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악(韶樂)을 배우니 고기 맛마저 잊다
7-13. 공자께서 제나라에서 순임금의 소(韶) 음악을 듣고 배우실 적에 삼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릴 정도로 열중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었다: “한 악곡의 창작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7-13.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
예술가로서의 공자의 삶의 역정을 잘 말해주는 단편이다. 새로운 음악의 발견, 새로운 작곡 가능성에 대한 도전, 예술적 경지의 비상, 배움의 희열, 탐미적 경탄, 음악을 통한 문명의 발견ㆍ문화의 추구, 이 모든 느낌이 이 한 장에 압축되어 있다.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공자가 35세 때, 소공이 삼 환과 부질없이 싸워 일어난 노나라의 내란을 피해 제나라에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었고, 그 커넥션으로 제나라의 경공(景公)과 통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즈음 소(韶) 음악을 배우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사마천의 「세가」 5는 기록하고 있으나, 최동벽(崔東壁)의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 논증하고 있듯 이 그 시점과 구체적 상황은 별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공자가 젊은 시절, 30대 어느 시점에 제나라라는 대국의 풍요로운 문물 속에서 수준 높은 예술과 학문을 탐구해가는 탐미적 유학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는 가설은 공자라는 위대한 인격형성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불가피한 설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다. 소 음악을 듣고 배운다는 것은 기타를 든 가인을 길거리에서 만나, 그가 타는 것을 듣고 경탄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소악은 편경, 편종을 갖춘 관현악의 방대한 오케스트라이며, 오늘 우리 나라의 국립국악원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편제를 갖춘 것이다. 주석가들이 보통 음악에 조예가 없고, 실제로 우리 한국인처럼 소 음악의 현실태에 가까운 정악 편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듯하다. 아마도 「세가」에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경공과 통하려 했다’는 기술은 경공과 함께 소악 연주를 궁궐 내에서 들을 수 있었던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공자는 당시 젊은 소인(素人)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공자가 악장을 개인적으로 사귀어 악관들이 연습하는 악궁에 특별 허가를 얻어 들어갔을 수는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하가 어떠하든지간에 공자의 배움의 열정을 나타내주는 한 단편이다. 그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었을 때, 그것은 거대한 충격이었고 공자의 삶의 한 비상의 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주는 이 장에 대하여 좀 색다른 논리를 펴고 있다. 옛날에 순(舜) 임금의 직계 후예인 진경중(陳敬仲)이라는 인물이 진(陳)나라에 보존되어 내려오던 소 음악을 훔쳐 제나라로 도망갔다【진나라는 원래 순 임금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소 음악이 제나라에 보존되었는데 그것을 제경공이 연주케 한다는 것은 참월이라는 것이다. ‘삼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렸다’는 것도 음악에 심취하여 경도된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망나니 제군(齊君)이 위대한 소 음악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통분을 느끼어 고기 맛도 못 느낄 정도로 3개월 동안이나 입맛을 버렸다는 식으로 푼다[孔子至齊, 聞齊君奏於韶樂之盛, 而心爲痛傷, 故口忘肉味. 황소]. 그리고 마지막 구절의 ‘지어사(至於斯)’의 ‘사(斯)’를 음악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이 제나라’의 뜻으로 푼다. 그렇게 되면, ‘이 위대한 음악이 이토록 천박한 제나라에 와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뜻이 된다.
또 일설에는 태사(大師) 지(摯)에 의하여 소악이 제나라에 전해졌다고도 하 고, 또 ‘위악(爲樂)’의 ‘위(爲)’를 작(作)으로 해석하지 않고 ‘규(嬀)’로 해석한다【육덕명의 「경전석문』에 의거】. 규(嬀)는 순 임금의 묘자(苗字)이다. 순임금의 후예들이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남쪽 60리 규예(嬀汭)라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규씨(嬀氏)가 되었다. ‘규악(嬀樂)’이란 ‘순 임금의 음악’이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모두 신주에 못 미친다.
‘부지육미(不知肉味)’는 정확히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기를 안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리 맛있는 고기음식을 먹어도 그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엇인가에 열중해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새로 발견된 펠리오사본 정현주에 의하면 노나라 장공(莊公) 22년에 진(陳)나라의 공자 완(完)이 소 음악을 가지고 제나라로 도망왔기 때문에 제나라가 소 음악을 전수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면서도 그로 인하여 ‘사(斯)’를 ‘제나라’로 해석한다든가, ‘부지육미(不知肉味)’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식의 무리한 해석을 가하지 않는다. 전체적 해석의 톤은 오히려 신주에 가깝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삼월(三月)’ 위에 ‘학지(學之, 그 음악을 배웠다)’라는 두 글자가 더 있다. ‘부지육미(不知肉味)’라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에 전일하게 경도되어 다른 자극에 전혀 반응치 아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 임금이 음악을 작곡하신 것이 이와 같은 경지의 성대한 아름다움에 이를 줄이야 미처 생각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그 감정과 멜로디의 구성이 잘 갖추어져 있는 악곡의 상태를 완벽하게 극한까지 밀고가는 그러한 경지에 빠져들어 가면서 스스로도 그 경탄(타우마제인)이 깊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신 것이다. 대저 진실로 성인 이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오묘한 경지에 미칠 수 있겠는가?
『史記』三月上有“學之”二字. 不知肉味, 蓋心一於是而不及乎他也. 曰: ‘不意舜之作樂至於如此之美’, 則有以極其情文之備, 而不覺其歎息之深也, 蓋非聖人不足以及此.
○ 범순부가 말하였다: “소악은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좋으니[盡美又盡善, 3-25], 음악으로서는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시는 3개월 동안 고기맛을 모르시고 탄미(歎美)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이니, 진실로 성(誠, Sincerity)의 지극함이요 감(感, Feeling)의 심오함이다.”
○ 范氏曰: “韶盡美又盡善, 樂之無以加此也. 故學之三月, 不知肉味, 而歎美之如此. 誠之至, 感之深也.”
예술을 모르는 자 철학을 할 수 없다. 예술은 종교의 상위개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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