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둘’로 생각하는 바디우
카프카의 통찰은 헤겔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남녀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가족’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전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사랑-가족-사랑-가족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연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카프카의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생산하는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숙고해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실마리로 우리는 왜 헤겔이 그렇게도 사랑에 대해 조바심을 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가족으로 지양(止揚, Aufheben) 되지 않는다면 유아론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위험성이 그가 사랑을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 즉 ‘하나(the One)’라는 이념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라는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 사랑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게 됩니다. 여기에 현대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 1937~ )【바디우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칸토르의 집합론, 맑스의 혁명이론,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 체계를 구성한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이 진리를 발견하거나 생산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역할은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이라는 네 가지 과정이 생산해낸 진리가 소통될 수 있는 통일된 개념적 공간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 『존재와 사건』, 『주체의 이론』, 『철학을 위한 선언』 등이 있다】의 철학적 통찰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라는 헤겔적 이념을 거부하면서, 사랑을 물로 사유하려고 했던 중요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하나’의 지배가 균열되었을 때, ‘둘’이 생각되어지는 장소이다. (……)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왜냐하면 이 둘은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하나’의 법칙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잉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 사랑이란 것은 만남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é) 속에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Manifeste pour la philosophe)』
사랑에 대한 조언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그런 조언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사랑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진정 두 사람 사이의 고유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을 ‘둘(the Two)’로 정의 내립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남녀에게는 ‘하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선언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사랑하는 당사자 ‘두’ 사람을 제외한 일체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낙랑공주는 자신과 호동왕자의 사랑 사이에 개입하는 일체의 요소를 거부하고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국가를 지켜주는 자명고(自鳴鼓), 외적이 침범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주는 북을 찢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국가도, 아버지도, 그리고 공주라는 신분도 사랑의 관계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사랑에 간섭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그것들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낙랑공주는 사랑이란 사건에 충실했던 주체였습니다. 반면 그녀가 사랑했던 호동왕자는 불행하게도 사랑을 배신했던, 사랑 이외의 다른 요소를 마음에 품었던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낙랑공주의 사랑이 비극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연인의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사실 사랑은 가족도, 국가도, 신분도, 신념도 초월하게 만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 즉 ‘둘’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열정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만드는 혁명적인 힘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사랑을 계속 ‘둘’이라고 정의하면서 ‘둘’에 충실하라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디우에게 있어 남성과 여성의 경험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하나’로의 통일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성은 생리를 하고 또 임신을 합니다. 이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남성도 육체적으로 여성의 이런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녀가 생리를 할 때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또 그녀가 임신했을 때도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하나’로의 통로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다시 말해 불가피한 ‘둘’이라는 상황하에서만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자신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성취한다는 것, 즉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실 사랑의 종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둘’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 논리에 포획되었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유아론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디우가 강조한 ‘둘’이란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공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디우의 사랑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등반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산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매번 산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산’과 ‘우리 자신’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서 구성되는 둘의 관계를 무한히 펼치게 될 뿐입니다. 반면 산을 완전히 알았다거나 혹은 산과 하나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실 등산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런 오만한 생각을 갖게 된다면, 등산가는 심한 경우 산에 의해 죽음을 맞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처럼 산은 자신을 정복했다고 오만하게 자만하는 사람을 품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등산가들은 항상 산을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산을 알기 위해서 다시 산을 찾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산은 ‘둘’이라는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발산하면서 그들을 매혹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바디우의 사랑은 유아론에 빠질 위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아론은 ‘둘’을 ‘하나’로 여기는 헤겔적인 착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