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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일본의 야망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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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2장 식민지 길들이기, 일본의 야망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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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망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조선의 항일운동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 항일의 과제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게도 발등의 불이 된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비록 분열과 재집결을 거듭하는 문제점은 있으나 그래도 항일운동의 조직적 지도부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미 5년 전의 610만세운동을 통해 이 장점은 여실히 발휘된 바 있었다. 1926610순종(純宗)의 장례식에 맞춰 권오설(權五卨, 1899 ~ 1930), 김단야(金丹冶)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 학생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은 운동 지도부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순종은 아버지처럼 장례식을 통해 민족에게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사건에 힘입어 그 이듬해 젊은 조선공산당원들과 원로급 민족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새로운 조직을 통해 상견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탄생한 민족운동 통합 조직이 바로 신간회(新幹會)(610만세운동으로 일본이 유화책으로 돌아선 덕분에 신간회는 합법 단체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나 조선공산당처럼 동질적인 이념을 지닌 조직들에서도 늘 인맥들 간의 분열과 반목으로 애를 먹었는데, 신간회 같은 대동단결형조직이 멀쩡할 리는 만무하다. 특히 명망가 지향적인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 지도부 구성을 거의 자파로 도배한 것에 대해 좌익 계열은 처음부터 불만이 많았다. 출범 후에도 본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강령을 만드느니, 전국과 해외에 지회를 설립하느니 하면서 부산을 떨던 신간회는 결국 좌익의 지원으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된 허헌(許憲, 1885 ~ 1951)이 우익 조병옥(趙炳玉, 1894 ~ 1960)의 탄핵을 받으면서 지도부가 분열되어 19315월에 와해되고 만다. 일본이 만주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중요한 시기에 대형 민족운동 조직이 스스로 붕괴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국내 항일운동의 맥이 끊겼음을 뜻한다.

 

따라서 항일의 구심점은 자연히 북쪽의 만주로 옮겨가게 된다. 당시 남만주 일대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동척에 밀려 고향을 떠나온 조선인들로 이미 또 하나의 조선'이 성립되어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1920년대부터는 만주에서도 본격적인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치안력이 한반도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이곳의 투쟁은 일찌감치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무장투쟁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일투사의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비롯해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의 무장 조직들이 모두 1919년에 결성되었으니, 여기서도 31운동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金佐鎭, 1889 ~ 1930)의 지휘하에 만주의 청산리 전투에서 무려 열 배에 달하는 일본군 2개 사단 병력을 무찔러 이름을 떨친 바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야망이 드러나자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조직들에게는 중요한 원군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조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중국이다. 아직 중국은 워낙 넓은 탓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대륙 침략이 일정에 오른 만큼 더 이상 힘의 열세를 탓하며 수수방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중국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의 항일 세력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하게 되는데, 항일무장투쟁의 분야에서는 조선이 선배였으니 중국에 한 수 가르친 셈이다.

 

 

 황제가 더 있었더라면 31운동과 달리 610만세운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회주의자와 학생들이 조직한 결과였으므로 한층 진일보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고종(高宗)의 장례식을 D - 데이로 삼았던 31운동처럼 이번 거사도 순종(純宗)의 장례식을 이용했으니, 두 황제는 죽음으로써 민족에게 기여했다고 할까? 사진은 순종의 장례식에 모인 군중이다. 일본으로서는 더 이상 황제가 없다는 데 안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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