들이다오랑캐의 개념은 중화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족들이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기나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발달한 중화 사상과 그것을 체계화한 유학이 이데올로기적 토대로 작용했다. 원래 오리지널 한족은 황하 문명을 이어받은 중원 부근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춘추시대에 초ㆍ오월 등의 제후국이 성장하면서 강남이 먼저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 진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중원 서쪽까지 포함되기에 이른다. 결국 시황제는 장성을 쌓음으로써 자신을 끝으로 한족 문명권의 문을 닫아건 셈이다. 그 구분에 따르면 장성의 한참 바깥에 있는 한반도는 당연히 오랑캐가 되지만, 역대 한족 왕조들이 적대시한 오랑캐는 주로 북방의 몽골계 민족들이었고 한반도는 중국에 사대하는 특수한 오랑캐였다. 한족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묘한 관계는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사실 한반도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이 탄생하고 활발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혼란과 분열에 힘입은 바 크다. 일찍이 한나라라는 강력한 통일제국이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4군에 눌려 고대국가 체제조차 이루지 못한 게 그 증거다. 4세기에 초반 고구려가 낙랑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후반에 랴오둥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이 동아시아의 구심점 노릇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희대의 정복군주가 때마침 출현한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어차피 인물이 시대를 만들기보다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게 옳다고 보면 그도 역시 그런 시대였기에 정복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중국에서 3세기와 같은 분열상이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아마 고구려는 비록 위나라와 고전을 치렀겠지만 오히려 더 큰 팽창의 계기를 맞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진이 예상 외로 420년까지 100년 이상 존속하면서 남북조로 분열된 시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정을 되찾은 탓에 고구려의 팽창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 뒤를 이은 남조의 나라들 , , , 은 대부분 50년을 넘기지 못한 단명 왕조였다. 그럼 420년 동진이 몰락한 이후 중국의 안정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그 주역이 바로 선비족이 세운 북위다. 분열기 초반 극에 달한 혼돈을 수습하고 386년에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534년까지 무려 150년간 존속하면서 북중국의 중심으로 역할했던 것이다.

 

게다가 북위는 그냥 명패만 유지했던 게 아니라 오랑캐 제국답지 않게 뛰어난 제국 운영의 솜씨를 보였다. 전진과 후연을 물리치고 화북의 패권을 잡은 직후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랴오둥 소유권을 공인해주면서 수교를 맺은 것도 그 중 하나다. 당시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에 있었으므로 북위로서도 정면 대결을 벌일 경우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북위는 계속 이민족 왕조의 개성만 고집해서는 어지러운 판국에 오래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추진한 게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이다. 비록 건국 초기에는 선비 부 족장들의 권위를 무시한 탓으로 황제가 암살되는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효문제(孝文帝)에 이르러 그 정책은 빛을 보았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효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여 국력 배양에 큰 성과를 낸다(나중에 13세기 원나라나 17세기 청나라의 경우에서도 확인되지만 북방 민족의 한화 정책은 이민족 왕조가 장기 존속하기 위한 필수 관건이 된다). 그가 재위한 5세기 후반 30년은 마침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집권 말기와 겹치면서 화북과 한반도에 두루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경쟁적인 중국 수교 어느 정도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은 경쟁적으로 중국의 남북조 왕조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당시 남조의 양 나라는 주변 여러 나라들에서 보낸 사신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해설을 붙여놓았는데, 오늘날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림은 백제의 사신이다.

 

 

만약 북위가 그 전성기에 남조까지 정복해서 대륙의 통일을 꾀했더라면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효문제(孝文帝)는 한반도에서 남진정책을 편 장수왕(長壽王)에게서 별로 자극을 받지 않은 듯하다. 워낙 넓은 대륙이라 한반도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판단이었을까? 그러나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만 연장을 얻을 수 있다. 효문제의 시대에 번성했던 북위는 그 이후 급격히 약화된다. 이런 북위의 쇠퇴는 중국에서는 물론이지만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분열기치고는 비교적 오랜 기간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구심점을 이루었기에 북위에서 불기 시작한 대륙풍의 변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만들어낸다.

 

우선 즉각적인 결과는 중국의 다원화다. 중국은 다시 분열기의 초기인 3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대륙풍의 방향은 따뜻한 남쪽이다. 말이 북조의 왕조일 뿐 남조에게까지 조공을 받을 만큼 강성했던 북위가 힘을 잃자 남조가 살아났으며, 그에 따라 고구려에 눌려 대중국 외교를 펼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백제가 다시 전통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남중국에 접근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512년 양나라에 조공하면서 웅진 천도 후 처음으로 중국과 수교한 것은 그런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장수왕(長壽王) 시절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꼬박꼬박 사신을 보내 조공하던 고구려도 슬슬 남조의 양나라를 챙기기 시작한다. 고구려와 돈독한 우호를 유지해 온 북위로서는 물론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다. 그로 인한 말기적 증상일까? 장수왕 때도 고구려와 남조 간에 이따금씩 이루어지는 사신 왕래를 저지하지 않았던 북위는 급기야 520년에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의 책봉 서신을 가지고 가는 양나라 사신을 수도인 뤄양으로 압송하기까지 하는 조급증을 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위에 정나미가 떨어진(아니면 북위가 몰락하리라는 낌새를 알아차린) 고구려는 양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를 급격히 늘린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다원화의 새 시대를 맞아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신라다. 초기의 혼돈기, 그리고 북위가 가져온 안정기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도약했다면, 이제 새로 다가온 혼돈기를 맞아 그 도약의 바통은 신라가 이어받는다. 때마침 나제동맹(羅濟同盟) 덕분에 신라는 꿀맛 같은 번영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양나라에 가는 백제 사신을 따라가서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루트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제 신라도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대륙풍의 변화는 신라를 위한 변화다. 500년에 왕위에 오른 신라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생각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백제사의 흔적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이다. 야구장 홈플레이트보다 약간 작은 돌에 무령왕의 이름(사마왕)과 죽은 연월일, 매장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전혀 도굴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는 그만큼 후대에 백제 역사가 관리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기묘한 정립

바뀌는 대륙풍

2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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