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머리말
하나
나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90퍼센트의 실패를 겪은 뒤에야 10퍼센트의 성취를 이루는 둔재의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지닌 원초적 ‘싸늘함’이 체질에 안 맞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이념보단 체질을 더 중시한다. 체질이 훨씬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은 천재다. 내 지적 범위 내에서는 그 견줄 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매혹시켰다. 다름아닌 그의 유머 때문이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슴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천재인데도 가슴이 따뜻한, 천지간에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천재 가운데 그처럼 유머를 잘 구사한 인물은 없으리라고(있어도 할 수 없고^^). 천재의 유머! 아니, 더 정확히는 유머의 천재! 그러니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국땅의 한 점포에서 벽에 쓰여진 「호질(虎叱)」을 촛불 아래 ‘열나게’ 베껴쓰자, 주인이 묻는다. 그걸 대체 뭐에 쓰려느냐구. 조선에 돌아가 친구들에게 보여줘 한바탕 배꼽잡고 웃게 만들려고 한다는 게 연암의 답변이었다. 「호질(虎叱)」보다 연암의 행동이 더 배꼽잡을 일 아닌가?
하지만 누군가 내게 대체 왜 이 책을 썼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이렇게 답할 작정이다. 연암이 얼마나 ‘유머의 천재’인지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열하일기』의 웃음을 사방에 전염시키고 싶었다고, 그 웃음의 물결이 삶과 사유에 무르녹아 얼마나 열정적인 무늬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노라고.
둘
이 책을 쓰는 동안 많이 아팠다. 몸을 추스르느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산에 다녀올 때마다 그만큼 힘이 생겼고, 그 힘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산들의 기운이 연암의 웃음과 함께 독자들의 가슴속에 전해졌으면, 정말 기쁘겠다.
가장 멋진 산행은 설악산이었다. 봉정암 진신사리탑 위에서 본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의 장엄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설악의 숨겨진 진경(珍景)들을 안내해준 임영철씨와 함께했던 친구들, 그리고 주말마다 함께 산을 오르는 연구실 ‘등산반’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준 산들에게 이 책이 작은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산을 지키는 나무들의 애꿎은 생명만 희생시킨 건 아닌지, 다만 두려울 따름이다.
2003년 2월
대학로 ‘카페 트랜스’에서, 고미숙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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