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7부 유교왕국의 완성, 3장 팍스 코레아나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7부 유교왕국의 완성, 3장 팍스 코레아나

건방진방랑자 2021. 6. 16. 18:45
728x90
반응형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

 

 

2의 건국자답게 태종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다방면으로 폭넓은 치적을 남겼다. 그것도 중앙관제나 지방 행정제도, 군제, 토지제도 등과 같은 굵직한 하드웨어의 정비 작업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섬세하면서 창발적인 솜씨를 보였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사대부 세력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도 역시 유학 이념을 지향하는 군주였다(다만 국왕 중심의 유교왕국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념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을 강화하고 지방의 향교(鄕校)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패(號牌)를 도입해서 유민을 방지하는 등 철의 군주답지 않은 모습도 선보였다물론 신문고나 호패가 반드시 백성들의 삶에 이득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신문고는 1402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백성들이 마음대로 직접 두드릴 수 있는 북이 아니라 정식 재판을 거친 뒤에도 억울한 점이 있을 때 담당 관리에게 의뢰해서 두드리는 북이었다. 게다가 일반 백성이 상급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에는 이용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으니 순전히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호패는 국가가 세 수입을 위해 백성을 관리한다는 측면이 강했으므로 이것 역시 순수한 국가의 시혜는 아니다.

 

태종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역사서가 편찬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근에게 명해서 단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책으로 정리하게 한 것은 고려사와 더불어 조선 이전까지의 한반도 전체 역사를 문헌화하려는 노력이다.

 

그 결과물이 삼국사기보다도 더 심하게 사대주의적이고 신라중심적이고 성리학적인 관점에다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심각하게 오염된 문헌이라는 사실은 실망스럽지만, 아마 태종은 원나라 시대에 간행된 중국 역대 왕조의 약사(略史)십팔사략(十八史略)의 한반도 버전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1408년에 태조 이성계가 죽자 태종은 즉각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게 했다. 왕이 바뀌면 전 왕의 치세를 실록으로 정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태종의 태도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급했다. 그러나 군신의 반대에도 태종은 뜻을 관철시켜 장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첫째 편이 될 문헌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의 시대를 빨리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그보다는 아마 자신의 치세에 아버지의 실록을 편찬해야만 자신의 쿠데타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은 탓이리라.

 

 

조선시대의 ID카드 조선이 고려보다 민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났다는 것은 호패(사진)에서 증명된다.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이라 할 호패에는 이름과 직업, 신분 등 인적 사항들이 명기되어 있었다. 16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지급된 데서 보듯이 호패는 국가가 백성을 세 수입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렇듯 각종 프로젝트가 추진됨으로써 태종의 시대에 비로소 조선은 명실상부한 왕국의 풍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역사적위업은 그것에 있지 않다. 물론 왕권다툼으로 한동안 지연되었던 조선의 건국사업에 박차를 가한 것도 적지 않은 공로지만 그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데 있다. 자신의 시대에 건국사업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왕위계승으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다시 재현되는 사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걸까?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그 두 가지 사항을 다 고려했을 것이다.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그의 셋째 아들 이도(李祹, 1397~1450, 충녕대군)는 아버지의 지원으로 순조롭게 왕위에 올라 건국의 마무리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50)이다.

 

우리 역사에서 흔히 대왕으로 불리는 임금, 오늘날 서울 도심의 거리 이름에 시립 문화회관, 사립 대학교, 심지어 남극대륙에 설치된 국립 과학기지에까지 두루 이름이 올라 있는 세종은 우리 역사상 누구보다 큰 존경과 인기를 누리는 임금이지만, 사실 그의 즉위 과정에는 장차 조선 왕조 전체를 관통하게 될 모순이 개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유교왕국의 모순이다.

 

세종이 셋째 아들이라면 형이 둘이라는 이야긴데, 여기에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사실 그 자신이 형제 서열을 거스르고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를 거쳐 왕위에 오른 만큼 태종은 이제부터라도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1404년에 일찌감치 열 살배기 맏이인 이제(李禔, 1394~1462, 양녕대군)를 세자로 책봉했는데,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사냥과 풍류를 즐기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양녕대군은 아무래도 왕통을 정상화하고 새 왕조를 안정시킬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만한 후계자감이 못 되었던 것이다. 여러차례 이들을 타이르고 벌을 주기도 하면서 사람(?)을 만들어보려 애쓰던 태종은 이윽고 포기하고 1418년에 셋째인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했다.

 

기록은 이상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서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두 번 다시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게 태종의 굳은 각오였다. 만약 또 다시 왕자의 난 같은 게 벌어진다면 갓 건조된 조선 호는 항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침몰해 버릴지 모른다. 그런데 재위 기간 내내 그런 위기를 우려했던 그가 세자를 셋째로 바꾸는 과정을 그렇듯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둘째인 이보(李補, 1396~1486, 효령대군)까지 건너뛰고?

 

 

양녕대군이 분방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군주적 자질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품성을 가진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더라면 아버지 태종이 18년 동안 다져 놓은 튼튼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층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치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에게 군주적 자질이 모자란다는 말은 그가 일반적인 군주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의 군주, 즉 유교적 군주감이 못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냥을 좋아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는 취미는 아무래도 엄격한 유교적 제왕의 법도와는 무관한 자질일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 태종이라기보다 바로 사대부들이었을 것이다이 점을 분명히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문귀라는 신하를 시켜 세자 교체의 결정을 양녕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태종은 이렇게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토록 뉘우치라고 했건만 너는 어찌해서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 백관들의 청에 못 이겨 부득이 그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화를 자초했으니, 너와 나는 부자 관계지만 또한 군신의 도리가 있다.’ 양녕에게 폐위 소식을 전하고 돌아온 문귀에게 태종은 양녕이 슬퍼하더냐고 묻는다. 문귀가 그렇지 않더라고 대답하자 태종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니라.’ 태종은 양녕의 잘못이 평소에 신료(臣僚)들의 마음에 들게 처신하지 않은 데 있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자 교체를 먼저 계획한 것은 태종이 아니라 군신들이었다. 14186월 양녕대군이 개성에 가 있는 틈을 타 그들은 태종에게 세자의 평소 행동거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들의 거센 압력에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게 된 태종은 처음에 양녕의 아들을 대체 후보로 떠올렸다. 열 살도 안 된 어린 손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 정상적인 장자 계승 원칙을 따르려는 그의 의지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도 반대에 부딪히자 태종은 충녕을 제안했고, 그제서야 신료들은 우리 생각도 그랬다면서 맞장구를 친다(둘째인 효령은 태종과 신료들 모두 성품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제쳐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맏이인 양녕을 폐위한 마당에 둘째를 건너뛰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양녕은 원래부터 왕위에 별 관심이 없어 아버지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청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떠했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무 백관이 세자의 교체까지 건의하고 그 뜻을 관철시킬 만큼 발언권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양녕의 자질을 물고 늘어지면서 (더구나 양녕이 당시 병조판서인 김한로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는 것에 위기감도 느꼈을 것이다) 태종에게 압력을 가했고 마침내 현직 왕의 이름으로 차기 왕을 교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태종으로서는 개국 이래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는 정도에 만족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들로서는 개국 이래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왕을 상대로 일종의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킨 셈이다. 이런 사실은 향후 조선의 성격, 아니 원래부터 있었던 조선의 모순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유교왕국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분해해 본다면 조선은 왕국이라는 정체성보다 유교라는 수식어에 더 충실한 왕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왕은 좋게 말해 군림하는 상징, 나쁘게 말해 허수아비이며, 사대부는 겉으로 국왕을 받들지만 안으로는 권력을 움켜쥔 실세로 처신하는 게 유교왕국이다. 따라서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이 새 세자로 임명되면서 이미 조선 왕조의 기본적 성격과 노선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왕은 하나지만 사대부는 다수이기에 유교왕국의 숙명적 모순은 오히려 이때부터 본격적 으로 발동하기 시작한다.

 

 

 

 

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

 

 

결과적으로 보면 사대부의 선택은 옳았다.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세종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는 근거로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부지런하다는 것과 정치에 관한 큰 줄기를 안다는 것을 들었는데, 후자의 자질이 그의 즉위를 결정한 요소라면(그 말을 바꾸면 사대부와의 관계가 좋다는 뜻이니까) 전자의 자질은 즉위 후 그의 활약을 예고하는 요소다. 그래서 세종의 치세는 조선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대이자, 한반도 전체 역사로 보면 8세기 초반의 1, 11세기 중반의 2에 이어 세번째로 맞이하는 팍스 코레아나(Pax Koreana)’의 시대가 된다(그 세 차례의 번영기가 모두 50년을 넘지 못했다는 게 큰 아쉬움이지만), 더구나 앞선 두 차례의 번영기와는 달리 세종의 치세에서는 국왕 개인의 역량이 단단히 한몫했다는 점에서 가장 빛나는 번영기라 하겠다.

 

세자로 책봉된 지 불과 2개월 만인 1418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 세종은 우선 때맞춰 준공된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겨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결심을 분명히 한다. 사실 그는 개인적 역량도 출중하지만 모든 여건도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즉위하던 와 달리 왕위계승과 관련된 잡음이 전혀 없이 출발할 수 있다는 게 최대의 강점이다(여기에는 아버지와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게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개국공신이 없다는 것도 좋은 환경이다. 전을 위시하여 조준, 권근 등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따라서 발언권이 큰 공신들은 이제 죽고 없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즉위 초에 권력 안정으로 부심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본연의 업무인 통치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해도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종에게 필요한 것은 공신들처럼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으면서 충직하게 왕을 도와 국정을 처리해줄 관료 세력이다. 세종은 마침 개국 초부터 착실히 성장해 온 유학자 풀(pool)이 있으니 그들을 제도적으로 묶어주면 큰 힘이 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다. 집현전(集賢殿)을 활성화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현자들이 모인 집이라는 뜻이니 이름부터가 좋다. 집현전이라는 기구 자체는 고려 중기부터 있었으나 실제로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다). 사대부들에게 휘둘리던 전 왕들과는 달리 세종은 이제 거꾸로 사대부들을 직속 부대로 거느리고 조선의 마무리 건국 작업을 진두에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왕권과 신권(臣權)이 최적의 조화를 이루면서 유교왕국의 가장 바람직스런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유교왕국의 근본 모순은 일단 지연된다.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휘를 받는 집현전 학자들의 활약은 정말 눈부시다. 우선 유학의 경서들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법률, 의학, 문학, 예술, 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들이 집필되고 번역되어 간행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은 역시 왕조의 근본적 성격과 이념이다.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경제육전을 수정 보완해서 속육전(續六典)으로 간행한 것은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법제적 정비를 마무리하려는 작업이다. 또한 사대부적 관점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 정도전고려사변계량(卞季良, 1369~1430)에게 개찬하도록 한 것은 조선이 왕국 체제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나아가 불교를 선종과 교종 두개 종파로 정리하고 사찰 신축을 금지한 것은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임을 재차 천명한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정리하면 조선은 유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는 새 왕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세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조선 건국이 완료됐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세종은 단순히 감독자로서만 관여한 게 아니라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작업자들을 독려했고 때로는 실무까지도 담당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대에 나온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해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간행할 때는 50여 명의 집현전 학자들을 투입하고도 세종이 직접 교정까지 보면서 작업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하기야, 경연청(經筵廳) 건물을 새로 짓고 학자들과 스스럼없이 학문적 토론을 나눌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세종은 교정이 아니라 시간이 허락된다면 직접 저술까지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은 한반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문화군주였다(심지어 그는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했는데, 이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대학에서 무능한 교수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안식년이 주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다).

 

그런 만큼 그의 폭넓은 관심과 지식은 정치와 인문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은 뭐니뭐니해도 농업국가, 따라서 국왕이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 당연한 일을 전대의 왕들은 하지 못했지만). 세종의 명을 받아 1429년 드디어 정초(鄭招, ?~1434)농사직설(農事直說)을 저술하는데, 종합 농사 교과서라 할 이 책은 지금까지 전하는 농서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 전까지 한반도에서는 내내 중국의 농서들에 의존해오다가 이 책이 간행되면서 비로소 중국 농사법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 덕분에 이 책은 후대의 모든 농서들에 영향을 주면서 일본에까지 수출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간행된 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함께 통시대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향약집성방도 역시 농사직설과 마찬가지 맥을 따르고 있다. 즉 중국의 약재에 의존해 오던 관행을 탈피해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약재들을 총정리한 문헌이다. 단순히 약재만이 아니라 제약법, 각종 질병의 분류, 침술까지 두루 다루고 있으므로 이를테면 의학백과 대사전쯤 된다. 정치 이념이나 철학이라면 모르겠지만 농사법과 의약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지역마다 달리 적용되어야 하는 실용적 학문이라는 점에서 세종은 그 서적들의 출간이 시급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실용서까지도 유학자들이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말하는 유학이란 요즘식으로 말해서 특정한 학문 분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 중세에 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었듯이 조선시대에 유학은 특정한 학문의 이름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렇듯 세종 대에 서적 간행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데는 고려시대에 이미 인쇄술과 활자 제조술이 발달해 있었던 덕택이 크다. 유럽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만들었을 정도로 인쇄술이 발달했으나, 정작 그 활자를 이용한 서적 보급에는 거의 무관심했던 게 고려였다. 원래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라고 여기면서, 인쇄술이 개발되었어도 장서용역사서나 찍어서 서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던 동양의 전통에서이 점에서 서양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세종의 시대, 그러니까 15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지 50년도 못 되어 유럽 전역에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일반 민중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문자의 특성상 목판인쇄가 유리했고 또 실제로 일찍부터 목판인쇄술이 발달했으나 활판인쇄술에서도 동양이 앞섰다는 것은 당시 세계 문명의 판도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치가 사회의 모든 것을 장악한 동양에서는 인쇄술이 지배층의 도구로만 이용되면서 (예컨대 보관용역사서를 인쇄한다든가) 사실상 사장되고 말았다. 인쇄술과 함께 이른바 동양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나침반, 화약 등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으니, 여기서 동서양의 역관계는 역전된 것이다 세종은 농서나 의약서와 같은 실용서를 인쇄하여 보급하는 혁신적 사고를 지닌 군주였던 것이다.

 

 

출판 왕국 위쪽은 농사직설, 아래쪽은 향약집성방의 일부다. 원래 농학과 의학은 다른 어느 학문보다도 토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책의 간행은 세종 대의 획기적인 출판사업이었다. 게다가 이 책들은 후대에도 계속 내용이 보강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므로 조선의 통시대적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문자의 창조

 

 

문화군주 세종의 풍모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업적은 바로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숱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오늘날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까지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14469월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연다.

 

물론 한글이 없었을 때는 한자를 썼다. 또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고유의 말은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썼다(향가에서처럼 순수하게 한자의 음만을 빌려 문장 전체를 표기한 것을 향찰鄕札이라고 부르지만 이두와 같은 원리이므로 이두에 포함시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되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쓴 셈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은 교착어(膠着語)이고 중국어는 굴절어(屈折語)(쉽게 말해 교착어는 어근에 접두사나 접미사 같은 게 자유롭게 붙어서 이루어지는 말이며, 굴절어는 각 낱말들의 의미가 고정되고 분리된 성격이 강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 보니 문법에서도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글을 통해 완벽한 의사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다.

 

그래서 세종은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최항(崔恒, 1409~74), 신숙주(申叔舟, 1417~75), 성삼문(成三問, 1418~56) 등의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우리말에 어울리는 문자 체계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한다. 바야흐로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 나라의 글을 창조한다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무릇 문자란 원래 그림에서 출발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림이 추상화되어 기호가 되고 그 기호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결과로서 탄생하게 마련이다(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 알파벳의 원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등이 모두 그렇다). 따라서 지배 집단이 일정한 기간 동안 작업해서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그 문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다. 비록 일본의 가나(假名) 문자가 9세기에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이두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문자 기호가 기본적으로 한자를 단순화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게다가 만든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글만큼 완벽한 문자 창조라고는 볼 수 없다.

 

이 작업에서도 역시 세종의 개인적 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43년에 그는 직접 28개의 문자 기호를 만들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지는 한글의 기본 체계를 고안해서 학자들에게 연구의 방침을 정해주었다(훈민정음이라는 용어도 이때 만들어졌다). 3년 뒤 학자들은 28개 기호의 음가를 확정하고 용례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이것이 한글의 공식적 탄생인데, 이렇듯 생년월일이 명확한 문자 체계도 대단히 드물다문자까지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일이 가능했다는 것은 일찍부터 정치가 사회 전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여러 민족이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거란문자는 한글처럼 요()의 건국가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920년에 제정해서 공표한 문자였다. 또 몽골문자는 위구르문자에서 차용해서 만든 것인데, 한글이나 거란문자처럼 제정자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처럼 동아시아 민족들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문자가 아닌 창조된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정치적인 오리엔테이션이 강한 동양 역사의 특성을 말해준다. 유럽의 문자들 중에는 어느 것도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개인()이 만든 게 없다.

 

 

한자표기용 한글? 훈민정음의 첫 부분이다. 흔히 한글은 우리 문자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창제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원래는 한자의 발음기호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한자가 도입된 삼국시대 초기 이래 1천 년이 넘게 지나면서 한자의 발음이 중국과 많이 달라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어와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훈민정음의 유명한 첫 구절은 바로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하지만 만들어 놓고도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갓 태어난 훈민정음의 시운전은 집현전 학자들 중에서도 고참에 속하는 권제(權踶, 1387~1445)와 정인지, 안지(安止, 1377~1464)가 맡았다. 14세기에 출생한 노장파에 어울리게 1445년에 그들이 지은 최초의 한글 작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이성계의 조상들에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실의 인물들을 칭송한 시가다. 이듬해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68)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부처의 일생을 묘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었고, 여기에 세종은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어 화답한다. 이렇게 왕실과 사대부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한글은 그 해 말에 아전들을 뽑는 이과(吏科)의 과목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지속되었더라면 한글은 아마 일찌감치 조선의 국어로 자리잡았을 것이며, 머잖아 공문서를 작성하는 데까지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얼마 못 가서 사장될 운명에 처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 주범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왕권을 누르고 정치 권력의 중심에 복귀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한자 문화에 경도된 그들이 조선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한글은 멸시되고 공식 문자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닫히게 된다그 덕분에 지금 쓰는 한글이라는 이름도 실제 한글이 생겨난 지 400여 년이나 지나서야 탄생하게 된다. 처음 태어났을 때 훈민정음이라는 책 이름으로 불리던 한글은 나중에 언문(諺文)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속된 말, 상스런 말이라는 뜻이므로 한글은 처음부터 대단히 모욕스러운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최세진(崔世珍, ?~1542)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한글을 반절(反切)’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도 한글의 철자가 한자의 일부분이라는 뜻이므로 언문 못지 않게 치욕적인 이름이다(예를 들어 의 음은 덕홍德紅切이라고 하는데, ‘의 초성 을 따고, ‘의 중성과 종성인 ’, ‘을 따서 자의 음을 표기한다는 뜻이다). 1894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한글의 이름은 언문에서 국문으로 바뀌었다가 최초의 한글 전용주의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에 의해 처음 한글로 불리게 된다.

 

그나마 규방의 부녀자들이 아니었다면 한글은 전승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 때문에 한글은 한때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문자라는 이름까지 얻었지만.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

 

 

세종이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어내려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서 불편한 적이 한두 해도 아닌데 하필 그 무렵에 한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이유는 백성에게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훈민정음의 뜻 그대로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첫 구절을 보면 한글을 만든 분명한 취지가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리라[나랏ᄊᆞ미듀ᇰ달아ᄍᆞᆼ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런젼ᄎᆞ어린ᄇᆡᆨ셔ᇰ니르고호ᇙ이셔ᄆᆞᄎᆞᆷ제ᄠᅳ시러펴디ᄒᆞᇙ노하니ᄅᆞᆯᄒᆞ엿비너겨여듧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ᄅᆞᆷ마ᄒᆡᅇᅧᄫᅵ니겨ᄡᅮ便ᅙᅡᆫ킈ᄒᆞ고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우선 분명한 사실은 세종이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글이 생겨나기 전, 그러니까 이두를 사용할 때는 말과 글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얼핏 생각하면 대단히 불편했을 듯싶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문자란 기본적으로 일부 지배층이나 식자층만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중국과 달라서불편을 느끼는 건 세종의 말마따나 어리석은 백성일 뿐, 실제로 문자를 사용해야 하는 학자나 지배층은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는 데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은 장차 문자 지식을 모든 백성이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의 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군주를 넘어 시대를 앞서가는 첨단군주 세종의 면모다.

 

그러나 세종의 그런 충정을 인정한다 해도 한글 창제의 목적이 단순히 백성들을 위한다는 데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시민사회가 도래하기 전인 왕조사회에서 군주가 오로지 백성을 위해 뭘 하겠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럼 한글을 창제한 데는 또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사실 한글 창제는 앞서 독자적인 농학서와 의학서를 개발한 것과 흐름을 같이 하는 기획이다. 우리말이 중국어와 다르다는 게 훈민정음의 직접적인 제작 동기였듯이 세종은 중국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마련이다. ……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각기 다르므로 말도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 우리 동방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은 중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으나 다만 방언과 속된 말만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문서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 吾東方禮樂文章,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조선의 건국 세력이었다면 아마 조선의 문명 수준이 중국에 못지 않다는 말은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사대부라 해도 개국공신 사대부와 국왕 직속 사대부는 이미 성격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종도 역시 중국에 대한 사대라는 기본 노선에서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지만(한 예로 세종은 국왕과 세자의 책봉에서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얻는 절차를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조선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서 자리 매김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주체적인 사대주의라고 할까? 이 점은 천문학을 장려한 데서 더 확실히 드러난다.

 

 

1432년 세종은 장영실(蔣英實)을 시켜서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게 하고, 2년 뒤에는 역시 장영실에게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을 이용한 자동시보장치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444년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이라는 두 권의 역서(曆書)를 편찬한 사실이다. 이 역서들은 비록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을 참조한 것이지만 방법론만 차용했을 뿐 그 내용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대폭 수정한 것이다(이를테면 일식과 월식, 일출과 일몰 시간의 기준을 한양으로 정하고 있다).

 

한반도 역사상 천체를 직접 관측하고 독자적인 역서를 발간한 건 이번이 최초다. 그런데 천체의 운행을 살피고 역법을 계산하는 일은 원래 중국의 황제, 즉 천자에게만 허용된 특권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천자는 매년 초 조공을 바치러 온 주변 속국들의 사신에게 자랑스럽게 그 해의 역서를 하사하는 게 오랜 전통이자 사대관계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었던가? 이런 신성한(?) 작업을 독자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은 세종이 의식적으로 탈중국화의 노선을 걷고자 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그것은 유교제국(중국의 명나라)과 적절한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상대적인 자립을 누리는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이다. 외교권과 군사권은 중국에 위임하고 내치에 관한 권리는 독자적으로 유지하는 조선 특유의 사대주의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아마 세종은 즉위 초부터 이런 관계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고려 말부터 큰 부담이 되어온 금과 은의 조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탄원한 끝에 조공품을 금과 은 대신 특산물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역시 고려 말부터 각종 사회적 폐단을 빚어온 환관과 처녀의 진공(進貢)을 폐지하는 문제도 명과 합의를 보았다명나라의 환관 수입이 많은 이유는 중국 역사상 어느 왕조보다도 환관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사대부 세력이 황권에 도전할 만큼 커지자 명 황실에서는 환관을 양성해서 황제 직할대로 삼아 사대부를 제어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유명한 동창(東廠)은 바로 환관들로 이루어진 사대부 감시기관이다(지금으로 말하면 국가정보원을 환관들로 꾸린 셈이랄까?). 이렇게 환관이 득세하다 보니 명나라에 간 조선 출신의 환관들도 사신의 자격으로 귀국해서는 조선 정부에 자기 친척을 관직에 임명해 달라고 압력을 넣는 등 함부로 권세를 휘둘러 사회적 물의가 컸다. 처녀 진공 역시 폐단이 많았다. 처녀를 중국에 보낼 때는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후보들을 선발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집집마다 딸을 서둘러 시집보내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겼다. 따라서 환관과 처녀 진상은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문제였다. 사대의 큰 틀은 유지하되 아무리 상국이라 해도 요구할 것은 요구한다는 자세다. 이런 중국에 대한 자주적 노선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북부 영토의 개척이다.

 

 

해시계와 물시계 위쪽은 앙부일구, 아래쪽은 자격루다. 이렇게 세종 때 각종 시계가 제작된 이유는 그 무렵에 갑자기 시간을 재야겠다는 필요성이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문물과 제도를 중국에 의존하던 관행이 사라지고 주체적인 관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마 세종은 당시에 이미 환관 정치의 폐해를 보이던 명나라가 부실한 제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멀게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로, 가깝게는 고려 중기 여진의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은 이래로 한반도 북부는 사실상 한반도 왕조들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다. 급기야 몽골 지배기에는 동녕부(東寧府)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면서 공식적으로 원나라의 영토가 되기도 했으니 조선시대에 이르면 말할 것도 없다. 비록 몽골이 물러갔어도 이 지역은 만주와 함께 여전히 여진의 텃밭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런 사실은 금나라가 무너진 이후 여진의 여러 부족들 간에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개국 초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일은 있었으나, 사실상 명나라도 이 지역을 영토로 거느릴 입장은 못 되었고 또 그럴 의사도 없었으니 이곳은 정치적 공백지이자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 대한 초기 조선 정부의 정책은 그저 어르고 달래는 것이었다. 1410년 태종이 두만강 하류 지역에 경원부라는 무역소를 설치한 게 바로 그런 전략이다흔히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 여진과 교린하는 것을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부르며 조선의 고유한 외교 정책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조선은 사대의 의무만 다했을 뿐 교린의 대가는 얻지 못했다. 이 점은 무역의 측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 중국과의 무역은 조선이 조공을 보내면 중국이 회사(回賜)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양으로나 질로나 무역 역조는 피할 수 없다. 또한 교린 무역의 경우에도 조선은 이득을 얻고자 하기보다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여겼으니 대차대조표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세종은 1426년 왜구의 노략질을 정식 무역으로 만들기 위해 울산, 부산, 진해의 3포를 개항했는데, 이것 역시 회유책에 불과할 뿐 경제적으로는 손해였다(더구나 조선이 교류한 일본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쓰시마일 뿐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는 했으나 조선은 일본의 실력자인 바쿠후幕府와 직접 수교한 게 아니라 쓰시마 도주島主를 매개로 해서 교류했다. 조선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일본이란 대부분의 경우 쓰시마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진은 허가된 교역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경원부를 집중적인 공략 목표로 삼는다. 결국 1425년에 세종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기로 한다. 대다수 군신들은 오히려 후퇴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윤관(尹瓘)9성이 실패한 이래로 한반도 정부의 기본적인 북부 정책을 답습한 결과다. 이에 대해 세종은 강경책을 주장한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의견을 좇아 북진 개척을 명한다. 과연 왕의 기대에 부응해 김종서는 1433년 두만강 하류에 6진을 구축했고, 이후 10여 년 동안 인근 백성들을 이주시켜 두만강을 확실한 조선의 동북부 국경선으로 만든다. 또한 그 무렵 세종은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을 보내 압록강 중류에 4군을 설치함으로써 서북부 국경선도 압록강으로 확정한다. 고구려 멸망 이래 한반도 왕조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반도를 영토로 고구려가 무너진 이래 한반도 왕조들은 사실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세종이 6진과 4군을 개척하게 한 것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고려시대에도 이따금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까지 영토를 넓힌 적은 있었지만 적극적인 사민정책을 통해 이 지역을 확고히 영토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종이 뿌린 악의 씨

 

 

역사와 법, 인문학과 과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한글을 만들고, 북변의 영토까지 개척한 세종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물론 통신장비(대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명실상부한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을 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세종의 개인적 능력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실한 노력이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과를 순전히 주체 역량의 공로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세종은 좋은 무대를 만났기에 좋은 공연을 남길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개국공신 사대부들이 물러나고 국왕의 직속 사대부들이 성장하는 세대교체기였기에 그는 처음부터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명나라가 때마침 조선의 태종 대와 같은 몸살을 앓고 있었기에 세종은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중요한 사업들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개국 초까지도 조선의 내정에 사사건건 간섭했던 명나라가 왜 그렇게 태도를 바꾼 걸까?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철권통치로써 강력한 황권을 유지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1398년에 죽자 그의 손자인 혜제(惠帝)가 제위에 올랐다명나라 때부터 중국 황실에서는 시호(諡號)보다 연호(年號)로 황제를 칭하는 전통이 생겨났는데, 이에 따르면 주원장(朱元璋)은 홍무제(洪武帝), 혜제는 건문제(建文帝)가 된다. 원래 중국 황제들은 죽은 뒤 신하들이 시호를 붙이는 게 한나라 때부터의 관례였다. 고황제(고조), 무제 등의 이름이 모두 시호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부터는 태종이나 현종처럼 묘호(廟號)를 쓰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시호가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다(예컨대 당 고조의 시호는 神堯大聖大光孝皇帝였으니 여기서도 중국황실의 거창한 격식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송나라와 원나라 때까지 묘호가 사용되다가 명나라 때 새로 연호가 황제 명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시호나 묘호, 연호는 모두 황제가 죽은 뒤에 공식적으로 붙는 명칭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아직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국인 데다가 주원장의 아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판에 겨우 열여섯 살의 어린 황제가 무사할 리 없다. 건국자가 죽은 뒤 나타나는 개국초기증후군이 있을 것을 미리 염려했던 주원장(朱元璋)은 아들들을 모두 변방의 번왕(藩王)으로 임명해서 수도인 난징에서 멀리 보냈으나 넷째 아들 연왕(燕王)은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과연 그는 얼마 안 가서 1402년에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고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옮긴다(통일 왕조로서는 최초로 강남에서 일어났던 명나라도 결국은 화북으로 정치적 중심을 옮겼다. 원래 중국은 역사적으로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하고 화북을 정치적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취했는데,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중원 문명이 연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한 증거다).

 

당시 혜제는 황궁이 함락되면서 불에 타 죽었는데,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탓에 그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 연왕을 내내 괴롭혔다(그래서 1405년부터 시작된 정화의 유명한 남해원정은 혜제를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카를 죽인 그 비정한 삼촌이 바로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24). 그랬으니 불과 2년 전에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조선의 왕위에 오른 태종을 영락제가 쉽게 책봉해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주원장(朱元璋) 시대에 갈등과 알력을 빚었던 명-조선 관계는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금세 안정된다. 조공 문제에 관한 세종의 개선 요구에도 선뜻 응한 것은 바로 이런 우호적인 관계 덕분이다.

 

 

 

 

세종으로서는 필경 아버지 태종과 영락제(永樂帝)가 서로 닮은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왕권이 안정되었고 나라가 기틀을 잡았으니, 두 번 다시 명 황실과 조선 왕실을 얼룩지게 만든 왕자의 난같은 사건은 없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락제의 치세가 끝난 다음 명나라는 그의 아들들이 순탄하게 제위를 이어가면서 번영기를 맞는다(비록 명나라의 번영기는 역대 어느 제국보다도 짧았지만), 아마 세종은 조선도 그런 길을 걸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즉위 초까지만 해도 그는 태종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육조 직속 체제를 강화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각종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지만, 대내외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그의 마음도 한결 느긋해진다. 6진과 4군을 개척해서 영토까지 크게 확장된 1436년에 다시 의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로 복귀한 것은 그런 여유에서였을까?

 

그러나 조선이 처음부터 사대부 국가로 출발한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유교왕국이란 왕과 관료(사대부)라는 권력의 두 축이 절한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고, 그 균형이 기울어지면 언제든 내재된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런데 원래 저울이 균형을 유지하는 기간은 언제나 잠시일 뿐이다. 따라서 그 미묘한 균형이 마냥 지속되리라고 여겼다면 그것은 세종의 착각이다. 명나라도 역시 사대부의 힘을 황제가 성공적으로 제어하는 한에서만 안정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면, 그나마 환관이라는 충실한 도구마저 없는 조선의 왕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였다.

 

가장 큰 장점은 오히려 단점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황희(黃喜, 1363~1452)를 비롯하여 신개(申槩, 1374~1446), 최윤덕, 하연(河演, 1376~1453) 등 인품과 학덕이 모두 뛰어난 정승들을 거느린 세종은 어진 임금 밑에 어진 신하들이 있는 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의정부 정승들이 그를 받들 듯이 다음 왕을 모셔주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었다. 더욱이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키운 집현전 학자들은 이제 단순한 연구자의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비록 세종은 학자와 관료를 구분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을 수십 년씩이나 다른 직책으로 전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묶어두었으나 유교 이념의 속성상, 그리고 유교왕국의 생리상 학문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계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文宗, 1414~52, 재위 1450~52)이 제공한다. 물론 너그럽고 온유한 데다가 아버지의 위업을 충실히 계승하려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던 문종이었으니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문제는 병약한 그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열한 살짜리 어린 외아들인 단종(端宗, 1441~57, 재위 1452~55)이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시작된다. 어린 손주가 당할 비극을 미리 예상했더라면 세종은 결코 그렇게 사대부들의 기를 살려주지 않았겠지만, 실은 알았더라도 그가 별로 손을 쓸 여지는 없다. 그가 태종의 셋째 아들로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의 왕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이 뿌린 악의 씨는 개국 초부터 잠복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유교왕국의 모순은 팍스 코레아나로 완전히 제거된 게 아니라 잠시 발현이 지연되고 있었던 셈이다.

 

 

행정가 황희 그려시대에 관직에 진출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스스로 은거했으나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인정한 여러 관료들의 천거로 다시 일선 복구했다. 그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반대할 만큼 건실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