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정에 있을 때의 공자 모습
10-4. 공자께서 궁궐문을 들어가실 때에는 몸을 숙이어 마치 비좁은 곳을 들어가듯 경건히 들어가시었다. 서 있을 때는 사람이 들락거리는 곳 한가운데(중문中門) 서 계신 법이 없었고, 다니실 때는 절대 문지방을 밟지 않으시었다. 10-4. 入公門, 鞠躬如也, 如不容. 立不中門, 行不履閾. 임금께서 항상 서 계시는 곳은 빈자리일지라도 지나갈 때는 얼굴빛을 근엄하게 바꾸시었고 발걸음은 종종걸음을 하시었다. 궁궐에서는 평소 말씀하시는 것이 부족한 듯하시었다. 過位, 色勃如也, 足躩如也, 其言似不足者. 계단을 올라 승당하실 때에는 치맛자락을 손으로 감아올리시고 허리를 굽히어 절하듯 하시었다. 숨을 멈추어 마치 숨이 죽은 듯하시었다. 攝齊升堂, 鞠躬如也, 屛氣似不息者. 궁궐에서 일을 다 보시고 나오실 때는 계단을 한 단 내려오시고는 얼굴빛을 환히 펴 시고, 밝고 편안한 모습을 지으시었다. 일곱 단을 다 내려오시고는 바로 새가 나래를 편 듯 활갯짓 하시며 빠르게 나아가셨다. 그러나 아까 임금이 서 계시던 빈자리를 다시 지나갈 때에는 다시 근엄하게 종종걸음을 하시었다. 出, 降一等, 逞顔色, 怡怡如也. 沒階趨, 翼如也. 復其位, 踧踖如也. |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운 궁궐의 정경과 함께 공자의 근엄한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간다. 사람들이 여기 쓰이고 있는 전문용어들의 구체적 함의나 외연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성향이 있는데, 항상 고전은, 고전의 전거(典據) 속에서 정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우선 ‘중문(中門)’에 관한 것이다. 광화문을 보아도 보통 문이 세 개 있기 때문에, 중문이 셋 중의 가운데 문인 것처럼 오해하는데, 여기 고전의 세계에서는 대문 하나를 모델로 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문 하나의 구조에 있어서 두 문이 닫히는 하단부에 그 문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얼(闑, 臬)이라는 것이다[闑, 謂門之中央所豎短木也]. 그런데 그것을 양문의 각기 중앙 하단에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의 영역이 삼분(三分)이 될 수밖에 없다[古止一門, 必分三處, 故以兩臬限之中爲中門, 東爲闑,東, 西爲闑,西]. 그리고 문 양쪽으로 주춧돌 위에 세운 나무기둥을 정(棖)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문설주’가 정확히 이 ‘정’에 해당된다. 그리고 대문 아래쪽의 문지방은 역(閾)이라고 하는데 이 얼이 있는 문에는 역이 없을 수도 있다. 문지방은 그 앞의 공간을 가로지를 때가 많다. 이를 간단히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
『군경궁실도(群經宮室圖)』에도,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에도 이렇게 되어 있다. 이 체계를 따르면 중문(中門)이란 ‘가운데 문’이 아니고, ‘대문의 정가운데 영역’이 된다. 공자가 그곳에 버티고 서있는 상황은 없었다는 것이다. ‘과위(過位)’의 위(位)는 임금이 출어(出御)할 때 항상 임시로 서있는 궁궐문 안의 어느 지점을 말하는 것이며, 앉아있는 보위(寶位)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의 맥락은 고주의 설대로 ‘군이 서있지 않은 빈자리[君之空位]’를 의미한다.
‘국궁(鞠躬)’이란 몸을 굽히는 것이다. ‘공문(公門)’이란 궁궐의 문이라서 높고 큰 것인데, 몸이 안 들어가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경건함의 지극한 태도이다.
鞠躬, 曲身也. 公門高大而若不容, 敬之至也.
‘閾’은 우핍(于逼) 반이다. ○ ‘중문(中門)’이란 문의 한가운데이다. 그것은 문설주[棖]와 문지방말뚝 얼[闑] 사이에 해당되는 곳인데 임금이 출입하시는 곳이다. ‘역(閾)’은 문지방[門限]이다.
閾, 于逼反. ○ 中門, 中於門也. 謂當棖闑之間, 君出入處也. 閾, 門限也.
『예기』 「곡례」상에 보면, “사대부가 공문(公門)을 출입할 때에는, 얼의 우측으로 다니고, 문지방은 밟지 아니 한다”라고 되어있다【沃案. 「곡례」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대부와 사가 임금의 문에 출입할 때는 얼의 오른쪽으로 다니고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大夫士出入君門, 由闑右, 不踐閾].”】.
『禮』: 士大夫出入君門, 由闑右, 不踐閾.
사현도가 말하였다: “문의 가운데에 서있는 것은 지존의 자리를 막는 것이요, 문지방을 밟고 다니는 것은 조심스럽지 못한 것이다.”
謝氏曰: “立中門則當尊, 行履閾則不恪.”
주희는 여기 얼이 하나만 있는 대문을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정(棖)과 얼(闑) 사이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되면 중문(中門)은 얼동(闑東)의 한가운데가 된다. 다음의 『예기』 인용문의 내용을 같이 고려하면, 군(君)이 지나다니는 길 과 사대부가 다니는 길이 같아진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중문은 두 얼의 사이[二闑之中間]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다산은 철저히 얼이 하나만 있는 문을 모델로 해서 생각하고, 임금과 신하가 같이 얼동(闑東)으로 출입하고, 이웃나라의 임금이 오면 빈(賓)인 그는 얼서(闑西)로 출입한다고 했다. 신하가 얼동으로 출입하는 것은 빈례(賓禮)를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人臣由闑右者, 不敢自居以賓禮也]. 그러니까 다산에 의하면 중문(中門)이란 대문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얼동(闑東)의 한가운데가 된다.
(過位). ‘위(位)’는 임금의 빈자리[虛位]이다. 그것은 문(門)과 병(屛) 사이를 일컫는 것으로, 인군(人君)이 조회를 볼 때 신하들을 기다리며 서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저(宁)라고도 하는 것이다. 임금이 계시지 않더라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공경하는 것은, 빈자리라고 해서 함부로 하지 않는 훌륭한 자세를 가리킨다. ‘언사부족(言似不足)’은 말을 마구 내지르지 않는 것이다. 말을 부족한 듯하는 것이다.
位, 君之虛位. 謂門屛之間, 人君宁立之處, 所謂宁也. 君雖不在, 過之必敬, 不敢以虛位而慢之也. 言似不足, 不敢肆也.
‘齊’는 자(咨)라고 발음한다. ○ ‘섭(攝)’은 잡아 올리는 것[摳]이다. ‘자(齊)’는 관복의 아랫자락 밑단감친 곳이다. 『예기』 「곡례」상에, 당에 오를 때에는 양손으로 아랫자락을 걷어올려 땅에서 한 자쯤 떨어지게 하여 밑단이 끌리지 않도록 한다고 했는데, 이는 옷자락을 밟아 넘어져서 용모를 잃을까 두려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병(屛)’은 감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숨을 죽인다는 뜻이다. ‘식(息)’은 콧구멍으로 들락날락하는 숨이다. 지존을 가까이 하면 숨쉬는 모양도 엄숙히 하는 것이다.
齊, 音咨. ○ 攝, 摳也. 齊, 衣下縫也. 『禮』: 將升堂, 兩手摳衣, 使去地尺. 恐躡之而傾跌失容也. 屛, 藏也. 息, 鼻息出入者也. 近至尊, 氣容肅也.
(出, 降一等). 육덕명(陸德明, 555~627: 당나라의 훈고학자)이 말하기를, “‘추(趨)’ 아래에 본래 ‘진(進)’이라는 글자가 없다. 속본에 이 글자가 들어갔는데 잘못이다”라고 하였다(『경전석문』).
陸氏曰: “趨下本無進字, 俗本有之, 誤也.”
○ ‘등(等)’은 계단의 층을 말한다. ‘령(逞)’은 긴장을 푼다(放)는 뜻이다. 지존에게서 점점 멀어질수록 기를 펴고 얼굴의 긴장을 푸는 것(解顔)이다. ‘이이(怡怡)’는 화열(和悅)한 모습이다. 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다. ‘몰계(沒階)’는 계단을 다 내려온 것이다【沃案, 옛날에 계단이 7층으로 되어 있었기에 ‘일곱 단을 다 내려오시고는’으로 번역했다. 그냥 ‘계단을 다 내려오시고는’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추(趨)’는 빨리 걸어서 자기 위치로 나아가는 것이다. ‘복위축척(復位踧踖)’은 마지막 남은 공경을 다하는 것이다.
○ 等, 階之級也. 逞, 放也. 漸遠所尊, 舒氣解顔. 怡怡, 和悅也. 沒階, 下盡階也. 趨, 走就位也. 復位踧踖, 敬之餘也.
이 한 절은 공자가 조정에 있을 때의 용태를 기록한 것이다.
○ 此一節, 記孔子在朝之容.
고대 궁정내의 실생활 모습을 전하는 귀한 자료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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