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의 땅에 핀 꽃
난세를 살았던 만큼 정약용의 사상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우선 그는 무척 폭넓은 오지람을 자랑한다. 지금의 학문 분류로 말하면 그는 철학, 문학, 역사, 언어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학, 행정학, 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나아가 과학기술과 종교 분야까지 아우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에 속한다. 사실 정약용이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된 데는 그렇듯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덕택이 크다.
물론 처음부터 정약용(丁若鏞)이 박학다식과 팔방미인을 자랑했던 것은 아니다. 무릇 조선의 학자-관료라면 거의가 그렇듯이 그도 역시 관리로 재직하던 젊은 시기까지는 학문이라 해봤자 ‘과거용’ 유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라면 거의가 다 그렇듯이 그도 역시 정쟁에 휘말려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는데, 그 기간을 잘 활용한 덕분에 학문의 너비와 사색의 깊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는 비록 그 자체로는 조잡한 음모와 책략이었어도 역사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큰 성과를 낳았다고 해야 할까? 그 사건으로 1818년까지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약용은 대부분의 주요 저술을 남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릇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어느 것이든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당대의 현안에 관련된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이론이다. 물론 사상가는 당대의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구성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거기서 통시대적 의미를 가지는 내용을 추출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그 결과물을 보통 고전이라 부른다.
당대의 현안에 관련된 정약용(丁若鏞)의 사상은 주로 경제학의 영역에 속한다. 당대의 핫이슈는 단연 토지와 조세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우선 이 분야에 관한 견해가 없을 수 없다. 그동안 실학자 진영에서 제출된 대표적인 토지제도 개혁론은 유형원의 ‘균전론’과 이익의 ‘한전론’이다(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붙은 이론이 등장하지만 모두 거기서 갈라진 변주곡들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비록 초점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토지의 관리를 경작자의 재랑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요컨대 지주들의 대토지 겸병이나 소작농의 증가 등 그동안 있었던 토지제도의 모든 문제는 경작자와 소유자가 분리된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므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내용이다.
정약용도 경자유전의 이념에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는 이념을 확인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균전론이나 한전론은 토지의 면적만을 과세의 표준으로 삼는 결부법(結負法)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정약용이 주장한 여전론(閭田論)은 단순한 면적이 아니라 토지의 지세나 자연 조건을 고려해서 여(閭)라는 복합적인 단위를 기준으로 설정한다. 각 여마다 여장을 한 명씩 두어 토지를 관리하게 하고, 여민들에게 조세와 생산물을 할당하고 배분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유사시에는 군대 조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사실 이러한 내용은 종전의 전제 개혁론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기는 하나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정약용(丁若鏞) 자신도 크게 의지했던 옛 주나라의 이상적인 토지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의 냄새가 강하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나눈 다음 조세를 공제하고 산출물을 고르게 배분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이 바로 정전법이 아니던가? 이렇게 보면 여전론은 정전법에 손발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전론에서는 중국과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병농일치의 개념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도 그렇지만 아마 정약용(丁若鏞)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시행한 이갑제(里甲制)를 크게 참고한 듯하다. 이갑제란 한 지역의 농가들을 100호의 갑수호(甲首戶, 일반 농가)와 10호의 이장호(里長戶)로 묶고 이장호들이 돌아가며 조세와 치안을 맡는다는 제도인데, 행정의 측면이 더 중시되기는 하지만 여전론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정약용(丁若鏞)은 그 전까지 다양한 전제 개혁론을 주장한 다른 실학자들과 같은 착각을 범하고 있다. 토지의 실제 경작자와 명목상 소유자가 다르다는 게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개선하려면 조선의 체제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아니면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거나).
조선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 나아가 중국의 역대 왕조들까지 중화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들은 예외없이 모든 토지가 왕 또는 국가의 소유라는 왕토(王土)의 이념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토지만이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게 왕의 소유였으므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비록 그것은 형식적인 규정이었고 언제나 토지의 실소유자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공식과 비공식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그 때문에 전시과(田柴科)나 과전법(科田法)에서도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수조권(收租權)이라는 애매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이에 반해 중세 유럽의 봉건제에서는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에게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양도하거나 계약을 통해 빌려주는 식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사유지estate와 지대rent의 개념이 발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체와 정체를 인정하는 한 농민들은 결코 토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비록 제한적이나마 경자유전의 원칙이 현실에 적용되려면 최소한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결국 실학자들과 정약용(丁若鏞)이 토지 개혁론의 골간으로 삼았던 경자유전이란 단지 개혁 정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체제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는 토지 개혁론에 비해 더 고전적인 가치를 지니는 분야, 즉 정약용의 정치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실학도 유학의 한 갈래라는 것을 보았듯이 그의 모든 학문 역시 유학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도 군주의 자질과 덕목으로서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역대 사대부(士大夫)들이 늘 국왕에게 요구했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자세다. 군 주도 먼저 스스로를 바르게 닦고 나서 남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 바로 그것이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이념적 족쇄가 아니던가?
그러나 정약용(丁若鏞)이 수기치인을 말하는 근거는 약간 다르다. 그는 놀랍게도 백성이 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군주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군주가 참되게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먼저 수기치인을 해야 한다는 ‘참신한’ 왕도론(王道論)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같은 시대에 서유럽에서 성장하고 있던 자유주의 사상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정약용은 과연 근대적 국민주권 개념을 주장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 전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군주에게 그런 덕목을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 암묵적인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왕 역시 중국 천자와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제후, 즉 사대부(士大夫)와 같은 입장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천하의 주인인 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그 누구도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천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丁若鏞)은 국왕에게 수기치인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백성으로 새롭게 설정했을 뿐이다【그 결과 정약용의 왕도론은 국민주권의 개념과 얼추 비슷해졌지만, 실은 크게 다르다. 우선 그의 사상은 순수한 이념적 산물이지만, 서유럽의 자유주의는 시민 계급이라는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성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비교적 동양식 왕조와 비슷한 왕국이 생겨났던 서유럽의 절대주의 시대에는 절대 군주와 관료 세력만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이 상업과 산업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면서 장차 미래 사회를 주도할 세력으로 떠올랐다(아마 절대군주도 동양의 유학을 알았더라면 몹시 부러워했으리라. 유학만큼 군주의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을 보장해주는 이념은 없을 테니까). 이들이 주창하고 나선 게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며, 정치적으로는 참정권과 국민주권의 개념이다. 물론 동양의 역사에서는 일찍부터 군주가 백성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이 있었으나, 그것은 군주가 만백성의 ‘주인’으로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국민주권의 개념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도 전제 개혁론과 왕도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약용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다(아마 그는 당대의 집권자이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문을 연 노론 세력과는 의식적으로라도 입장을 달리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옛 주나라의 정전법(井田法)에서 영향을 받아 여전론을 전개한 것이라든가, 맹자(孟子)를 원조로 하는 왕도정치의 이념을 주창한 것은, 비록 유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성리학보다는 더 이전의 유학과 맥을 같이 한다. 바로 정조(正祖) 치세에서 시파 세력의 이념이었던 육경학이 그의 사상을 낳은 뿌리다(정약용이 정조와 개인적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학문적 동질감 덕분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시파보다도 한 걸음 더 앞서갔다. 이를테면 150년 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 간의 철학 논쟁에 대해서도 그는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간다. 인간에게는 지성적 측면과 신체적 측면(이것을 그는 ‘영지靈知의 기호’와 ‘형구形軀의 기호’라고 표현한다)이 공존한다는 양성론(兩性論)이 그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인정한다는 내용이니까 지금 보면 별것 아닌 주장이지만, 그 간단한 해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터무니없는 논쟁이 얼마나 열띠게 진행되었던가? 정약용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서학과 서양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도 쓸데없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丁若鏞)은 학문적으로만 ‘종합지식인’일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크로스오버와 퓨전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당대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물론이고 그에 선행하는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학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지적 한계는 그 자신의 탓이 아니라 바로 그 시대의 한계다. 또한 그가 내놓은 무수한 이론들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적용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시대의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백과사전적 학자로서 온갖 학문 분야에 손을 댔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적 한계인지도 모른다. 학문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었다면, 그가 그렇듯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 최후의 백과전서파 정조(正祖)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정약용은 현실 정치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후대에 더 큰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철학과 역사에서부터 종교와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서유럽의 계몽사상가들처럼 박학다식을 자랑한 팔방미인이었다. 위쪽 그림은 정약용(丁若鏞)이 화성을 축조할 때 고안한 거중기인데, 이 기계 덕분에 건설비가 크게 절감되었다고 한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한양에 간 원범 총각(철종) (0) | 2021.06.21 |
---|---|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헌종, 김대건, 기해박해) (0) | 2021.06.21 |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혼돈의 시작(홍경래의 난) (0) | 2021.06.21 |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순조, 세도정치, 신유박해) (0) | 2021.06.21 |
11부 불모의 세기 - 개요 (0) | 2021.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