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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유교왕국의 완성 - 3장 팍스 코레아나,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4군6진, 경원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7부 유교왕국의 완성 - 3장 팍스 코레아나,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4군6진, 경원부)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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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

 

 

세종이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어내려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서 불편한 적이 한두 해도 아닌데 하필 그 무렵에 한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이유는 백성에게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훈민정음의 뜻 그대로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첫 구절을 보면 한글을 만든 분명한 취지가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리라[나랏ᄊᆞ미듀ᇰ달아ᄍᆞᆼ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런젼ᄎᆞ어린ᄇᆡᆨ셔ᇰ니르고호ᇙ이셔ᄆᆞᄎᆞᆷ제ᄠᅳ시러펴디ᄒᆞᇙ노하니ᄅᆞᆯᄒᆞ엿비너겨여듧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ᄅᆞᆷ마ᄒᆡᅇᅧᄫᅵ니겨ᄡᅮ便ᅙᅡᆫ킈ᄒᆞ고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우선 분명한 사실은 세종이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글이 생겨나기 전, 그러니까 이두를 사용할 때는 말과 글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얼핏 생각하면 대단히 불편했을 듯싶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문자란 기본적으로 일부 지배층이나 식자층만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중국과 달라서불편을 느끼는 건 세종의 말마따나 어리석은 백성일 뿐, 실제로 문자를 사용해야 하는 학자나 지배층은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는 데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은 장차 문자 지식을 모든 백성이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의 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군주를 넘어 시대를 앞서가는 첨단군주 세종의 면모다.

 

그러나 세종의 그런 충정을 인정한다 해도 한글 창제의 목적이 단순히 백성들을 위한다는 데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시민사회가 도래하기 전인 왕조사회에서 군주가 오로지 백성을 위해 뭘 하겠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럼 한글을 창제한 데는 또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사실 한글 창제는 앞서 독자적인 농학서와 의학서를 개발한 것과 흐름을 같이 하는 기획이다. 우리말이 중국어와 다르다는 게 훈민정음의 직접적인 제작 동기였듯이 세종은 중국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마련이다. ……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각기 다르므로 말도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 우리 동방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은 중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으나 다만 방언과 속된 말만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문서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 吾東方禮樂文章,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조선의 건국 세력이었다면 아마 조선의 문명 수준이 중국에 못지 않다는 말은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사대부라 해도 개국공신 사대부와 국왕 직속 사대부는 이미 성격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종도 역시 중국에 대한 사대라는 기본 노선에서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지만(한 예로 세종은 국왕과 세자의 책봉에서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얻는 절차를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조선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서 자리 매김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주체적인 사대주의라고 할까? 이 점은 천문학을 장려한 데서 더 확실히 드러난다.

 

 

1432년 세종은 장영실(蔣英實)을 시켜서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게 하고, 2년 뒤에는 역시 장영실에게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을 이용한 자동시보장치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444년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이라는 두 권의 역서(曆書)를 편찬한 사실이다. 이 역서들은 비록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을 참조한 것이지만 방법론만 차용했을 뿐 그 내용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대폭 수정한 것이다(이를테면 일식과 월식, 일출과 일몰 시간의 기준을 한양으로 정하고 있다).

 

한반도 역사상 천체를 직접 관측하고 독자적인 역서를 발간한 건 이번이 최초다. 그런데 천체의 운행을 살피고 역법을 계산하는 일은 원래 중국의 황제, 즉 천자에게만 허용된 특권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천자는 매년 초 조공을 바치러 온 주변 속국들의 사신에게 자랑스럽게 그 해의 역서를 하사하는 게 오랜 전통이자 사대관계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었던가? 이런 신성한(?) 작업을 독자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은 세종이 의식적으로 탈중국화의 노선을 걷고자 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그것은 유교제국(중국의 명나라)과 적절한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상대적인 자립을 누리는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이다. 외교권과 군사권은 중국에 위임하고 내치에 관한 권리는 독자적으로 유지하는 조선 특유의 사대주의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아마 세종은 즉위 초부터 이런 관계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고려 말부터 큰 부담이 되어온 금과 은의 조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탄원한 끝에 조공품을 금과 은 대신 특산물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역시 고려 말부터 각종 사회적 폐단을 빚어온 환관과 처녀의 진공(進貢)을 폐지하는 문제도 명과 합의를 보았다명나라의 환관 수입이 많은 이유는 중국 역사상 어느 왕조보다도 환관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사대부 세력이 황권에 도전할 만큼 커지자 명 황실에서는 환관을 양성해서 황제 직할대로 삼아 사대부를 제어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유명한 동창(東廠)은 바로 환관들로 이루어진 사대부 감시기관이다(지금으로 말하면 국가정보원을 환관들로 꾸린 셈이랄까?). 이렇게 환관이 득세하다 보니 명나라에 간 조선 출신의 환관들도 사신의 자격으로 귀국해서는 조선 정부에 자기 친척을 관직에 임명해 달라고 압력을 넣는 등 함부로 권세를 휘둘러 사회적 물의가 컸다. 처녀 진공 역시 폐단이 많았다. 처녀를 중국에 보낼 때는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후보들을 선발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집집마다 딸을 서둘러 시집보내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겼다. 따라서 환관과 처녀 진상은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문제였다. 사대의 큰 틀은 유지하되 아무리 상국이라 해도 요구할 것은 요구한다는 자세다. 이런 중국에 대한 자주적 노선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북부 영토의 개척이다.

 

 

해시계와 물시계 위쪽은 앙부일구, 아래쪽은 자격루다. 이렇게 세종 때 각종 시계가 제작된 이유는 그 무렵에 갑자기 시간을 재야겠다는 필요성이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문물과 제도를 중국에 의존하던 관행이 사라지고 주체적인 관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마 세종은 당시에 이미 환관 정치의 폐해를 보이던 명나라가 부실한 제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멀게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로, 가깝게는 고려 중기 여진의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은 이래로 한반도 북부는 사실상 한반도 왕조들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다. 급기야 몽골 지배기에는 동녕부(東寧府)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면서 공식적으로 원나라의 영토가 되기도 했으니 조선시대에 이르면 말할 것도 없다. 비록 몽골이 물러갔어도 이 지역은 만주와 함께 여전히 여진의 텃밭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런 사실은 금나라가 무너진 이후 여진의 여러 부족들 간에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개국 초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일은 있었으나, 사실상 명나라도 이 지역을 영토로 거느릴 입장은 못 되었고 또 그럴 의사도 없었으니 이곳은 정치적 공백지이자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 대한 초기 조선 정부의 정책은 그저 어르고 달래는 것이었다. 1410년 태종이 두만강 하류 지역에 경원부라는 무역소를 설치한 게 바로 그런 전략이다흔히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 여진과 교린하는 것을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부르며 조선의 고유한 외교 정책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조선은 사대의 의무만 다했을 뿐 교린의 대가는 얻지 못했다. 이 점은 무역의 측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 중국과의 무역은 조선이 조공을 보내면 중국이 회사(回賜)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양으로나 질로나 무역 역조는 피할 수 없다. 또한 교린 무역의 경우에도 조선은 이득을 얻고자 하기보다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여겼으니 대차대조표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세종은 1426년 왜구의 노략질을 정식 무역으로 만들기 위해 울산, 부산, 진해의 3포를 개항했는데, 이것 역시 회유책에 불과할 뿐 경제적으로는 손해였다(더구나 조선이 교류한 일본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쓰시마일 뿐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는 했으나 조선은 일본의 실력자인 바쿠후幕府와 직접 수교한 게 아니라 쓰시마 도주島主를 매개로 해서 교류했다. 조선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일본이란 대부분의 경우 쓰시마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진은 허가된 교역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경원부를 집중적인 공략 목표로 삼는다. 결국 1425년에 세종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기로 한다. 대다수 군신들은 오히려 후퇴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윤관(尹瓘)9성이 실패한 이래로 한반도 정부의 기본적인 북부 정책을 답습한 결과다. 이에 대해 세종은 강경책을 주장한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의견을 좇아 북진 개척을 명한다. 과연 왕의 기대에 부응해 김종서는 1433년 두만강 하류에 6진을 구축했고, 이후 10여 년 동안 인근 백성들을 이주시켜 두만강을 확실한 조선의 동북부 국경선으로 만든다. 또한 그 무렵 세종은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을 보내 압록강 중류에 4군을 설치함으로써 서북부 국경선도 압록강으로 확정한다. 고구려 멸망 이래 한반도 왕조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반도를 영토로 고구려가 무너진 이래 한반도 왕조들은 사실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세종이 6진과 4군을 개척하게 한 것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고려시대에도 이따금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까지 영토를 넓힌 적은 있었지만 적극적인 사민정책을 통해 이 지역을 확고히 영토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무혈 쿠데타

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

문자의 창조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

세종이 뿌린 악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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