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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화려한 분열 -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삼근왕, 동성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삼근왕, 동성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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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정벌로 이제 한반도의 서열은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충청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북위와 한층 돈독해진 우애를 유지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개인적으로 장수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다소 있었던 듯하다. 서열상으로는 고구려가 북위를 받드는 처지였으나 효문제는 특히 고구려에 대한 안배에 신경을 썼다. 당시 북위의 황실에 오는 사신들의 공식 서열을 보면, 물론 강남의 제(, 479년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강남의 남조는 제나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제라고도 부른다)나라 사신이 서열 1위였고 2위는 단연 고구려였다. 잘 나가는 고구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자의 단골 메뉴는 status quo(현상 유지). 중국의 남북조 모두에게서 한반도의 단독 소유자임을 공인받은 고구려는 거의 매년 북조와 남조에게 조공을 보내 이대로 영원히!’를 소리없이 외쳤다.

 

한편 고구려의 남진으로 반도 남부로 밀려난 백제와 신라는 비록옹색한 처지였으나 그럭저럭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두 나라의 위상이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불과 50년 전 나제동맹(羅濟同盟)이 맺어질 무렵까지만 해도 신라는 동맹 파트너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백제에 비해 여러 모로 뒤처져 있었다. 강역에서도 신라는 아직 오늘날 경상북도에 국한되어 있었으니, 경기도에서 전라남도까지 차지하고 있는 백제에 미칠 바가 못 되었고, 국제관계에서도 신라는 오로지 백제 하나만을 동맹자로 삼고 있었으나 백제는 남중국과 일본, 가야와 두루 교류하는 국제적인 대국이었다. 그러던 관계가 대뜸 대등해진 것은 신라가 성장한 탓이라기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백제가 몰락한 탓이다.

 

물론 신라도 동맹국 백제가 당할 때 손놓고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제동맹이 맺어진 이후 신라는 동해안을 극악스럽게 침탈하는 왜구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서 성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삼국사기에는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침략이 있기 직전까지 4년 동안 8개 이상의 성을 집중적으로 쌓은 기사가 나온다). 신라가 백제와 같은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수왕의 일정표에 백제 정벌만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SOS에도 신라는 성의껏 지원 병력을 보내 동맹자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문주왕(文周王)의 새 백제 건설 사업도 여의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백제가 웅진으로 내려앉은 이후 신라는 늘 저만치 앞서갔던 백제가 어느새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결국 장수왕의 백제 압박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하향평준화를 빚은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 축소 건조한 전함 백제 호에서는 처음부터 물 새는 소리가 들린다. 성실하지만 유약했던 문주왕은 불과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병관좌평인 해구(解仇)에게 암살되니 아버지 개로왕(蓋鹵王)에 이어 연 2대째 당하는 비극이다. 이렇듯 국정이 문란해진 이유는 필경 모든 사정이 과거와 송두리째 달라진 데다 새로 이사한 도읍지의 궁핍한 살림이 귀족들의 많은 불만을 샀기 때문일 터이다. 특히 권력다툼이 벌어진 이유는 남한산성에서 함께 남하한 전통 귀족들과 웅진 부근의 토박이 귀족들 간에 알력이 생겨난 탓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일단 문주의 아들 삼근왕(三斤王, 재위 477~479)이 즉위하지만 겨우 열세 살짜리 아이가 거센 풍랑에 휩쓸리는 배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다. 결국 그는 해구에게 아예 전권을 내주어 버렸고 해구는 그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삼근왕은 아버지보다도 더 짧은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갑자기 죽은 데는 아마 사연이 있을 터, 그러나 기록에 전하지 않으므로 백제 왕실에 과연 3대째 횡사하는 비극이 이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백제는 479년에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인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이 즉위하면서 비로소 정국의 안정을 되찾는다.

 

 

 

 

역설적이게도 나제동맹(羅濟同盟)이 통일전선의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은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싹쓸이하고 난 다음부터다. 그것은 아마도 백제가 더 이상 신라에 대해 우위를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두 나라가 서로 어울리자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장수왕이다. 그로서는 아예 백제의 뿌리를 잘라 버리는 건데, 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481년 고구려는 신라 북변을 침략했다가 신라, 백제, 가야의 연합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3년 뒤 다시 공략해 보지만 나제동맹의 방어망은 더욱 강력해져 있다. 심지어 488년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 공격해온 북위마저 격퇴시키는 개가를 올린다. 재건한 지 10여 년 만에 백제는 옛날의 명성을 절반쯤 되찾았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에게는 베옷을 입고 슬퍼할 만큼 정신적 지주였지만 나제동맹의 두 나라에게는 저승사자만 같았던 고구려 장수왕이 죽자 동맹은 더욱 견실해진다.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493년에 백제의 동성왕은 신라에 통혼을 청했고 신라의 소지왕(炤智王, 재위 479~500)은 귀족의 딸을 보내 그간의 우의를 혈연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듬해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문경의 견아성(犬芽城)이 포위당하자 동성왕은 3천의 병사를 보내 구원했고, 또 이듬해 이번에는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고구려군이 포위하자 신라가 구원군을 보내 포위를 풀었다. 이제 나제동맹은 물보다 진한 피로 묶인 동맹이다.

 

동맹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한반도 삼국은 비로소 정립(鼎立)이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균형을 이룬다. 고구려는 여전히 최강국이지만 나제동맹을 부술 만큼의 힘은 없다. 또 백제와 신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혈연까지 보태면서 끈끈한 우애를 과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나라로 통합될 의지나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강대국 하나에 약소국 둘이 대립하는 형세이니 기묘한 정립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반도 삼국이 생겨난 이래로 처음 맞이하는 진짜 삼국시대다. 만약 이런 상황이 마냥 유지된다면 어떻게 될까? 삼국은 장기적인 정립을 이루게 될까? 그러나 그럴 순 없다. 세 발 달린 솥의 안정적인 자세에서 정립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사실 어원이 그럴 뿐이고 정립이란 원래 장기적일 수 없다. 장기적인 것은 오로지 통일뿐이다예나 지금이나 동양 사회에서는 분립이나 각개약진이 없다. 동양의 역사, 특히 중국의 역사를 보면 늘 분열보다 통일이 중시된다. 물론 중국사에도 분열기는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분열기는 늘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분열 상태가 지속되다가 결국에는 통일을 이루었다. 그 반면 서양의 역사에서는 늘 통일보다 분열의 성향이 강했다. 서양 문명은 오리엔트(중동)에서 발생한 이후 내내 중심지를 서쪽으로 옮겼으며, 유럽에 둥지를 튼 이후에도 언제나 각 지역이 분립하는 식으로 발전했다(종횡무진 서양사, 프롤로그 참조). 중국의 역사가 통일 지향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과 달리 확고한 지리적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등장한 모든 나라는 늘 지리적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므로 아무리 분열이 심하다해도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지리라고 해야 할까?.

 

때마침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위력을 발휘하던 5세기 말~6세기 초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세력 균형 속에 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북위가 효문제(孝文帝)의 치세에 번영을 누리며 착실히 발전하고 있었다. 남조에서는 제나라가 502년에 멸망하고 양()나라로 바뀌었지만 남중국이야 원래 왕조 교체가 잦았으니 별 문제는 아니다(북조에서는 여러 나라가 동시에 병립하며 혼돈상을 보였고 남조는 동진 이래로 왕조가 차례로 교대하는 식이었다. 중국 전체로 보면 북조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동전이 모로 서는 때는 순간에 불과하듯이 균형이란 원래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늘 그랬듯이 한반도에서의 균형이 무너지는 계기는 멀리 중국에서부터 찾아온다.

 

 

충청도의 고구려 비석 아이 둘이 어른 하나를 당할까? 나제동맹은 장수왕(長壽王)의 강력한 압박전술을 막아내지 못했다.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까지 손에 넣었고,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대표자가 되었다. 사진은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인데, 400개의 문자들로 그 시대의 한반도 사정을 전하고 있다. 남한에 있는 드문 고구려 유적 가운데 하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기묘한 정립

바뀌는 대륙풍

2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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