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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2부 화려한 분열, 4장 진짜 삼국시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2부 화려한 분열, 4장 진짜 삼국시대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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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정벌로 이제 한반도의 서열은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충청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북위와 한층 돈독해진 우애를 유지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개인적으로 장수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다소 있었던 듯하다. 서열상으로는 고구려가 북위를 받드는 처지였으나 효문제는 특히 고구려에 대한 안배에 신경을 썼다. 당시 북위의 황실에 오는 사신들의 공식 서열을 보면, 물론 강남의 제(, 479년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강남의 남조는 제나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제라고도 부른다)나라 사신이 서열 1위였고 2위는 단연 고구려였다. 잘 나가는 고구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자의 단골 메뉴는 status quo(현상 유지). 중국의 남북조 모두에게서 한반도의 단독 소유자임을 공인받은 고구려는 거의 매년 북조와 남조에게 조공을 보내 이대로 영원히!’를 소리없이 외쳤다.

 

한편 고구려의 남진으로 반도 남부로 밀려난 백제와 신라는 비록옹색한 처지였으나 그럭저럭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두 나라의 위상이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불과 50년 전 나제동맹(羅濟同盟)이 맺어질 무렵까지만 해도 신라는 동맹 파트너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백제에 비해 여러 모로 뒤처져 있었다. 강역에서도 신라는 아직 오늘날 경상북도에 국한되어 있었으니, 경기도에서 전라남도까지 차지하고 있는 백제에 미칠 바가 못 되었고, 국제관계에서도 신라는 오로지 백제 하나만을 동맹자로 삼고 있었으나 백제는 남중국과 일본, 가야와 두루 교류하는 국제적인 대국이었다. 그러던 관계가 대뜸 대등해진 것은 신라가 성장한 탓이라기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백제가 몰락한 탓이다.

 

물론 신라도 동맹국 백제가 당할 때 손놓고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제동맹이 맺어진 이후 신라는 동해안을 극악스럽게 침탈하는 왜구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서 성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삼국사기에는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침략이 있기 직전까지 4년 동안 8개 이상의 성을 집중적으로 쌓은 기사가 나온다). 신라가 백제와 같은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수왕의 일정표에 백제 정벌만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SOS에도 신라는 성의껏 지원 병력을 보내 동맹자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문주왕(文周王)의 새 백제 건설 사업도 여의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백제가 웅진으로 내려앉은 이후 신라는 늘 저만치 앞서갔던 백제가 어느새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결국 장수왕의 백제 압박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하향평준화를 빚은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 축소 건조한 전함 백제 호에서는 처음부터 물 새는 소리가 들린다. 성실하지만 유약했던 문주왕은 불과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병관좌평인 해구(解仇)에게 암살되니 아버지 개로왕(蓋鹵王)에 이어 연 2대째 당하는 비극이다. 이렇듯 국정이 문란해진 이유는 필경 모든 사정이 과거와 송두리째 달라진 데다 새로 이사한 도읍지의 궁핍한 살림이 귀족들의 많은 불만을 샀기 때문일 터이다. 특히 권력다툼이 벌어진 이유는 남한산성에서 함께 남하한 전통 귀족들과 웅진 부근의 토박이 귀족들 간에 알력이 생겨난 탓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일단 문주의 아들 삼근왕(三斤王, 재위 477~479)이 즉위하지만 겨우 열세 살짜리 아이가 거센 풍랑에 휩쓸리는 배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다. 결국 그는 해구에게 아예 전권을 내주어 버렸고 해구는 그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삼근왕은 아버지보다도 더 짧은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갑자기 죽은 데는 아마 사연이 있을 터, 그러나 기록에 전하지 않으므로 백제 왕실에 과연 3대째 횡사하는 비극이 이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백제는 479년에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인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이 즉위하면서 비로소 정국의 안정을 되찾는다.

 

 

 

 

역설적이게도 나제동맹(羅濟同盟)이 통일전선의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은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싹쓸이하고 난 다음부터다. 그것은 아마도 백제가 더 이상 신라에 대해 우위를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두 나라가 서로 어울리자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장수왕이다. 그로서는 아예 백제의 뿌리를 잘라 버리는 건데, 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481년 고구려는 신라 북변을 침략했다가 신라, 백제, 가야의 연합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3년 뒤 다시 공략해 보지만 나제동맹의 방어망은 더욱 강력해져 있다. 심지어 488년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 공격해온 북위마저 격퇴시키는 개가를 올린다. 재건한 지 10여 년 만에 백제는 옛날의 명성을 절반쯤 되찾았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에게는 베옷을 입고 슬퍼할 만큼 정신적 지주였지만 나제동맹의 두 나라에게는 저승사자만 같았던 고구려 장수왕이 죽자 동맹은 더욱 견실해진다.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493년에 백제의 동성왕은 신라에 통혼을 청했고 신라의 소지왕(炤智王, 재위 479~500)은 귀족의 딸을 보내 그간의 우의를 혈연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듬해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문경의 견아성(犬芽城)이 포위당하자 동성왕은 3천의 병사를 보내 구원했고, 또 이듬해 이번에는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고구려군이 포위하자 신라가 구원군을 보내 포위를 풀었다. 이제 나제동맹은 물보다 진한 피로 묶인 동맹이다.

 

동맹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한반도 삼국은 비로소 정립(鼎立)이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균형을 이룬다. 고구려는 여전히 최강국이지만 나제동맹을 부술 만큼의 힘은 없다. 또 백제와 신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혈연까지 보태면서 끈끈한 우애를 과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나라로 통합될 의지나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강대국 하나에 약소국 둘이 대립하는 형세이니 기묘한 정립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반도 삼국이 생겨난 이래로 처음 맞이하는 진짜 삼국시대다. 만약 이런 상황이 마냥 유지된다면 어떻게 될까? 삼국은 장기적인 정립을 이루게 될까? 그러나 그럴 순 없다. 세 발 달린 솥의 안정적인 자세에서 정립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사실 어원이 그럴 뿐이고 정립이란 원래 장기적일 수 없다. 장기적인 것은 오로지 통일뿐이다예나 지금이나 동양 사회에서는 분립이나 각개약진이 없다. 동양의 역사, 특히 중국의 역사를 보면 늘 분열보다 통일이 중시된다. 물론 중국사에도 분열기는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분열기는 늘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분열 상태가 지속되다가 결국에는 통일을 이루었다. 그 반면 서양의 역사에서는 늘 통일보다 분열의 성향이 강했다. 서양 문명은 오리엔트(중동)에서 발생한 이후 내내 중심지를 서쪽으로 옮겼으며, 유럽에 둥지를 튼 이후에도 언제나 각 지역이 분립하는 식으로 발전했다(종횡무진 서양사, 프롤로그 참조). 중국의 역사가 통일 지향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과 달리 확고한 지리적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등장한 모든 나라는 늘 지리적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므로 아무리 분열이 심하다해도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지리라고 해야 할까?.

 

때마침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위력을 발휘하던 5세기 말~6세기 초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세력 균형 속에 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북위가 효문제(孝文帝)의 치세에 번영을 누리며 착실히 발전하고 있었다. 남조에서는 제나라가 502년에 멸망하고 양()나라로 바뀌었지만 남중국이야 원래 왕조 교체가 잦았으니 별 문제는 아니다(북조에서는 여러 나라가 동시에 병립하며 혼돈상을 보였고 남조는 동진 이래로 왕조가 차례로 교대하는 식이었다. 중국 전체로 보면 북조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동전이 모로 서는 때는 순간에 불과하듯이 균형이란 원래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늘 그랬듯이 한반도에서의 균형이 무너지는 계기는 멀리 중국에서부터 찾아온다.

 

 

충청도의 고구려 비석 아이 둘이 어른 하나를 당할까? 나제동맹은 장수왕(長壽王)의 강력한 압박전술을 막아내지 못했다.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까지 손에 넣었고,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대표자가 되었다. 사진은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인데, 400개의 문자들로 그 시대의 한반도 사정을 전하고 있다. 남한에 있는 드문 고구려 유적 가운데 하나다.

 

 

바뀌는 대륙풍

 

 

317년 진(서진)이 강남으로 터전을 옮기고 북중국이 이민족들의 세상으로 바뀌었을 때, 중국은 유사 이래 최대의 혼란기를 맞았다. 1차 분열기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그 기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실을 상징적 중심으로 섬기며 쟁패했으므로 이처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족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탓에 이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배척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북중국을 주름잡는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 왕조에 의해 오랑캐로 취급되며 적대시되던 자들이다오랑캐의 개념은 중화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족들이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기나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발달한 중화 사상과 그것을 체계화한 유학이 이데올로기적 토대로 작용했다. 원래 오리지널 한족은 황하 문명을 이어받은 중원 부근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춘추시대에 초ㆍ오월 등의 제후국이 성장하면서 강남이 먼저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 진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중원 서쪽까지 포함되기에 이른다. 결국 시황제는 장성을 쌓음으로써 자신을 끝으로 한족 문명권의 문을 닫아건 셈이다. 그 구분에 따르면 장성의 한참 바깥에 있는 한반도는 당연히 오랑캐가 되지만, 역대 한족 왕조들이 적대시한 오랑캐는 주로 북방의 몽골계 민족들이었고 한반도는 중국에 사대하는 특수한 오랑캐였다. 한족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묘한 관계는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사실 한반도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이 탄생하고 활발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혼란과 분열에 힘입은 바 크다. 일찍이 한나라라는 강력한 통일제국이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4군에 눌려 고대국가 체제조차 이루지 못한 게 그 증거다. 4세기에 초반 고구려가 낙랑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후반에 랴오둥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이 동아시아의 구심점 노릇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희대의 정복군주가 때마침 출현한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어차피 인물이 시대를 만들기보다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게 옳다고 보면 그도 역시 그런 시대였기에 정복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중국에서 3세기와 같은 분열상이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아마 고구려는 비록 위나라와 고전을 치렀겠지만 오히려 더 큰 팽창의 계기를 맞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진이 예상 외로 420년까지 100년 이상 존속하면서 남북조로 분열된 시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정을 되찾은 탓에 고구려의 팽창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 뒤를 이은 남조의 나라들 , , , 은 대부분 50년을 넘기지 못한 단명 왕조였다. 그럼 420년 동진이 몰락한 이후 중국의 안정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그 주역이 바로 선비족이 세운 북위다. 분열기 초반 극에 달한 혼돈을 수습하고 386년에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534년까지 무려 150년간 존속하면서 북중국의 중심으로 역할했던 것이다.

 

게다가 북위는 그냥 명패만 유지했던 게 아니라 오랑캐 제국답지 않게 뛰어난 제국 운영의 솜씨를 보였다. 전진과 후연을 물리치고 화북의 패권을 잡은 직후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랴오둥 소유권을 공인해주면서 수교를 맺은 것도 그 중 하나다. 당시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에 있었으므로 북위로서도 정면 대결을 벌일 경우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북위는 계속 이민족 왕조의 개성만 고집해서는 어지러운 판국에 오래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추진한 게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이다. 비록 건국 초기에는 선비 부 족장들의 권위를 무시한 탓으로 황제가 암살되는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효문제(孝文帝)에 이르러 그 정책은 빛을 보았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효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여 국력 배양에 큰 성과를 낸다(나중에 13세기 원나라나 17세기 청나라의 경우에서도 확인되지만 북방 민족의 한화 정책은 이민족 왕조가 장기 존속하기 위한 필수 관건이 된다). 그가 재위한 5세기 후반 30년은 마침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집권 말기와 겹치면서 화북과 한반도에 두루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경쟁적인 중국 수교 어느 정도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은 경쟁적으로 중국의 남북조 왕조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당시 남조의 양 나라는 주변 여러 나라들에서 보낸 사신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해설을 붙여놓았는데, 오늘날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림은 백제의 사신이다.

 

 

만약 북위가 그 전성기에 남조까지 정복해서 대륙의 통일을 꾀했더라면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효문제(孝文帝)는 한반도에서 남진정책을 편 장수왕(長壽王)에게서 별로 자극을 받지 않은 듯하다. 워낙 넓은 대륙이라 한반도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판단이었을까? 그러나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만 연장을 얻을 수 있다. 효문제의 시대에 번성했던 북위는 그 이후 급격히 약화된다. 이런 북위의 쇠퇴는 중국에서는 물론이지만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분열기치고는 비교적 오랜 기간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구심점을 이루었기에 북위에서 불기 시작한 대륙풍의 변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만들어낸다.

 

우선 즉각적인 결과는 중국의 다원화다. 중국은 다시 분열기의 초기인 3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대륙풍의 방향은 따뜻한 남쪽이다. 말이 북조의 왕조일 뿐 남조에게까지 조공을 받을 만큼 강성했던 북위가 힘을 잃자 남조가 살아났으며, 그에 따라 고구려에 눌려 대중국 외교를 펼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백제가 다시 전통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남중국에 접근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512년 양나라에 조공하면서 웅진 천도 후 처음으로 중국과 수교한 것은 그런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장수왕(長壽王) 시절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꼬박꼬박 사신을 보내 조공하던 고구려도 슬슬 남조의 양나라를 챙기기 시작한다. 고구려와 돈독한 우호를 유지해 온 북위로서는 물론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다. 그로 인한 말기적 증상일까? 장수왕 때도 고구려와 남조 간에 이따금씩 이루어지는 사신 왕래를 저지하지 않았던 북위는 급기야 520년에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의 책봉 서신을 가지고 가는 양나라 사신을 수도인 뤄양으로 압송하기까지 하는 조급증을 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위에 정나미가 떨어진(아니면 북위가 몰락하리라는 낌새를 알아차린) 고구려는 양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를 급격히 늘린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다원화의 새 시대를 맞아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신라다. 초기의 혼돈기, 그리고 북위가 가져온 안정기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도약했다면, 이제 새로 다가온 혼돈기를 맞아 그 도약의 바통은 신라가 이어받는다. 때마침 나제동맹(羅濟同盟) 덕분에 신라는 꿀맛 같은 번영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양나라에 가는 백제 사신을 따라가서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루트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제 신라도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대륙풍의 변화는 신라를 위한 변화다. 500년에 왕위에 오른 신라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생각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백제사의 흔적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이다. 야구장 홈플레이트보다 약간 작은 돌에 무령왕의 이름(사마왕)과 죽은 연월일, 매장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전혀 도굴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는 그만큼 후대에 백제 역사가 관리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2의 건국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지 500년 이상이 지나도록 신라는 기나긴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그 오랜 시절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백제와 지난한 다툼을 벌였고 동해안을 수시로 침범하는 왜구에 시달렸는가 하면 고구려의 속령이 되는 경험까지 겪었다. 또 그런 가운데서도 꾸준히 강역을 늘리고 외부로부터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신라의 부족국가적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물왕(奈勿王) 이전까지 400여 년 동안 왕계조차 고정되지 못했다는 게 그 단적인 사례다.

 

이렇듯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처지게 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선진적인 대륙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라가 일찍부터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이루었던 것처럼 후대에 알려지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삼국사기덕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짜 삼국시대의 출발은 5세기 중반 장수왕(長壽王)의 압박 정책으로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는 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백제를 통해 신라는 뒤늦게나마 중국 문명을 수입하게 된다.

 

몰락한 백제와 하향평준화를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위상이 강화된 신라는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커다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그런 시점에서 즉위한 지증왕은 상황에 어울리는 뛰어난 순발력을 보였다. 건국 이래 가장 대규모로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한 것이다. 우선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자신의 호칭이다. 그 전까지 사용해 오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호칭은 알고 보니 원시 부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이름일 따름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첨단 문명의 바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중국의 천자를 제외한 천하 각지의 수령은 모름지기 왕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공식 직함을 왕으로 정한다(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 우리는 신라의 경우에도 편의상 왕이라는 호칭을 썼으나 실제 신라의 은 지증왕이 최초다), 그 덕분에 그는 마립간으로 즉위해서 왕으로 치세를 마친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왕 이름이 문제되었으니 그 다음은 나라 이름이 개혁 대상이다. 그 전까지 신라는 신라라는 이름 이외에도 사로, 사려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했는데박혁거세가 건국할 당시의 이름은 서라벌(혹은 서나벌, 서야벌, 서벌)이었다. 여기서 이란 성읍이나 도시를 뜻하는 고대어인데, 후대에 가면서 이 말이 탈락되어 사로, 사려, 신라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서라, 서나, 사로, 사려 등은 모두 를 뜻하는 나라또는 벌판을 뜻하는 가 합쳐진 말이므로 대략 윗나라넓은 나라라는 뜻이다.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지증왕조의 기사에 신라 대신의 말을 빌려 신라의 새롭다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신라라는 이름이 신라에 한자가 도입되기 전부터 사용해 온 것을 감안하면 한자의 뜻으로 이름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김부식의 잘못이 아니라 그가 참조한 신라 사서의 잘못일 수도 있겠지만, 김부식이 이두문에 무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긴, 당대의 대유학자가 어찌 이두 같은 조잡한 문자 체계에 관심을 가졌으랴?, 무릇 한 나라의 이름이 여러 가지라면 누가 봐도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 없다. 비록 그 이름들이 모두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뜻만이 아니라 표기도 통일되어야 한다(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이 무렵부터 신라는 한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국가 문서도 작성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증왕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라라는 이름으로 통일한다. 이렇게 해서 국가와 국왕의 명칭이 확정되었으니 사실상 신라는 이때 새로 건국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증왕의 개혁 드라이브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악습인 순장의 풍습을 폐지하는데, 이건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한 것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조치다. 신라의 순장 풍습은 국왕이 죽었을 경우 남녀 다섯 명씩을 함께 매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철저했던 시기에 지증왕이 그런 결심을 굳힌 것은 실로 대단히 용기있고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게다가 그는 소를 이용하여 논밭을 경작하는 우경(牛耕)을 최초로 도입하는가 하면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우산국, 즉 지금의 울릉도를 영토화하기도 했으니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이룬 팔방미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신라가 시대에 크게 뒤처졌다는 자각이 있었으리라.

 

개혁과 재건국의 열기는 그의 아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와서도 전혀 사그러들지 않는다. 지증왕의 개혁이 멀리서 바람에 실려오는 중국 문명의 냄새를 맡은 것이라면 법흥왕은 본격적인 중국화의 개혁을 추진한다. 520년에 율령을 제정하고 관직의 서열을 정한 게 그것이다. 이어 이듬해에는 직접 첨단 문명을 직수입하는 루트를 개척한다. 백제의 사신이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갈 때 신라의 사신을 딸려보낸 것이다. 양나라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에는 당시 백제 사신이 신라 사신의 통역까지 해주었다고 전하니, 이것 역시 그 무렵부터 신라가 문자(한자)를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렇게 내부를 정비한 뒤 법흥왕은 대외 사업으로 손을 뻗친다. 고대국가의 성장 지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토 확장인데, 신라로서 영토를 늘리려면 남진밖에 없다. 그래서 남쪽의 가야를 정복하는 프로젝트가 입안된다. 522년 법흥왕은 대가야와 통혼을 이용해서 동맹을 맺어 기반을 구축한 다음, 10년 뒤에는 본가야(금관가야)를 복속시켰다. 물론 말로 안 되면 군사력을 동원해야겠지만,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본가야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식솔들과 보물들을 가지고 함께 투항해 온 덕분에 복속 작업이 한결 쉬워졌다. 손대지 않고 코를 푼 법흥왕은 구해의 아들 김무력(金武力)에게 관직을 주어 후대하는데, 그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장차 신라가 반도의 주인으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무력은 신라로 귀화한 이후 신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김유신(金庾信, 595~673)이라는 손자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당대 법흥왕의 최대 개혁 성과는 불교의 수입이다. 사실 불교는 이미 수십 년 전인 눌지왕(訥祗王) 때부터 신라에 들어와 있었다. 당시 신라의 시각에서 유일한 선진국은 신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던 고구려였으므로 고구려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무렵 고구려의 승려인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와서 왕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했는데, 아마 그의 전도 사업은 신통치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눌지왕의 딸이 중병에 걸렸을 때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불경을 읊어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신라 왕실에서는 이때부터 불교를 믿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세를 위한 보험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내세에서의 삶을 대비해 병사나 하인을 순장시키는 것은 고대 세계의 보편적 관습이었다. 하지만 아주 지독한 지배자가 아니라면 대개 실제 사람을 순장하지 않고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진흙 인형을 묻었다. 중국 진 시황제의 병마용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실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불교가 퍼지는 것이다. 극동의 불교는 대부분 호국불교였으므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환영이지만 신라 귀족들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지증왕 때부터 제2의 건국을 추진하면서 개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들은 한편으로 나라가 선진화되는 게 싫지 않으면서도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심정일 수밖에 없다. 국왕과 국가의 명칭을 확정하는 문제,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 등에 관해서는 찬성과 지지를 보낼 수 있으나 자신의 국가관과 인생관까지 영향을 미치는 목을 베었고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 불교의 문제라면 마냥 동의하기 어려운 처지다. 더구나 전통적인 무속 신앙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는 데도 머리를 박박 밀고 이상한 옷을 입은 승려가 괴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는 신흥 종교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귀족들은 마지 못해 불교 장려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실행에 옮기는 데는 주저한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 이차돈(異次頓, 506~527)이라는 젊은이다. 어릴 때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귀족들이 불교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법흥왕에게 자신을 죽여 불교를 일으키는 데 이용하라고 권한다. 갓 스물의 청년다운 패기일까? 법흥왕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지만 이차돈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의 결심은 절을 짓는 것, 그러나 절은 당시 불법이었으니 그의 행위는 일부러 죽을 죄를 짓는 격이다. 그러자 왕은 그의 목을 베었는데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솟구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의 귀족들은 앞다투어 불교로 전향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에는 사기극의 냄새가 농후하다. 물론 이차돈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는 것은 믿을 수도 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목을 베는 것을 보면 법흥왕은 적어도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다음 시나리오에 따라 기적을 조작한 게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불교의 도입으로 법흥왕은 모든 개혁을 완료했다. 마음이 상한 귀족들을 위로할 겸해서 신라의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을 비롯하여 관제 신설을 마무리한 다음 536년에 그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연호까지 제정하는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바로 그런 것일 터이다앞서 말했듯이 달력(역법)과 연호는 독립국의 상징이므로 이제 비로소 신라는 당당한 왕국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세계의 대부분이 서양의 달력(서기)을 쓰니까 달력의 존재를 당연시하지만, 사실 공통적인 달력이 없을 때는 나라마다 연도를 셈하는 기준이 달랐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현직 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테면 서기 536년을 법흥왕 23년이라고 하는 식이다. 물론 중국에서 비롯된 전통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의 즉위를 기준으로 연도를 셈했으니 세계사적으로 보편적인 역법인 셈이다. 참고로 서기 2000년은 단군기년(檀君紀年)으로는 4333년이고, 공자기년(孔子紀年)으로는 2551년이며, 불기(佛紀)로는 2544, 이슬람력으로는 1379, 북한에서 현재 사용하는 주체력으로 따지면 89년에 해당한다(일본도 공식적으로는 아직 천황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이른바 새천년이란 서양식 달력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일 뿐이다. 최초의 연호답게 그 연호는 건원(建元, ‘기원을 세운다’)이었고, 그가 죽은 뒤 신하들은 처음으로 불교를 도입한 왕답게 그에게 법흥(法興, 여기서 법이란 불법을 뜻한다)이라는 묘호를 선사했다.

 

 

종교와 기적 무릇 신흥 종교가 뿌리를 내리려면 적절한(?) 기적이 필요한 법이다. 사진은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차돈의 순교 공양비다. 그는 원래 박씨로 왕족의 후예였고 법흥왕의 측근이었으니, 아무래도 그가 보여준 기적에는 사기극의 냄새가 풍긴다. 물론 그의 순교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만 거기에는 아마도 법흥왕의 사전 밀약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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