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칸트적 ‘선택’
여성이 주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성이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 제기를 했던 적이 있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유아기 때의 역사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요령을 배웁니다. 만약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무척 불편해질 테니까요. 가령 어린아이가 김치 먹는 법을 배운다고 해봅시다. 밍밍한 모유나 분유만 먹던 아이에게 마늘과 고추로 버무려진 김치는 얼마나 불쾌하고 자극적인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이는 결국 김치를 먹게 됩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어린아이는 자신이 그것을 계속 먹지 않으면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는 부모의 가치 태도를 내면화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초자아’라고 말한 것이지요. 나중에 이 아이가 자라나서 어느 식당에 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고민 끝에 ‘김치찌개’를 선택합니다. 분명 그는 자유롭게 김치 음식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는 그 사람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제약적인 것인지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칭찬 때문에 먹기 시작했던 것을 이제는 자신이 좋아서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의 부모조차도 사실 공동체의 규칙을 따르고 있기에, 어린아이가 내면화하여 구성한 ‘초자아’ 역시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작동된다는 점입니다. 초자아와 관련된 프로이트의 통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일체의 간섭 없이 행해진 것처럼 보이는 자유로운 행위의 이면에 사실은 더 심오하고 근본적인 간섭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만 여성은 진정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이 맥락에서 우리는 이문열(1948~)【이문열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소설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한 우리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우리의 근ㆍ현대사를 아우르는 문제들, 즉 종교, 분단, 이데올로기, 페미니즘 등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선택』 등이 있다】의 『선택』이란 소설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소설을 통해 이문열은 페미니스트의 역사 이해가 왜곡된 것임을 은근히 비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 사회의 여성들이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그렇게 노예로만 살아온 것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직계 조상, 즉 장(張)씨 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사례를 통해 조선 시대 여성들도 나름대로의 주체적 삶을 영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다음은 소설 속 주인공 장씨 부인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어차피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할 수 없다면, 결국 어느 한쪽을 우선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면, 내 선택은 바뀌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해 늦가을 마침내 어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을 때 나는 또렷이 아뢸 수 있었다. “시 짓고 글 쓰는 일은 여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제부터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고 여자의 본업을 배우겠습니다.” 실로 그랬다. 나는 그날로 지난날의 선택을 감연히 버렸다. 『선택』
소설에 따르면 어렸을 때 장씨 부인은 다른 양반댁 규수들과는 달리 ‘시 짓고 글 쓰는 일’을 배우게 됩니다. 그녀는 사실 이것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녀 아버지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시를 짓고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녀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남성들이야 문장을 공부해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다른 남성들에 비해 훌륭하게 문장을 익혔다 하더라도, 조선 사회는 그녀의 학문적 역량을 포용할 수 없었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짐짓 비장한 어투로 이야기합니다. “시 짓고 글 쓰는 일은 여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제부터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고 여자의 본업을 배우겠습니다.”
장씨 부인의 선택을 이문열은 마치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 누구도 그녀에게 문장 배우기를 포기하고 가사를 배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이 자율적 선택이라는 이문열의 착각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율의 윤리학을 표방했던 칸트【칸트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도 철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상가이다. 그는 경험을 강조했던 경험론적 전통과 이성을 강조했던 합리론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종합한다. 또 삼대 비판서를 씀으로써 칸트는 과학(진), 윤리(선), 예술(미)이란 세 영역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낸다. 주요 저서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도덕형이상학원론』 등이 있다】의 논의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의 자율의 윤리학은 장씨 부인의 선택 혹은 이문열의 착각과 유사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해야만 한다.
『도덕형이상학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어떤 사태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자율적으로 결정해야만 합니다. 칸트는 우리 자신이 마치 보편적 입법자가 된 것처럼 행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허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정언명령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그 누구도 모순을 지적할 수 없는 도덕법칙의 명령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정언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가언명령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명령이다. 가령 ‘만일 네가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면, 너는 하루에 8시간씩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이 가언명령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조건적인 도덕 명령입니다.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활동을 입법 활동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입법 활동이란 사실 모종의 공동체를 전제해야만 의미를 갖는 활동입니다. 국회에서의 입법 활동이란 흔히 다수 국민의 여론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보편적 입법의 원리를 통해 구성된 칸트의 도덕법칙이란 것도 그의 순진한 생각처럼 완전히 자율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보편성이란 대개 공동체의 규칙과 암암리에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정언명령이 자유로운 주체의 고독한 내면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이제 우리는 장씨의 선택이 칸트의 정언명령을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도 자신이 보편적 입법자인 것처럼 공부를 포기하고 가사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자신의 도덕법칙을 만듭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을 자율적 선택이라고 이문열이 생각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문열은 직ㆍ간접적으로 칸트적인 소설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는 장씨 부인의 선택을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씨 부인이 만든 도덕법칙은 어떤 공동체와도 무관한 순수한 것이었을까요? 혹은 모든 시대의 여성에게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었을까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장씨 부인의 선택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고, 이문열이란 소설가의 착각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에서 여러분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택에 앞서 그녀가 숙고해서 만든 도덕법칙이란 것은 결국 조선 시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부여된 역할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끝내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법칙이었다는 점에서,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진정한 선택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스스로 행위 법칙을 만든 것처럼 허영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이전에 자신이 선택했던 것을 이제는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일종의 종교적 고별 의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그녀의 허영은 조선 시대 여성의 왜곡된 삶에 대한 하나의 초상화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녀가 애써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이미 조선 시대에 통용되던 가치 체계, 즉 자신에게 내재한 초자아의 명령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녀의 선택이 비록 자율적 선택의 모습을 띠더라도 그것은 결국 강요된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첫 번째 선택, 즉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려고 했던 선택이야말로 더 비범했던 것이 아닐까요? 비록 그것이 그녀에게 극심한 갈등과 고뇌를 제공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어쨌든 두 번째 선택으로 그녀는 비범한 삶을 마무리하고, 평범한 그러나 고상하다고 인정받을 만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그녀는 조선 시대 양반집 여성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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