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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향당 제십 - 6. 공자의 복식에 대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향당 제십 - 6. 공자의 복식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1. 6. 2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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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공자의 복식에 대해

 

 

10-6A. 군자는 짙은 색과 검붉은 색으로는 깃과 끝동에 선을 두르지 않는다.
10-6A. 君子不以紺緅飾.

 

이 장은 주를 한 군데로 몰지 않고 한 조 한 조 따로 해설하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 같아 번호를 각 조()마다 따로 붙였다. ‘감색(紺色)’은 붉은 빛이 도는 심청색인데 우리말로는 그냥 짙은 곤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의미전달이 쉽다고 복식하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여기 군자편해(篇解)에서 이야기했듯이 공자가 스스로를 부르는 일인칭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이것은 군자를 일반화시켜서 군자는 모름지기 …… 해야 한다라고 공자가 말한 것이 되므로, 결국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의복습관을 이야기한 것이 된다.

 

보통 짙은 곤색(감색)이나 검붉은 색(추색)은 테두르는 장식으로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특수복과 혼동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짙은 곤색은 재계할 때 입는 옷이고 검붉은 색은 소상(小祥) 때 입는 연복에 쓰인다고 한다. 신출의 정현 주는 감색(紺色)은 제사 때 입는 대례복의 상의인 현색(玄色)이며, 추색(緅色)은 대례복의 바지의 색깔인 훈색(纁色)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색깔에 관한 것은, 한자의 뜻을 가지고 실제 색깔을 규정하기가 매우 힘들다.

 

 

()’은 고암(古暗) 반이다. ‘()’는 측유(側由) 반이다. 군자(君子)’는 공자를 가리킨다. ‘()’이란 짙푸른 심청색에 붉은 기운을 띄는 색이다沃案. 우리말로도 이런 색깔을 감색이라고 하나 젊은 사람에게 뜻이 전달 안 될 것 같아 짙은 곤색으로 번역했다. ‘감색하면 먹는 감의 색깔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이 감색은 목욕재계하는 재복(齊服)에 쓴다沃案, 이것도 다 선 대는 문제이지 전체 옷 색깔일 수는 없다. ‘()’는 깊게 붉은색[()]인데, 3년상을 지낼 때 13개월 지나면 소상(小祥) 때 입는 연복(練服)에 쓴다沃案, 이것도 역시 선 두르는 문제일 것이다. ‘()’이라는 것은 깃과 소매의 끝에 선을 대는 것이다.

, 古暗反. , 側由反. 君子, 謂孔子. , 深靑揚赤色, 齊服也. , 絳色. 三年之喪, 以飾練服也. , 領緣也.

 

 

10-6B. 다홍색과 보라색으로는 평상복을 만들어 입지 않으셨다.
10-6B. 紅紫不以爲褻服.

 

()’이란 아주 평범하게 입는 일상복이다. 속옷이 될 수도 있다. 이 평상복에는 다홍색과 보라색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출의 정현 주는 홍색(紅色)은 재복(齊服)의 바지의 색깔인 훈색(纁色)과 비슷하고, 자색(紫色)은 재복의 상의색깔인 현색(玄色)과 혼동되기 쉽기 때문에 쓰기 곤란하다고 해설해놓았다. 그리고 감()ㆍ추()는 광물염료이고, ()ㆍ자()는 식물성염료인데 모종의 금기대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여튼 옛날에는 눈에 띄는 색깔 을 평상복으로는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는 간색(間色)이라서(혼합색깔이다), 정도(正道)가 아니다. 또한 부인ㆍ여자들의 복식에 가깝다. ‘설복(藝服)’은 사생활의 복장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또한 이런 색깔로는 물론 조정의 예복이나 제사장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紅紫, 間色不正, 且近於婦人女子之服也. 褻服, 私居服也. 言此則不以爲朝祭之服可知.

 

 

총체적으로 생각해보면, ()ㆍ추()ㆍ홍()ㆍ자()에 모두 붉은 색조가 기조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붉은 색조는 와 관련이 있고, 피는 항상 금기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신성(神聖)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그것을 기피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10-6C, 더위를 당해서는 고운 갈포나 굵은 갈포로 만든 홑겹의 옷을 반드시 겉에 입으시고 맨살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10-6C. 當暑, 袗絺綌, 必表而出之.

 

마지막 구인 필표이출지(必表而出之)’는 보통 때는 집에서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생활하다가 외출할 때는 반드시 상의 하나를 더 걸치고 나간다는 뜻으로 고주는 풀었다.

 

 

()’은 홑겹의 옷이다. 갈포의 올이 세밀한 것을 ()’라 하고, 올이 굵은 것을 ()’이라 한다. ‘표이출지(表而出之)’는 먼저 속옷을 입고, 곁에다 치격(絺綌)의 갈포로 만든 옷을 다시 입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다. 그 몸뚱이가 비쳐서 보이는 것을 막게 하려는 것이다沃案. 이 말은 옳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름에 모시적삼만 입고 외출하는데 보기 흉하다. 반드시 그 위에 모시 두루마기를 다시 입어야만 속이 비치지 않고 빳빳하고 하이얀 여름옷의 품격이 살아난다. 옛날 품격 있는 집안에서는 여름에 두루마기를 곁에 걸치지 않고 밖에 나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개량한복 운운하는 것은 좋으나 이런 격조와 품위는 지켰으면 한다. 시경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맨살에 홑겹의 갈포를 입은 그대라 노래한 것이 바로 이 구절과 비슷한 상황이다.

, 單也. 葛之精者曰絺, 麤者曰綌. 表而出之, 謂先著裏衣, 表絺綌而出之於外, 欲其不見體也. 所謂蒙彼縐絺是也.

 

 

10-6D. 겨울의상으로, 검은 솜누비 윗도리를 입으실 때에는 검은털 염소가죽 바지를 껴입으셨고, 흰 솜누비 웃도리를 입으실 때에는 흰털 고라니가죽 바지를 껴입으셨고, 누런 솜누비 윗도리를 입을 때에는 누런 털 여우가죽 바지를 껴입으셨다.
10-6D. 緇衣羔裘, 素衣麑裘, 黃衣狐裘.

 

공자는 당대의 베스트드레서라 해야할 것이다. 아래위를 단색조로 맞추어 입되 소재를 달리하여 약간의 변조를 시도하고 있다. 윗도리의 자연섬유(, 모시, 비단이 다 가능)의 질감과 아랫도리의 털의 질감이 다 자연색조이므로 기묘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물론 아랫도리는 바지의 형태며 털이 있는 모피이다. ‘껴입는다라고 번역한 것은 아랫도리가 윗도리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고대의상은 최근 많은 발굴로 인하여 상당히 연구가 진척되었는데, 아랫도리가 상의 위로 올라온다는 형소(邢疏)는 잘못된 것이다. 대개 윗도리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다. 공자 당대의 의상의 수준이 요즈음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상대의 정교한 청동기나 옥그릇을 생각하면 의 상의 정교함은 너무도 당연한 사태라 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벽화의 우아한 주름치마 등 그 의상의 정교한 아름다움도 우리에게 충격을 주지만 전국초묘강릉(江陵) 마산초묘(馬山楚墓), 장사(長沙) 좌가당전국묘(左家塘戰國墓) 에서 출토된 비단섬 유제품의 직조문양과 자수도안의 격조 높은 사실감과 추상성은 찬탄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 그 제품의 수준을 목도할 수 있기에 그 충격은 더욱 큰 것이다. 생각해보면 메리야스제품이 없었다는 것, 여성의 월경대 문제가 요즈음과 같이 간편하게 해결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요즈음과 같은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질과 격조의 문제에 있어서는 고대인의 의상이 현대인의 의상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는 연혜(硏奚) 반이다. ()’는 검정색이다. ‘고구(羔裘)’는 검은 염소의 털가죽을 사용하여 만든 갖옷이다. ‘()’는 고라니새끼인데 색깔이 희다. 여우털은 색깔이 누렇다. 베나 비단 윗도리를 갖옷 아랫도리 위로 껴입으니, 색깔이 서로 걸맞아 상칭(相稱: 서로 조화됨)효과를 낸다.

, 硏奚反. , 黑色. 羔裘, 用黑羊皮. , 鹿子, 色白. , 色黃. 衣以裼裘, 欲其相稱.

 

 

10-6E, 일상적으로 집에서 입는 가죽옷은 단을 길게 내렸고, 오른쪽 소매는 짧게 하셨다.
10-6E. 褻裘長. 短右袂.

 

기발한 발상이다. 옛날 옷이 대체로 소매가 길기 때문에 활동하기에 불편하다. 그래서 남이 보지 않는 옷들은 오른쪽 소매를 짧게 해버렸다. 비대칭인 것이다. 공자의 실용주의정신, 그리고 째즈적 발상의 발랄함을 이런 데서 엿볼 수 있다. 요즈음도 감히 못하는 짓을 공자는 태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통해 우리는 공자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산 사람이었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는 참으로 컨템퍼러리 예술가였다.

 

 

()’이라 한 것은 몸을 따스하게 하기 위함이다. ‘단우몌(短右袂)’라 한 것은 일하기에 편리함을 도모한 것이다.

, 欲其溫. 短右袂, 所以便作事.

 

 

10-6F. 반드시 잠옷이 따로 있었다. 잠옷은 몸길이보다 반이 더 길었다.
10-6F. 必有寢衣, 長一身有半.

 

침의(寢衣)’를 요즈음의 파자마로 보지 않고 그냥 덮는 이불로 풀이하는 주석도 있으나(정현 주, 今時臥被), 나는 그렇게 풀이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상을 말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잠옷을 따로 이야기하고 있다. 낮에 입는 옷들은 대개 불편한 옷이라서 도저히 입고 잘 수는 없는 옷들이다. 옛 사람들도 분명 잠옷은 따로 있었다. 덮는 이불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잠옷을 입고 그 위에 또 이불을 덮었을 것이다. 산동은 추운 지방이며, 겨울에 난방이 부실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사태이다. 우리 같은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다.

 

잠옷이 원피스였는지, 투피스였는지는 모르지만 원피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몸에서 반 길이나 더 남은 천을 감아올려 아랫도리 보온을 보강했을 것이다. 투피스라도 아랫도리는 치마형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몽당 잠옷은 보기 흉하다.

 

 

()’은 거성이다. 목욕재계를 할 때에는 경()을 주로 함으로, 옷을 벗고 알몸으로 잘 수 없다. 그렇다고 신명의 의상(목욕재계 후에 입는 성스러운 옷)을 입은 채로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별도로 침의가 있는 것이다. 남는 반을 감 아 올려 발을 덮는다.

, 去聲. 齊主於敬, 不可解衣而寢, 又不可著明衣而寢, 故別有寢衣, 其半蓋以覆足.

 

 

여기 주자는 다음에 오는 정이천 설 때문에 이 구문을 제7장 아랫단으 로 옮겨놓고 재계(齋戒)하는 과정상의 일부분으로서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참으로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공자의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것이며 재계의 문제로 귀속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정이천 말이라면 금과옥조로 여기고 무조건 따르는 주희의 태도는 참으로 용렬하다. 그러한 태도가 도학정통론을 조장한 것이다. 주희가 기독교에 빠졌다면 광신도가 되었을 사람일 수도 있다. 공자의 일상생활까지도 성스러운 종교제식의 맥 락 속에서 해석하고 싶어하는 송유 멘탈리티를 엿볼 수 있다.

 

 

정이천이 말하였다: “이것은 착간이다. 이 구문은 7재필유명(齊必有明), ()’ 아래로 와야한다.”

程子曰: “此錯簡, 當在齊必有明衣布之下.”

 

나 주희는 생각한다. 정이천의 설대로 하면, 이 조()는 뒤에 나오는 명의(明衣)’ ‘변식(變食)’과도 같은 류()가 되어 서로 따르게 되고, 또한 이 장의 설구(褻裘)’ ‘호학(狐貉)’과도 또한 같은 류가 되어 서로 따르게 될 것이다.

愚謂如此, 則此條與明衣變食, 旣得以類相從; 而褻裘狐貉, 亦得以類相從矣.

 

 

정이천의 임의적 가설에 주희가 아부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적 필연성 이 없다. 여담이니까 한 말을 덧붙이자면 주희는 정이천을 거의 종교적으로 떠받든다. 거의 모든 사람을 씨()로 인용하는데 정이천ㆍ정명도만을 정자(程子)라 하여 자()로 인용한다. 그러니까 정자왈(程子曰)’정이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었다라고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공자 외로는 모든 사람에게 존칭을 쓰지 않았다. 정이천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를 개척한 장횡거에 대해서도 그는 때로 장씨(張氏)로 인용한다. 주희는 정이천 이외의 모든 송선하(宋先河)를 정이천보다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단 이정(二程)의 스승인 주렴계(周廉溪, 1017~1073)에 대해서만은 도학의 연원으로서 존숭의 염을 표한다.

 

 

10-6G. 여우와 담비의 두꺼운 털가죽으로 방석을 삼으시었다.
10-6G. 狐貉之厚以居.

 

이거(以居)’를 일상적인 생활복으로 해석하는데 영 어색하다. 청유 염약거(閻若璩)가 깔고 앉는 방석으로 본 것은 탁월한 견해이다[狐貉之厚以居爲坐褥]. 카페트나 방석 개념이었을 것이다. 정현 고주에 이르기를 재가이접빈객(在家以接賓客)’이라 했는데, 그것도 이런 방석이나 카페트 위에서 손님을 접대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호학(狐貉)’은 털이 길어 따뜻하고 푹신하니, 사거(私居: 집에서 거처할 때)에는 자기 몸에 알맞는 따스한 소재를 취한다沃案. 주자는 집에서 입는 옷으로 해석했다. 역시 방석이나 카페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狐貉, 毛深溫厚, 私居取其適體.

 

 

10-6H ()중이 아니면 허리에 패옥을 차는 것을 빼먹은 적이 없으셨다.
10-6H. 去喪, 無所不佩.

 

왜 고대인들이 그토록 허리띠에 옥을 주렁주렁 달아서 차고 다녔는지 요즈음 감각으로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러나 요즈음도 콧구멍, 아니 입술에까지 큰 장신구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보면 오히려 패옥이 더 합리적이었을 수도 있다. 장신구에 대한 인류의 열망은 고금동서 변함이 없다. 일정한 신분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상징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걸을 때 소리가 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심미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신변보안의 문제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서로가 비밀스러운 짓은 못할 것이다. 패옥을 차면 걸음걸이나 모든 것이 그만큼 절도가 있어야 하고 당당해져야 하는 것이다. 패 옥의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차는 방식도 허리띠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중에는 패옥을 찰 수가 없다.

 

 

()’는 상성이다. 군자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한, ()이 몸에서 떠나질 않는다沃案, 옛사람은 옥을 군자의 덕에 비유하였다. 옥뿐만 아니라 뿔이나 숫돌로 만든 것도 패물(佩物)에 속했다.

, 上聲. 君子無故, 玉不去身. 觿礪之屬, 亦皆佩也.

 

 

10-6I. 정식의 유상(주름)치마가 아닌 이상, 약식으로 가위질하여 허리를 좁게 만들어 입으셨다.
10-6I. 非帷裳, 必殺之.

 

제설이 분분하나 별로 참고가 되지 않는다. 정확한 실상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유상(帷裳)’이란 커튼 같이 내려뜨린 치마라는 뜻인데 가 위질 없이 주름을 잡아 허리띠에 꿰맨 것이다. 입을 때는 요즈음 월남치마처럼 둘러 입는다. 쭈욱 펴면 커튼처럼 보인다. 문제는 치마의 밑둥아리는 넓고 허리는 좁아야 하는데 보통은 가위로 재단하여 꿰맨다. 재단하는 것을 ()’라고 표현한다. 천을 자 른다는 의미도 되고 주름의 부한 느낌을 숨죽여 미끈하게 만든다는 뜻도 된다.

 

 

()’는 거성이다.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의 복장에 있어서 치마는 사각의 정폭을 사용하는데 꼭 휘장 같은 것이다. 허리띠에 주름만 잡아 꿰매는 것이고 옆으로 재단하여 삼각 쪼가리를 꿰맨다든가 하는 쇄봉(殺縫)이 없다. 이런 유상(帷裳)이외의 심의(深衣)상의와 치마를 연결시킨 두루마기 같은 선비 복장 같은 것은 허리폭이 아랫단의 반절쯤 되고, 아랫단은 허리폭의 두 배가 되니까, 이것은 주름을 잡은 것은 아니고 재단하여 꿰맨 것이다.

, 去聲. 朝祭之服, 裳用正幅如帷, 要有襞積, 而旁無殺縫. 其餘若深衣, 要半下, 齊倍要, 則無襞積而有殺縫矣.

 

 

10-6J. 검은 염소 가죽옷을 입거나 검은 유건을 쓰고 조문하시는 법은 없었다.
10-6J. 羔裘玄冠不以弔.

 

지금은 모든 사람이 상식적으로 검은 색깔이 상()과 관련된 색으로 알 지만, 원래 공자 당대에는 흰색(白色)이 흉사(凶事)의 색이었고, 검은색은 길사(吉事)의 색이었다. 슬픈 일에 어두운 색을 쓴다는 것은 음양의 법칙에도 잘 맞지 않는다. 기쁜 일에는 어두운 색을 쓰고 슬픈 일에는 밝은 색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상갓집에 갈 때 검은 염소갖옷을 입거나, 검은 관을 쓰거나 하지 않았다. 당시 관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건 비슷하게 생긴 것이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유건으로 번역했다. 생각해보고, 배울 것이 많은 공자의 행태에 관한 기술이다. 결혼식에 검은 양복을 입고 가고, 장례식에 흰 양복을 입고 가는 것도 예에 맞는 합당한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상에는 흰색을 주로 하고, 길사에는 검은색을 주로 한다. 조문을 갈 때에 복장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喪主素, 吉主玄. 弔必變服, 所以哀死.

 

 

10-6K. 매월 초하루에는 꼭 성대한 조복(朝服)의 위의(威儀)를 차리시고 조회에 나가셨다.
10-6K. 吉月, 必朝服而朝.

 

벼슬했을 당시의 공자의 일과를 말해주는 정보 중의 하나이다. 매월 초 하루의 조회는 현명한 군주의 시기에는 지켜지기도 하고 또 그렇지 못할 때는 유명무실해지기도 하였다.

 

 

길월(吉月)’은 매달의 초하루를 말한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하고 계실 동안에 이와 같이 하시었다.

吉月, 月朔也. 孔子在魯致仕時如此.

 

이 한 절은 공자의 의복에 관한 제도를 기록한 것이다.

此一節, 記孔子衣服之制.

 

소동파가 말하였다: “이것은 공씨 집안에 내려오는 기록으로서 자질구레한 예절을 잡기(雜記)한 것일 뿐이므로, 공자만의 일이 아닌 딴 것도 끼어 들어갔을 수 있다.”

蘇氏曰: “此孔氏遺書, 雜記曲禮, 非特孔子事也.”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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