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④
10년 만에 권좌에 컴백한 대원군은 당연히 모든 것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폐지하고, 맏아들인 이재면(李載冕, 1845 ~ 1912, 고종의 형)에게 병권과 재정권을 안긴 것은 어떻게든 옛 권력을 부활하려는 대원군의 안간힘이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한 그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오랜 정적인 며느리를 물리쳐 후련했겠지만, 그 덕분에 조선에게는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시어머니가 둘씩이나 달라붙어 버렸다. 임오군란을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은 때마침 미국과의 조미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베이징에 가 있던 김윤식(金允植, 1835 ~ 1922)과 어윤중이 파병을 요청하자 부관인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 ~ 1916)에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조선으로 보낸다. 또 다른 시어머니인 일본은 공사관이 습격을 당하고 별기군 교관들이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사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
결국 대원군이 재집권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청군이 그를 납치함으로써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실패로 끝났다(이후 대원군은 3년 동안 톈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대원군을 납치하느라 애쓴 청나라에 비해 정작으로 실익을 거둔 것은 일본이다. 인천에 정박한 일본 군함 위에서 하나부사는 김홍집(金弘集)과 제물포조약을 맺었는데, 조선 측의 잘못이 명백한 만큼 이번에는 강화도조약과 달리 명백한 불평등조약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배상금을 받기로 한 것은 오히려 잔돈에 속하고, 진짜 큰 이득은 공사관 수비 병력을 증강하기로 한 조항이다. 조선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된것도 소득이지만 더구나 그 유지비는 조선에서 물기로 했으니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 달아나는 일장기 국제무대에 데뷔한 조선은 당연히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구식 군대가 차별 대우에 분노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까지는 괜찮지만, 남의 나라 공사관을 때려부순 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일본공사 일행이 일장기를 들고 황급히 인천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인데, 이게 빌미가 되어 조선은 또 다른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민비(閔妃)는 부활(?)해서 국모로 컴백했으며, 대원군의 수구적 조치도 모두 철폐되고 기존의 체제로 돌아갔다. 그럼 임오군란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우선 그동안 서로 암암리에 견제하느라 조선의 살림에 관해 별로 간섭하지 않았던 두시어머니가 대놓고 말을 함부로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에 따라 조선의 꼬맹이들은 어느 할머니를 더 따르느냐에 따라 두 파로 나뉘었다. 김홍집(金弘集), 김윤식, 어윤중 등은 당연히 청나라 할머니가 더 좋다고 했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은 일본 할머니가 더 낫다고 우겼다. 의견이 엇갈리면 서로 대화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이라는 집안의 가훈에는 도대체 대화라는 게 없었다. 그저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 당파를 구성해서 드잡이질만 벌이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본의 똘마니들은 친청파를 사대당(事大黨)이라며 놀려댔고, 청나라의 똘마니들은 친일파에게 개화당(開化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하지만 친일파는 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했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개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라 할 만큼 무지했다. 나라의 문을 처음 열었고, 더구나 그 개방을 자의로 한 게 아닐진대 개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대대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개혁에는 커다란 아픔이 따르겠지만 그것은 생략할 수 없는 탄생의 진통이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 정부는 체제와 제도만 그럴듯하게 갖추려 했을 뿐 개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개혁을 동반하지 않은 개화, 아픔 없이 가지려는 욕심은 결국 개화의 최종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 미국에 간 양반들 급변하는 정세에 조선 정부는 바빴다.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한 지 2년 뒤인 1883년 7월에는 8명의 미국 시찰단이 출발했다. 앞줄 가운데가 단장인 민영익이고 홍영식과 서광범이 좌우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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