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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혼돈의 시작(홍경래의 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혼돈의 시작(홍경래의 난)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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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의 시작

 

 

개인적으로 보면 김조순(金祖淳)은 품성이 너그럽고 권력욕이 없을뿐더러 탕평책(蕩平策)의 지지자였던 탓에 정조(正祖)에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초대 보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도정치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백 년간 진화해 온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책임을 김조순에게 묻거나, 그의 가문이자 나중에 세도정치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안동 김씨 집안에게 전가할 수는 없겠다(무사안일주의적 성향 때문에 기생 출신의 첩실이 국정을 주무르는 것을 용인했으니 김조순(金祖淳)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역사학자들은 흔히 세도정치의 기원을 정조(正祖) 초기에 집권했던 홍국영이라고 말하는데,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것도 역시 옳지 않은 이야기다. 세도정치의 사전적인 정의는 국왕의 총신이나 왕실 외척이 국정을 장악하고 독재를 일삼았다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보았듯이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사대부 체제는 사실상 그런 정치를 지향해 왔으므로 세도정치(勢道政治)는 결코 19세기 초반에 느닷없이 출현한 체제라고 볼수는 없다. 물론 특정한 개인 또는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은 세도정치 시대만의 특징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대부(士大夫) 지배 체제의 연장이며 최종적인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1804년부터 순조(純祖)는 친정에 나섰으나 어른이라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위기인 판에 열네 살짜리 소년왕이 무슨 일을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와는 영 딴판으로 그 아이는 국왕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따라서 말이 친정일 뿐 사실상의 국정 운영은 모두 김조순(金祖淳)의 가문인 안동 김씨들이 도맡게 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국정 수행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부 요직을 그들의 일가붙이들이 몽땅 독차지하는 것이었다. 나라일보다 그 일을 더 열심히 한 탓에 김조순(金祖淳)의 바로 윗 항렬인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그리고 같은 항렬인 김희순(金羲淳)과 김달순(金達淳) 등 안동 김씨 가문의 남자들은 대사헌, 홍문관 제학,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지금의 서울시장 격), 6조의 판서 자리를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주고받으며 각자 모두 화려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 오늘날로 치면 입법부-사법부 행정부를 한 가문이 주름잡은 격이니 이런 이력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아주 드물다.

 

그러나 중앙정치는 그렇게 말아먹을 수 있다 해도 지방행정까지 그런 식으로 주무를 수는 없다. 아무리 번식력이 왕성하다 해도 한 가문에 속한 남자의 개체 수에는 엄연히 생물학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아먹는 것이다. 매관매직이라 알려진 이 비법을 통해 안동 김씨 가문은 재산을 증식하고, 자파의 인물들을 지방관에 임명하고, 나라의 행정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털 팔기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게다.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나마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도덕적 규준으로서 체면치레를 해왔던 성리학적 이념의 탈은 이제 아무런 쓸모도 없어졌다. 또한 그나마 객관적이고 공평한 관리 임용제도였던 과거제(科擧制)는 그야말로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정점에 올랐으면 내려가는 게 자연 법칙이듯이 가장 완벽한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완성되는 순간(바꿔 말해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조선의 사대부들은 모든 것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코스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을까?

 

 

백성들의 삶 사대부 체제의 결정판인 세도정치 시대에 접어들자 조선사회의 모든 모순은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 최대의 피해자는 단연 농민들이다. 그림은 19세기 초반의 화가 김득신이 그린 풍속화인데, 토속적인 멋보다는 당시 조선 백성들의 피폐한 삶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된 지 불과 5~6년 만에 조선 사회는 완전한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기존의 토지제도가 무너진 이후 대토지 겸병이 유행처럼 번져 자영농이 대부분 소작농으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 그래도 백성들의 삶이 그럭저럭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동법과 균역법(均役法) 등의 개혁적인 제도들이 임시방편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면서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도 기능 마비 상태에 이른다. 그나마 대동법은 중앙으로 오는 대동미가 지나치게 많아진 탓에 지방에서 다시 요역을 부과하는 제도로 역행하면서 자체 붕괴하는 식이었지만, 균역법은 애초부터 권력이 청렴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제도였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 하에서는 도저히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조세제도가 붕괴하자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지방관들의 탐학은 절정에 달한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이른바 삼정이 무너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전정은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고 군정은 군역을 가리킨다.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대동법(大同法)은 전정과, 균역법(均役法)은 군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환정이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이 곡식을 환곡還穀이라 불렀다) 추수기에 갚도록 하는 조치를 말한다. 따라서 원래는 구빈(救貧) 행정이었지만, 다른 제도들도 그렇듯이 국가 체제가 엉망이 되면서 환정도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오히려 빈민의 처지를 이용해 국가 재정을 늘리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말하자면 정부가 환곡에 이자를 붙이기 시작한 것인데, 16세기에는 이자율이 1/10이었다가 점차 늘어 19세기에는 50퍼센트에 달할 만큼 높아지게 된다. 더욱이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강제 대여를 하기도 했으니, 국가가 앞장서서 고리대금업을 한 셈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마 국가 재정의 손실이 빚어졌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을 것이다.

 

1808년 함경도에서 소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듬해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홍수가 발생했고, 또 그 이듬해에는 역시 북도 지방에서 겨울에는 지진, 여름에는 홍수가 일어났다. 18112월에는 황해도 곡산에서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감옥을 부수는 사건이 터졌다. 북부의 흉흉한 사정을 보여주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 다음에 일어날 대형 사건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181112월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 1780~1812)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홍경래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과거에 낙방한 뒤 관직의 꿈을 접고 지관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그는 평안도 가산(嘉山)의 부호인 이희저(李禧著)의 집에서 우군칙(禹君則, 1776~1812)이라는 동업자를 만난다.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시국을 논하기만 할 게 아니라 아예 바꾸면 어떻겠냐는 생각을 품게 된다. 마침 그들에게는 새 세상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이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지관들의 성서나 다름없는 정감록의 사상이다. 비록 정감록에서 새 세상의 군주라고 예언한 정진인(鄭眞人, 정씨 진인)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홍진인(洪眞人)인들 어떠랴? 사대부(士大夫) 세상인 이씨 조선을 끝장내고 새 세상을 이룬다면 정감록의 예언은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이념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그에 필요한 인력과 경제력과 물리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들을 비롯해서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인물들을 끌어모으고, 중앙의 대상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현지 상인들과 중소 부호들을 규합하는 한편, 광산노동자와 빈농, 유랑민들을 군대로 조련했다. 이렇게 해서 김사용(金士用), 김창시(金昌始) 등이 중간 보스로 가담했고, 우군칙과 이희저의 재력은 거사 자금이 되었으며, 홍총각(洪總角)과 이제초(李濟初)를 비롯한 뛰어난 무사들이 반란군의 무력을 담당하게 되었다홍경래는 잔반, 우군칙은 서얼, 이희저는 노비, 홍총각은 양인 출신이었으니 반란 세력은 그야말로 각계각층을 망라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반군은 정감록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다고는 하나, 그토록 신분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성리학적 이념의 귀결이라 할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에 오히려 신분 해체가 가속화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이희저는 원래 역노(驛奴)였다가 당시 성행하던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고, 홍총각은 물고기와 소금을 말에 싣고 다니며 파는 상인이었는데, 힘과 무용을 갖춘 장정들을 물색하던 홍경래의 눈에 띄어 반군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이렇듯 10여 년에 걸쳐 조직적인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중앙정부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였다면, 반란 주체의 능력도 능력이겠지만 그보다는 정부의 무능을 탓해야 할 것이다.

 

조선 역사상 이런 반군은 없었다. 일찍이 이처럼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이념과 사대부(士大夫) 체제에 조직적으로 맞선 반군은 없었으며, 심지어 노동자와 빈농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급료까지 주면서 정식으로 고용한 반군도 없었다. 과연 출발부터 남달랐던 이들은 봉기한 후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물론 하층 관리들에게서까지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무릇 역사상 첫 시도란 아무래도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성분이 다양한 만큼 반군 세력은 이념이나 행동에서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양반과 부농으로 이루어진 지도부와 소농과 빈농 출신인 병사들은 이해관계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세도정치로 썩어가는 중앙정부와 전통적인 북도 차별 정책을 비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적극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것은 반란이 장기화될 경우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반군이 예언한 것처럼 정진인이 곧 등장하지 않은 것도 당시로서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야 이씨 조선을 대체할 새 왕조를 표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문제점들이 잠재되어 있었기에 정신을 차린 관군이 반격을 가하자 반군은 곧 수세에 몰려 정주성으로 퇴각하게 된다.

 

 

 

 

내분의 요소가 있는 한 장기적인 농성이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이후 4개월이나 정주성에서 버텼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저항의 주체가 급료를 받는 반군의 정식병사들이 아니라 인근의 소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보다 오로지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일념으로 관군은 대대적인 초토화 전술을 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토를 잃었을 뿐 아니라 관군의 태도에 적개심을 품은 것이다. 반군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오히려 반군 주력군보다 더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하지만 반군이 정주성으로 퇴각하는 순간 이미 대세는 결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공성하는 측과 농성하는 측은 대등하게 맞서는 듯하다가 결국 관군이 화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전세가 확연히 기울었다.

 

비록 이 반란은 새 왕조를 건설하지도,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끝장내지도 못했지만, 사건의 후유증은 컸다. 무려 2천 명에 가까운 반군 일당을 처형했어도 정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홍경래는 관군이 성을 공략할 때 총에 맞아 전사했는데도 그가 어디론가 도피해서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나돌 정도였다.

 

그 뒤에도 순조(純祖)의 치세에는 제주와 경기도에서도 민란이 일어났고,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대자보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도적과 거지들이 들끓었다. 게다가 인심에 이어 천심마저 잃었는지 순조의 치세 34년 동안 무려 19번의 여름이 대홍수로 얼룩졌는가 하면 전염병도 크게 번졌다.

 

이씨 조선은 엄청나게 운이 좋거나, 아니면 억세게도 명이 질긴 왕조였다. 망국적인 당쟁으로 늘 지배층이 분열되어 있었고, 대규모의 외침을 수 차례나 받은 데다가 이제는 기층 민중이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났는데도 이씨 조선의 철밥그릇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무렵에 조선은 사실상 멸망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왕실의 명맥만 유지되었을 뿐 국가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세제도가 마비되면서 국가 재정이 거덜났다. 또 백성들은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화전민으로, 화전민에서 유랑민으로 바뀌면서 국가의 관할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왕조시대라고 하지만 이처럼 주권과 국민이 사라진 국가를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되어 버린 조선에 마지막 꽃을 피우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그 무렵이다. 거의 시들어가는 실학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비록 실천되지 못할 이론이지만 문헌상으로나마 개혁의 모든 사상과 총론을 집대성하려 했던 정약용(丁若鏞)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제기한 대안들이 50년 전에만 실행에 옮겨졌더라도 조선의 19세기는 그토록 황폐한 시대가 되지 않았으리라.

 

 

정주성의 대치 조선 백성들만큼 지배층을 편하게 해주는 민족이 또 있을까. 당쟁만 일삼으며 모든 면에서 철저히 무능했던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을 내내 용서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능을 넘어 부패에까지 이르자 드디어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림은 정주성으로 들어간 홍경래 군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군대의 모습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과거로의 회귀

혼돈의 시작

불모의 땅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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