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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유교왕국의 완성 -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호패, 실록)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7부 유교왕국의 완성 -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호패, 실록)

건방진방랑자 2021. 6. 1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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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

 

 

2의 건국자답게 태종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다방면으로 폭넓은 치적을 남겼다. 그것도 중앙관제나 지방 행정제도, 군제, 토지제도 등과 같은 굵직한 하드웨어의 정비 작업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섬세하면서 창발적인 솜씨를 보였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사대부 세력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도 역시 유학 이념을 지향하는 군주였다(다만 국왕 중심의 유교왕국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념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을 강화하고 지방의 향교(鄕校)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패(號牌)를 도입해서 유민을 방지하는 등 철의 군주답지 않은 모습도 선보였다물론 신문고나 호패가 반드시 백성들의 삶에 이득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신문고는 1402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백성들이 마음대로 직접 두드릴 수 있는 북이 아니라 정식 재판을 거친 뒤에도 억울한 점이 있을 때 담당 관리에게 의뢰해서 두드리는 북이었다. 게다가 일반 백성이 상급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에는 이용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으니 순전히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호패는 국가가 세 수입을 위해 백성을 관리한다는 측면이 강했으므로 이것 역시 순수한 국가의 시혜는 아니다.

 

태종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역사서가 편찬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근에게 명해서 단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책으로 정리하게 한 것은 고려사와 더불어 조선 이전까지의 한반도 전체 역사를 문헌화하려는 노력이다.

 

그 결과물이 삼국사기보다도 더 심하게 사대주의적이고 신라중심적이고 성리학적인 관점에다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심각하게 오염된 문헌이라는 사실은 실망스럽지만, 아마 태종은 원나라 시대에 간행된 중국 역대 왕조의 약사(略史)십팔사략(十八史略)의 한반도 버전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1408년에 태조 이성계가 죽자 태종은 즉각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게 했다. 왕이 바뀌면 전 왕의 치세를 실록으로 정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태종의 태도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급했다. 그러나 군신의 반대에도 태종은 뜻을 관철시켜 장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첫째 편이 될 문헌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의 시대를 빨리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그보다는 아마 자신의 치세에 아버지의 실록을 편찬해야만 자신의 쿠데타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은 탓이리라.

 

 

조선시대의 ID카드 조선이 고려보다 민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났다는 것은 호패(사진)에서 증명된다.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이라 할 호패에는 이름과 직업, 신분 등 인적 사항들이 명기되어 있었다. 16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지급된 데서 보듯이 호패는 국가가 백성을 세 수입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렇듯 각종 프로젝트가 추진됨으로써 태종의 시대에 비로소 조선은 명실상부한 왕국의 풍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역사적위업은 그것에 있지 않다. 물론 왕권다툼으로 한동안 지연되었던 조선의 건국사업에 박차를 가한 것도 적지 않은 공로지만 그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데 있다. 자신의 시대에 건국사업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왕위계승으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다시 재현되는 사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걸까?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그 두 가지 사항을 다 고려했을 것이다.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그의 셋째 아들 이도(李祹, 1397~1450, 충녕대군)는 아버지의 지원으로 순조롭게 왕위에 올라 건국의 마무리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50)이다.

 

우리 역사에서 흔히 대왕으로 불리는 임금, 오늘날 서울 도심의 거리 이름에 시립 문화회관, 사립 대학교, 심지어 남극대륙에 설치된 국립 과학기지에까지 두루 이름이 올라 있는 세종은 우리 역사상 누구보다 큰 존경과 인기를 누리는 임금이지만, 사실 그의 즉위 과정에는 장차 조선 왕조 전체를 관통하게 될 모순이 개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유교왕국의 모순이다.

 

세종이 셋째 아들이라면 형이 둘이라는 이야긴데, 여기에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사실 그 자신이 형제 서열을 거스르고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를 거쳐 왕위에 오른 만큼 태종은 이제부터라도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1404년에 일찌감치 열 살배기 맏이인 이제(李禔, 1394~1462, 양녕대군)를 세자로 책봉했는데,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사냥과 풍류를 즐기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양녕대군은 아무래도 왕통을 정상화하고 새 왕조를 안정시킬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만한 후계자감이 못 되었던 것이다. 여러차례 이들을 타이르고 벌을 주기도 하면서 사람(?)을 만들어보려 애쓰던 태종은 이윽고 포기하고 1418년에 셋째인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했다.

 

기록은 이상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서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두 번 다시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게 태종의 굳은 각오였다. 만약 또 다시 왕자의 난 같은 게 벌어진다면 갓 건조된 조선 호는 항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침몰해 버릴지 모른다. 그런데 재위 기간 내내 그런 위기를 우려했던 그가 세자를 셋째로 바꾸는 과정을 그렇듯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둘째인 이보(李補, 1396~1486, 효령대군)까지 건너뛰고?

 

 

양녕대군이 분방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군주적 자질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품성을 가진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더라면 아버지 태종이 18년 동안 다져 놓은 튼튼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층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치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에게 군주적 자질이 모자란다는 말은 그가 일반적인 군주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의 군주, 즉 유교적 군주감이 못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냥을 좋아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는 취미는 아무래도 엄격한 유교적 제왕의 법도와는 무관한 자질일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 태종이라기보다 바로 사대부들이었을 것이다이 점을 분명히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문귀라는 신하를 시켜 세자 교체의 결정을 양녕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태종은 이렇게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토록 뉘우치라고 했건만 너는 어찌해서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 백관들의 청에 못 이겨 부득이 그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화를 자초했으니, 너와 나는 부자 관계지만 또한 군신의 도리가 있다.’ 양녕에게 폐위 소식을 전하고 돌아온 문귀에게 태종은 양녕이 슬퍼하더냐고 묻는다. 문귀가 그렇지 않더라고 대답하자 태종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니라.’ 태종은 양녕의 잘못이 평소에 신료(臣僚)들의 마음에 들게 처신하지 않은 데 있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자 교체를 먼저 계획한 것은 태종이 아니라 군신들이었다. 14186월 양녕대군이 개성에 가 있는 틈을 타 그들은 태종에게 세자의 평소 행동거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들의 거센 압력에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게 된 태종은 처음에 양녕의 아들을 대체 후보로 떠올렸다. 열 살도 안 된 어린 손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 정상적인 장자 계승 원칙을 따르려는 그의 의지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도 반대에 부딪히자 태종은 충녕을 제안했고, 그제서야 신료들은 우리 생각도 그랬다면서 맞장구를 친다(둘째인 효령은 태종과 신료들 모두 성품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제쳐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맏이인 양녕을 폐위한 마당에 둘째를 건너뛰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양녕은 원래부터 왕위에 별 관심이 없어 아버지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청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떠했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무 백관이 세자의 교체까지 건의하고 그 뜻을 관철시킬 만큼 발언권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양녕의 자질을 물고 늘어지면서 (더구나 양녕이 당시 병조판서인 김한로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는 것에 위기감도 느꼈을 것이다) 태종에게 압력을 가했고 마침내 현직 왕의 이름으로 차기 왕을 교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태종으로서는 개국 이래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는 정도에 만족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들로서는 개국 이래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왕을 상대로 일종의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킨 셈이다. 이런 사실은 향후 조선의 성격, 아니 원래부터 있었던 조선의 모순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유교왕국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분해해 본다면 조선은 왕국이라는 정체성보다 유교라는 수식어에 더 충실한 왕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왕은 좋게 말해 군림하는 상징, 나쁘게 말해 허수아비이며, 사대부는 겉으로 국왕을 받들지만 안으로는 권력을 움켜쥔 실세로 처신하는 게 유교왕국이다. 따라서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이 새 세자로 임명되면서 이미 조선 왕조의 기본적 성격과 노선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왕은 하나지만 사대부는 다수이기에 유교왕국의 숙명적 모순은 오히려 이때부터 본격적 으로 발동하기 시작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무혈 쿠데타

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

문자의 창조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

세종이 뿌린 악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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