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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25. 안연과 자로와 공자가 각자의 포부를 얘기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25. 안연과 자로와 공자가 각자의 포부를 얘기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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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안연과 자로와 공자가 각자의 포부를 얘기하다

 

 

5-25.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각기 품고 있는 뜻을 한번 말해보지 않으련?”
5-25. 顔淵, 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자로가 말하였다: “원컨대, 수레와 말, 웃 도리와 값비싼 가벼운 가죽외투를 친구와 함께 쓰다가, 다 헤지더라도 유감이 없고자 하옵니다.”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안연이 말하였다: “원컨대, 잘함을 자랑치 아니하고, 공로를 드러내지 아니하고자 하옵니다.”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자로가 말하였다: “이제는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하옵니다.”
子路曰: “願聞子之志.”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늙은이로부터는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친구로부터는 믿음직스럽게 여겨지며, 젊은이로부터는 그리움의 대상 이 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논어에 있어서 최고의 패러곤(paragon, 표본)들의 특징을 너무도 절묘하게 부각시킨 유명한 장으로서 널리 애송되고 인용되는 문장이다. 이 드라마에는 공자ㆍ안연ㆍ자로(계로), 논어의 최고주역인 삼인이 모두 그 동등한 배역을 맡고 있다. 자로는 공자의 오른팔이요, 안연은 공자의 왼팔이다. 자로는 무()와 의리와 우직한 충절을 상징한다. 안연은 문()과 사색과 고요한 내면을 상징한다. 안 연과 계로가 ()’했다는 표현은, 시립(侍立)인지, 시좌(侍坐)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 자리에서 곁에 있었다는 의미다. ‘()’하불(何不)’의 축약태이다. ‘왜 하지 않는가?’의 뜻이다. 공자는 문득 두 제자에게 물었다: “너희들 각기 가슴에 품고 있는 뜻을 한번 얘기해보지 않을래?” 매우 한가롭고 진실한 충정이 오가는 따사로운 분위기다. 아마도 개나리 피는 화창한 봄날, 뒷동산을 거닐며 이루어진 대화일 것이다. 이 질문은 각자 평소에 자기 마음에 품고 있는 인생의 이상(理想)을 한번 독백해보라는 뜻이다. 이런 뜻밖의 질문에 안회 같은 성품의 인간이 먼저 대답할 리가 없다. 주책없는 자로가 선두주자로 먼저 나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로는 말했다. 여기 거마의경구(車馬衣輕裘)’에서 ()’은 유보남(劉寶楠)의 말대로 고본(古本)에는 없는 것이며,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가 가벼운 비싼 털가죽의 겉옷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가 첨가되었을 것이다. ‘수레ㆍ말ㆍ속옷ㆍ겉옷[거마의구(車馬衣裘)]’는 모두 사치품목에 속하는 것이다. 앞의 ()’원컨대의 뜻이다. ‘여붕우공폐지이무감(與朋友共敝之而無憾)’은 두 개의 독법이 있다. 하나는 공() 다음에서 끊어 읽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과 폐()를 붙여 읽는 것이다. 끊어 읽으면, ‘거마의구(車馬衣裘)를 친구와 함께 쓰고, 그것이 다 낡아빠져도 유감이 없다가 된다. 붙여 읽으면, ‘거마의구(車馬衣裘)를 친구와 더불어 같이 다 낡게 만들어도 유감이 없다가 된다. 뜻은 서로 통한다. 신주를 따라 나는 끊어 읽었다.

 

보통 대학생들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너의 가슴에 품은 인생의 이상을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보통의 인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아인슈타인을 능가하는 위대한 물리학 공식을 발견해서 인류에게 혜택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로라는 학생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람보르기니 스포츠카와 벤켄 올프슨 스테레오, 베르사체 모피 외투를 친구들과 실컷 같이 입고 같이 써서 다 낡아빠져도 여한이 없는 게 제 인생의 소원입니다.” 이러한 대답이야말로 자로라는 인품의 리얼리티였다. 그의 공동체정신,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투박하게 자란 인간들의 본능적인 물질적 환상을 소박하게 그려낸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자로 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격렬한 우정이었다.

 

보통 거마의구(車馬衣裘)의 주인을 자로로 보는 것이 평상적인 해석이지만, 황간의 소에 인용된 은중감(殷仲堪)의 설은, 거마의구(車馬衣裘)의 주인을 친구로 보는 것이다. 내 물건을 친구들과 함께 쓴다는 것은 웬만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로의 말은, 친구의 비싼 물건들을 의식하지 않고 내 물건처럼 마구 써서 다 낡아빠져도 친구지간에 의리 상할 감정, 즉 유감이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곧 우정의 지극함이요[교우지지(交友之至)], 이것이 곧 자로가 생애에서 원한 바라는 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이 기는 하지만 너무 재미있으면 정설이 되기 어렵다. 육조인(六朝人)들의 상식의 지양(止揚)이라고 하는 현풍(玄風)적 색채가 가미된 해석이라 할 것이다.

 

이제 안연의 차례가 되었다. 안연은 무어라 말했을까?

 

願無伐善, 無施勞.

 

여기 ()’이라 함은 서양언어의 영향을 받은 현대어적 함의의 도덕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란 잘함이다. 즉 뛰어남(excellence)이요, 유능함(competence)이다. 나의 뛰어남을 자랑치 아니하기를 원합니다. ‘무시로(無施勞)’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드러내다’, ‘과시하다의 뜻으로 보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시()베푼다’, ‘강요한다의 뜻으로 보면 괴롭고 힘든 일들을 남에게 강요함이 없이 혼자 스스로 감내해 낸다는 뜻이 된다. 나는 전자의 해석을 따랐다. 안회의 대답은 역시 그다웁게 깊은 내면적 성찰을 토로한 것이다. 자로를 멀쑥하게 만들었 음이 틀림이 없다. 이 안회의 대답은 도가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

 

自見者不明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自是者不彰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自伐者無功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自矜者不長.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노자24-

 

이러한 사상은 노자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안회의 대답에 깔려있는 정서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가 지금 도가사상이라고 부르는 사유체계의 원류가 안회의 삶 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안회의 대답에 멀쑥해진 자로는 갑자기 질문의 화살을 공자에게로 돌린다. 기상천외의 역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에게 이렇게 역습을 가한다는 것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공자와 자로의 사이가 이무로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 당신은 뭘 생각하고 사시오?

뭐가 당신 인생의 이상이냔 말이요?

이제 당신 말이나 들어봅시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러한 역습에 대답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너무도 큰 질문이기에, 예수 같으면 어떤 말씀이 튀어나왔을까?

 

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리라!

 

하나님의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지으리라!

 

그러나 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일상적인 소박한 말이었다. 이것은 공자가 얼마나 상식적이며 얼마나 일상적 정감의 꾸밈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준다. 자로의 공상성과 안회의 철학성이 오히려 공자에게는 없다. 가장 소박한 인간의 일상적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여기서 노자(老者), 붕우(朋友), 소자(少者)를 안()ㆍ신()ㆍ회()라는 동사의 목적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주어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의 해석을 취하면, ‘나는 늙은이들을 편하게 해주고, 친구들에게 믿음을 주고, 젊은이들을 가슴에 품어주고 싶다는 뜻이 될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취하면, ‘늙은이들이 나를 편하게 느끼고, 친구들이 나를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젊은이들이 나를 그리워한다가 된다. 두 개의 해석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으나 나는 후자가 보다 간접적이고 포괄적인 느낌이 들어, 그 해석을 취하였다. 여기 늙은이[노자(老者)]란 나에게 있어서 과거요, 친구[붕우(朋友)]란 현재요, 젊은이[소자(少者)]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역사성이다. 지나간 사람들로부터 편안하게 여겨지고, 현재의 같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신의가 있는 인간으로 여겨지며, 앞으로 올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없는 지고의 이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공자는 인류의 죄를 대속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늙은이들에게 편안하게 여겨지고 친구들에게 믿음을 얻으며 젊은이들에게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나날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에겐 이데아의 고향도 없었고, 천국의 아포칼립스도 없었다. 항상 노자(老者)와 붕우(朋友)와 소자(少者)를 생각하는 오늘 여기의 삶만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 공자의 세 마디야말로 공자의 생애의 이상과 그의 인품의 리얼리티를 그려낸 최고의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의 인류의 철학은 바로 이 공자의 세 마디로부터 재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다소곳이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 세 마디 중에서 가장 나의 가슴을 치는 명구는 소자회지(少者懷之)’ 이 한마디이다. 결국 노자안지(老者安之)’붕우신지(朋友信之)’는 이 마지막의 소자회지(少者懷之)’로 섭렵되는 것이다. 인간은 늙는다. 아무리 훌륭한 친구라 도, 같이 늙어만 가면 그것은 죽음에의 동참일 뿐이다. 늙어갈수록 자기의 늙음이라는 환경을 타파해나가는 젊음에 대한 동경이 필요한 것이다. 그 젊음에 대한 동경이란 단순히 무리하게 나이를 초월하여 젊은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늙어갈수록 젊은 후학들을 가슴에 품어주어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줄을 알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영원히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늙어갈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70세가 넘어서도 20세 전후의 제자들 속에서 살았다. 논어라는 책은 상당 부분이 70세 전후의 공자가 20세 전후의 제자들과 대화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공자는 소자회지(少者懷之)’의 삶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어린이들을 가슴에 품을 줄 알았고 또 의 어린이들의 가슴에 품어지는 그러한 노경의 삶을 살았다. ‘소자회지(少者懷之)’라는 이 한마디의 명구가 공자라는 인간을 영원한 역사의 스승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 파편은 그 양식적 특성으로 보면 매우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공야장(公冶長)편의 일반 양식에서 벗어나는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 브룩스는 이 파편을 위령공편 뒤로 옮겼다. 그러나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인생 이야기를 하게하고 그와 연관하여 자기 인생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바로 앞장(24)의 양식과 상통하는 어떤 맥락이 있다. 나는 이 파편이 상당히 오리지날한 초기기록 이라고 생각한다. 자공이 시묘살이를 하면서 공문 손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두 장은 공야장편의 결어적 성격을 지니는 것인데, 그것은 공자의 자기수양에 관한 독백적 내용으로 타인에 대한 평어와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다양한 평론을 한 끝에 자기의 삶의 태도, 자기 인격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기나긴 역사적 인간상 속에서 인간이 참으로 지녀야 할 가치를 설정하는 작업이다. 그 진실성의 무게는 진실로 태산의 암반과도 같은 것이다.

 

은 합()으로 발음한다. ()’어찌 ……하지 않는가?’의 뜻이다.

, 音合. , 何不也.

 

()’는 거성이다. ()’는 입는다는 뜻이다(주희는 의를 동사로 간주했다). ‘()’는 가죽옷(갖옷)이다. ‘()’는 낡아빠진다는 뜻이다. ‘()’은 유감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 去聲. , 服之也. , 皮服. , 壞也. , 恨也.

 

 

율곡언해는 주자의 해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ᄌᆞ로ᄀᆞᆯ오ᄃᆡ 원컨댄 거마와 경구 닙기ᄅᆞᆯ 붕우로 더브러 공ᄒᆞ야 폐ᄒᆞ야도 감호미업고져 ᄒᆞ노이다.”

 

 

()’은 자랑한다는 뜻이다. ‘()’은 유능함(잘함)이다. ‘()’는 크게 떠벌이는 것(자랑하다)이다. ‘()’는 공로가 있음을 일컫는다. 주역(周易)공로가 있어도 자랑치 않는다[로이불벌(勞而不伐)]’(계사繫辭7)라고 한 것이 같은 용례이다. 혹 자는 말하기를, “‘()’는 수고로운 일이다. 수고로운 일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바가 아니므로 남에게도 베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역시 통한다.

, 誇也. , 謂有能. , 亦張大之意. , 謂有功, 勞而不伐是也. 或曰: “, 勞事也. 勞事非己所欲, 故亦不欲施之於人.” 亦通.

 

늙은이를 잘 봉양하여 편안케 해주고, 붕우를 잘 사귀어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를 잘 품어주어 은혜롭게 해주는 것이다. 일설에는, ‘안지(安之)’는 늙은이들이 나를 편안케 생각하고의 뜻이며, ‘신지(信之)’는 붕우들이 나를 미덥게 생각하고의 뜻이며, ‘회지(懷之)’는 젊은이들이 나를 그리워한다의 뜻이라고 하는데 역시 통한다.

老者養之以安, 朋友與之以信, 少者懷之以恩. 一說: 安之, 安我也; 信之, 信我也; 懷之, 懷我也. 亦通.

 

정이천이 말하였다: “부자께서는 인을 편안스레 느끼시는 것이요, 안연은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이요, 자로는 인을 구하는 것이다.”

程子曰: “夫子安仁, 顔淵不違仁, 子路求仁.”

 

정이천이 또 말하였다: “자로ㆍ안연ㆍ공자의 뜻이 모두 남과 함께 하신 것인데, 다만 작고 큼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又曰: “子路顔淵孔子之志, 皆與物共者也, 但有小大之差爾.”

 

또 말하였다: “자로는 의()에 용감한 사람이니, 그의 뜻을 살펴보면 그 어찌 통속적 세력이나 이익에 구애될 인물이겠는가? 중점이 기수에서 목욕하겠다’(11-25)고 한 경지에 버금가는 자이다. 다음, 안자는 스스로 자기를 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을 자랑치 아니 하고 사람과 더불어 동화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공로를 떠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뜻이 위대하다 일컬을 수 있다. 그렇지만 유의(有意)적 요소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자에 이르게 되면, 마치 천지의 화공(化工)간접적으로 조물주를 연상시키는 말이 만물에 부여되어 저절로 돌아가는 듯하여 자신은 수고로 울 일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하시는 바이다. 지금 대저 굴레와 고삐는 말을 제어하는 데 사용하지만 소를 모는 데는 사용치 않는다. 사람들은 굴레 와 고삐가 사람이 제작했다는 것만 알고, 굴레와 고삐가 말의 특성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생각지 못한다. 성인의 조화가 역시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먼저 자로와 안연 두 사람의 말을 살펴보고, 그 후에 성인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면, 성인의 말씀이야말로 천지의 기상(氣象)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논어를 읽을 때는 문자로써 그것을 리회(理會)해서는 아니 된다. 반드시 성인의 천지기상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又曰: “子路勇於義者, 觀其志, 豈可以勢利拘之哉? 亞於浴沂者也. 顔子不自私己, 故無伐善; 知同於人, 故無施勞. 其志可謂大矣, 然未免出於有意也. 至於夫子, 則如天地之化工, 付與萬物而己不勞焉, 此聖人之所爲也. 今夫羈靮以御馬而不以制牛, 人皆知羈靮之作在乎人, 而不知羈靮之生由於馬, 聖人之化, 亦猶是也. 先觀二子之言, 後觀聖人之言, 分明天地氣象. 凡看論語, 非但欲理會文字, 須要識得聖賢氣象.”

 

 

정이천이 말하는 안인(安仁), 불위인(不違仁), 구인(求仁)’이 본 장의 대의를 파악하는 요령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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