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호학(好學)해야만 한다
5-2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열 가호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와 같이 충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27.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
『논어』 전체 중에서 참으로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명구 중의 명구로서, 나 도올이 항상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는 대목이다. ‘십실지읍(十室之邑)’이란 열 가호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邑]이다. 읍(邑)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강조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작은 마을에도 충직하고 신험있는 말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충신(忠信)한 자들이란 좋은 사람들이요, 착한 사람들이다. 충(忠)과 신(信)은 「학이(學而)」편, 「위정(爲政)」편에서부터 계속 군자됨의 핵심적 덕목으로 강조되어왔다. 따라서 이 장에서 충신(忠 信)을 구현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가치서열에서 결코 낮은 함의가 아니다. 이 문장에서 ‘필유(必有) …’와 ‘불여(不如) …’는 내용적으로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다. 나처럼 충신(忠信)한 자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충신한 자들도 나의 호학(好學)에는 절대 미칠 수 없다. 나의 삶의 지고의 이상이 호학(好學)에 있었음을 고백하는 공자의 최종적 설파다. 그것은 선(禪)으로 말하자면 견성(見性)의 최후 일갈이다.
충직하고 신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직함만으로 인간의 인간됨은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아무리 충직해도 그 충직함의 울타리에 다시 갇혀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충직의 울타리는 항상 좁은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그 충직함의 울타리를 다시 개방시켜야 한다. 자신의 충신(忠信)함을 뛰어넘어 사리를 파악하는 보편적인 안목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보편적인 안목에로의 끊임없는 자기개방, 자기해탈이 공자에게는 ‘배움’이라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배움’이란 어떤 고정된 인격의 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습득의 자세와 방법을 말한 것이다. 충신(忠信)은 지역적인 것이다. 그 지역적인 것이 지역적인 특성을 잘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지역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보편성의 획득을 공자는 ‘호학(好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호학’은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배우기를 좋아함’이라는 동명사적 상태이다. 인간은 충직과 신의로만 인간이 되질 않는다. 인간은 학문을 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배움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인의 실천은 인간의 모든 사태를 넓게 통찰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충신(忠信)함이 하나의 방편(方便)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코 인(仁)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이라는 이 「공야장(公冶長)」의 마지막 한마디야말로 동양문명이 교육에의 열정을 불사르게 된 그 인문성(civility)의 최종적 원천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언(焉)’을 뒤로 붙여 읽기도 한다. 그러면 ‘열 가호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찌 이들이 나처럼 배움을 좋아하는 것만 같지 않겠는가[십실지읍(十室之邑), 필유충신여구자(必有忠信如丘者), 언불여구지호학야(焉不如丘之好學也)]?’의 뜻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이들 모두가 나와 같이 배움을 좋아할 것이라는 긍정의 언사가 된다. 이설(異說)을 세우기 좋아하는 소라이(荻生徂徠)가 이러한 설을 열렬히 지지하지만 이것은 한낱 낭설에 불과하다. 교왕(矯枉)타가 과정(過正)하는 것이다.
찬란한 과거의 역사적 인물들을 주욱 훑어내리며 평론한 끝에 내자송(內自訟)을 말하고, 호학(好學)을 말하는 뜻은 무엇인가? 결국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인물이란 자기 허물을 자책할 줄 알고 또 끊임없이 자기 울타리를 뛰어넘어 배울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산 역사에 충실했다 할지라도 배움이 없으면 그는 로칼한 지역의 촌놈에 불과하고, 십실지읍(十室之邑)의 영웅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들이 쳐놓은 시공의 울타리 속에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것처럼 자기기만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상을 받고 일국민의 추앙을 받는다 해도 그에게 진정한 호학(好學)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 다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호학(好學)! 천고풍류인물(千古風流人物)을 논한 후에 던진 이 한마디에는 만고불변의 무게가 실려 있다. 나처럼 호학(好學)하는 자는 없다! 과연 이 한마디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누가 지금 던질 수 있겠는가?
‘언(焉)’은 글자 그대로 평범하게 해석한다. 그것은 윗 구절에 속한다. ‘호(好)’는 거성이다. ○ ‘십실(十室)’이란 소읍(小邑)이다. 충신(忠信)하기가 성인과 같다면 그는 태어난 바탕이 아름다운 자이다. 부자께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시는 분인데도 일찍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씀하여 사람들을 면려하시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질은 얻기 쉬우나 지극한 도는 얻어듣기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배움이 지극하면 성인이 될 수 있고 배우지 아니 하면 향인(鄕人, 촌놈)이 되고 말 뿐인데, 어찌 배움에 힘쓰지 않을까보냐!
焉, 如字, 屬上句. 好, 去聲. ○ 十室, 小邑也. 忠信如聖人, 生質之美者也. 夫子生知而未嘗不好學, 故言此以勉人. 言美質易得, 至道難聞, 學之至則可以爲聖人, 不學則不免爲鄕人而已. 可不勉哉?
이 나라의 정치가 지도자가 ‘준비된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것으로부터 모두 빠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진정한 호학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배우면 성인이 되고 배우지 아니 하면 촌놈이 된다고 하는 주희의 말을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아니 하리오? 서글프다! 촌놈들의 정치가 되고 말았으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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