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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프롤로그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프롤로그

건방진방랑자 2021. 7. 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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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여행ㆍ편력ㆍ유목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맹혹은 공간치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방향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웬만큼 멋진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기념비를 봐서는 도통 감동을 받지 않는 쿨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간지각력이 제로에 가까운 편인데, 거기다 남한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함백 탄광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여행이란 늘 기차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것이었을 뿐, 이국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 변화무쌍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아쉬워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살던 그곳이 바로 도시인들이 꿈꾸는 이국적 공간이었던 셈이다. 도시인이 된 지 꽤나 오래되었건만, 지금도 여름이면 계곡으로, 바닷가로 혹은 해외 휴양지로 피서를 떠나는 휴가풍속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하기야 이런 건 사소한 핑계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행에 대해 냉소적인 진짜 이유는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노라마식 관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파노라마란 무엇인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퍼레이드다. 거기에는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얼굴과 액션(action)이 지워져 있다. , 그때 풍경은 자연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생명의 거친 호흡과 약동이 생략된 침묵의 소묘일 따름이다. 이런 구도에선 오직 주체의 나른한 시선만이 특권적 지위를 확보한다. 시선이 클로즈 업되는 순간, 대상은 전적으로 거기에 종속될 뿐.

 

도시인들이 보는 전원,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구, 서구가 발견한 동양. 사실 이런 건 모두 외부자가 낯선 땅을 흘깃바라보고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던가. 그 허상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한 시대와 사회를 주름잡는 표상이 되면 모두 그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엔 그것을 대상에 위압적으로 덧씌우는 식의 악순환을 얼마나 반복했던지.

 

내가 아는 한 여행이란 이런 수준을 넘기가 어렵다. 하긴, 그런 건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신체적 체험과 삶의 낯선 경계가 펼쳐질 수 있다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바야흐로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이 한눈에 조망되는 시대가 아닌가.

 

2002년 초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간 적이 있다. 마흔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 몇몇 후배들에 의한 강제출국(?)이었다. 특별한 기대를 하지도 않았건만, 나는 비행기가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옹색한 데 정말 놀랐다. 기차 여행이 주는 쾌적함, 설레임, 비전(vision) 따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꽉 끼는 의자와 좁은 통로, 고공(高空)을 오를 때의 기괴한 소음, 양식ㆍ한식ㆍ간식이 뒤섞인 국적불명 (혹은 인터내셔널?)의 식사. 오직 폼나는 건(?) 지독하게 복잡한 출입국 통과 절차뿐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여행지에서였다. 그 유명한 천안문과 자금성 앞에 섰을 때, 나는 여행의 감격은커녕 허탈감을 금할 수 없었다. ‘이건 뭐, 티브이나 영화에서 본 것과 똑같잖아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천안문과 자금성의 규모가 별볼일 없어서가 아니라, 그 엄청난 스케일이 평범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이미 영상이 실물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천안문뿐 아니라, 이름난 고적지일수록 그런 허전함은 피할 길이 없었다. 뭔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건 뻥과자장사, 만두가게 등이 늘어선 ‘70년대형뒷골목이거나 지난 시대에는 흥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서적의 거리 유리창(琉璃廠)’ 같은 곳을 배회할 때뿐이었다. 그런 데서 뭔가 찐한 감흥을 느낀 건 풍경의 이질성 때문이라기보다 그 공간들이 지닌 시간적 낙차, 혹은 무상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3부를 펼치면, 내가 왜 유리창에서 벅찬 감격을 느꼈는지 눈치채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짧은 중국여행 이후 여행에 대한 원초적 냉소는 더더욱 치유할 길이 없어진 셈이다.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떤 화려한 여행도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패션혹은 레저이상이 되기 어렵다. 하나의 문턱을 넘는 체험이 되지 않는 여행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는 대충 이렇다.

 

그런 내가 어떻게 열하일기라는 여행기의 열광적(fan)이 되어 그것을 안내하는 글을 쓰게 되었던가?

 

 

 

 

 편력(遍歷)

 

 

나는 편력을 좋아한다. 20대 시절, 내 사주에는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있다고 어떤 얼치기 점쟁이가 말한 적이 있다. 그걸 들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이후의 내 삶의 여정을 보면 편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라?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의(偏倚) 이른바 클리나멘(clinamen)’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의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열하일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도 이런 우발적인 편의들을 통해서였다.

 

대학시절, 나름대로 독일 문학에 심취했던 내가 한국 고전문학을 택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졸업반 무렵, 당시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흥규 선생님의 강의를 신청했는데, 그게 현대비평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고전소설 강독이었다. 강의 변경을 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들었는데, 그때 얼떨결에 춘향전,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인생행로가 급선회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원전으로 읽은 고전들은 기묘한 울림으로 내 신체에 육박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안내자의 인도로 인해 더한층 증폭되었다. 고전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 아니면 논리와 열정으로 가득찬 교수법에 대한 감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지적 욕망은 한국 고전문학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첫번째 클리나멘(clinamen).

 

전공 기초지식은 물론이고 한문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도 없이 고전문학을 택한 나는 무식의 용맹함 말고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선배들의 멸시천대’(?) 속에서 고전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짧고 쉬운 시조(時調)’로 석사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곁다리로 하는 말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쓴 글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석사논문을 들 것이다. 당시는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시대였는데, 그때 소모된 원고지를 쌓아 놓는다면 아마도 족히 한 리어카는 될 것이다. 수없이 고쳐 쓴 뒤 선배들에게 보여주면 가차없는 교정 지시가 내려지고, 또 다시 고쳐 쓴 뒤 지도교수에게 보이면 완전히 씨뻘건 피바다 (빨간 볼펜으로 교정을 했기 때문)가 되어 되돌아왔다. 이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쳤는지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당시 나는 돈도 없었고, 연애도 제대로 안 되는 한심한 청춘이었지만, 그런 건 정말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건 오직 글쓰기에 대한 욕망뿐이었다. 멋진 글을 쓸 수만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뜨거운 한철을 통과했다. 물론 그렇게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석사논문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건이 되었을 뿐이다. 워낙 밑바닥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쓰기까지 겪은 수련과정은 이후 내 지적 편력의 불멸의 초석이 되었다. 지식이란 그렇게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사이를 넘나드는 흐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운 기회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식의 지적 풍토가 있었다는 것이 내겐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지. 안타깝게도 이후 그런 행운을 누렸다는 풍문을 누구한테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황폐함 같은 흉흉한 담론이 떠돌 때면, 내게는 늘 석사논문을 쓰던 그 화려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쨌든 이런 경로를 거쳐 박사과정에 들어가 고전문학 풍토에 좀 익숙해지려는 순간, 이번에는 맑스주의라는 회오리에 휩쓸리게 되었다. 876월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투쟁이 거세지면서 대학원에도 맑스주의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운동권에서는 이미 입문의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 노선을 둘러싸고 온갖 정파로 분화되고 있었건만, 고전문학이라는 변방(!)의 연구자들에게까지 물결이 몰아친 건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거리에 나선 이후였다. 물론 당시 내 나이도 20대 후반, 청춘의 막바지에 들어섰으니 이래저래 뒷북치는 꼴을 면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그러나 늦바람이 무섭다고, ‘늦깎이로 읽기 시작한 공산당선언, 독일이데올로기, 프랑스혁명사 3부작에 나는 한마디로 번개를 맞은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변증법유물론을 통해 그때까지 희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삶과 사유의 추상성이 한방에 날아가버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맑스의 수사학은 환희그 자체였다.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고 전투적인 내용을 그토록 선정적(?)이고 생기발랄한 언어로 구성할 수 있다니! 석사논문을 쓴 이후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었던 글쓰기에 대한 통념이 전면적으로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클리나멘(clinamen).

 

이후 박사과정 내내 맑스주의는 내게 있어 세계관과 방법론의 토대이자 구심점이었다. 사설시조(辭說時調), 19세기 대중시조, 잡가(雜歌)건 나는 고전문학을 맑스주의와 결합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투쟁이었고, 동시에 나의 삶과 지식이 변혁운동에 동참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도 했다(솔직히 나는 당시에 벌어진 노선투쟁에 대해 지금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쪽 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한참 지나고 보면 다른 쪽 줄에 서 있는 적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후미에서 근근히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시조를 예술사적 흐름 속에서 조망한 박사논문은 그런 안간힘의 최종 결정판이었다. 고전문학에 대한 열정과 맑스에 대한 사랑, 박사논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아마 이쯤 되지 않을지. 박사논문은 어떻게 썼냐고? 아주 쉽게(!) 썼다. 그 사이에 컴퓨터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다, 고전문학계에서 좌충우돌하며 쌓은 연륜도 있어 특별한 수난없이 통과했다. 그래서 석사 시절에 겪은 피바다가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박사논문을 쓴 뒤, 나는 마침내 황량한 광야에 섰다. 소속도 지위도 없는 30대 후반의 박사 실업자로, 이미 맑스는 유행 저편으로 밀려났고, 혁명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터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갔다. 서태지와 모래시계에 열광하는 한편, 몇몇 구좌파(?) 동료들과 자본을 한 구절 한 구절 낭독하고,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원텍스트와 함께 읽어가던 도중, 푸코와 들뢰즈/가타리, 이른바 68혁명 이후의 철학자들과 접속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세번째 클리나멘(clinamen).

 

 

그들’(!)과의 만남 이후 나는 그간 철의 강령처럼 지니고 다녔던 근대, 민중, 민족이라는 척도를 놓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문학이라는 척도까지.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근대주의라는 목적론의 산물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그 필드(field)’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뼈아프게 확인해야 했다.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편력이 시작되었다. ‘탈 근대혹은 근대 외부라는 새로운 화두를 들게 되면서 삶과 지식 혁명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위로서 80년대를 통과한 친구들을 만나 집합적 관계를 구성하면서 분과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을 감행하게 된 것. 80년대에 혁명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혁명은 나의 지식과 일상 곳곳에서 살아 숨쉬는 과 같은 존재였다. 그 이후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라는, 좀 길지만 아무 데서나 끊어 읽어도 무방한 이름을 가진 지식공동체가 내 삶의 거처가 되었다. 처음 수유리에서 시작하여 지금 대학로 한복판에 오기까지 나는 이 필드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온갖 지식의 향연에 참여하였다. ‘세계는 넓고 공부할 건 정말 많구나!’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게 그동안 내가 터득한 삶의 지혜다(이후 수많은 변전을 거쳐 지금은 <남산강학원감이당>이 내 활동의 거처가 되었다).

 

그 인연조건에 의해 2001년 봄 마침내 열하일기를 만났다! 당시 연구실 멤버들이 문학계간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창간호에 동서양의 외부자들을 다루는 특집을 꾸미게 되었다. 카프카, 루쉰, 이상, 박지원 등 한 시대를 주름잡은 거물급(?) 작가들이 선정되었다. 그런데 순전히 고전문학 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박지원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걸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로 배치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일 터, 그런 점에서 나와 박지원의 만남은 연구실의 지적 실험과 집합적 관계에 의해 벌어진 일대사건이었다. 생각하면, 참 신기하기 짝이 없다. 고전문학 연구자이면서, 그것도 18세기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내가 정작 학교에 몸담고 학위논문을 쓸 때는 읽을 필요도, 엄두도 내지 않고 방치했던 그 텍스트를 긴 우회로를 거쳐 만나게 되다니! ‘운명적인 해후!’

 

그렇게 외적 강압(?)에 의해 집어든 열하일기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어떤 텍스트하고도 견주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동안 내가 학습한 표상체계로는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일종의 기계였다. 거기에 담긴 것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장정이었다. 파노라마적 관광도 아니고,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도 아닌, 마주치는 것마다 강렬한 악센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공간적 편력,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여행이라는 이름으로도, 편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오직 유목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유목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인용되면서 널리 회자된 구절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거기일 터, 아포리즘(aphorizm)만큼 유목의 성격에 대해 잘 말해주는 것도 드물다.

 

열하일기를 만난 뒤, 나를 사로잡은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이제서야 이 텍스트를 접하게 된 것일까?’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내가 받은 교육과정 어디에도 열하일기를 통째로 읽는 코스는 없었다는 것. 이유는 간단했다. 문학이라는 척도에 의해 열하일기가 낱낱이 해부되었기 때문이다.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같은 소설적 텍스트거나, 혹은 상기(象記)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같은 명문(名文) 등으로 분해되어 파편적으로만 학습되었던 것이다. 열하일기라는 대양(大洋)이 아니라, 중간에 언뜻언뜻 보이는 산호초들만을 완상한 셈이었다고나 할까. ‘문학이라는 제도는 그토록 허망한 것이다. 유목을 허용하지 않는 정착민의 말뚝!

 

열하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모든 여행기는 그렇게 쓰여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탐욕적으로 여행기의 고전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동방견문록을 비롯하여 걸리버 여행기, 이븐 바투타 여행기, 돈키호테, 을병연행록등등,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열하일기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냐면 그것들은 모두 여행에 관한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국적 풍광과 습속을 나열하거나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스토리를 엮어가거나, 기념비와 사적들, 사람들의 이름을 밑도 끝도 없이 주절대거나. 무엇보다 거기에는 유머가 없었다. 이븐 바투타의 지리한 언설은 정말, 끔찍할 지경이었다. 사람 이름은 또 왜 그렇게 긴지(보통이 한 줄, 심한 건 서너 줄인 경우도 있었다)! 돈키호테조차도 열하일기에 비하면 따분한 편에 속한다. 결국 형식이 어떻든 그 텍스트들은 스쳐 지나가는 외부자의 파노라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행기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글쓰기의 모든 경계들, 여행자와 이국적 풍경의 경계, 말과 사물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카프카라면 아마 이런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전문

 

 

박차와 고삐, 말모가지와 말대가리의 경계가 없는 인디언의 말달리기, 인디언과 말, 그리고 광야의 경계조차 사라진 고요한 질주’!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강렬한 액션의 흐름뿐이다. 그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아니, 한 시인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열하일기는 바로 그런 유목적 텍스트다. 그것은 여행의 기록이지만, 거기에 담긴 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찐한접속이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견의 현장이며, 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경이의 장이다. 게다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다채로움은 또 어떤가. 때론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한가 하면, 때론 장중하고, 또 때론 한없이 애수에 젖어들게 하는, 말하자면 멜로디의 수많은 변주가 일어나는 텍스트, 그것이 열하일기.

 

따라서 열하일기는 일회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장을 펼쳐보인다. 계속 다르게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내 지적 편력기에는 계속 새로운 이정표들이 그려진다. 나도 이제 편력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싶다! 내 글쓰기도 유목적 지도가 되었으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nomad)’가 되기를! 어느덧 내 욕망의 배치는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

 

그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좀더 많은 벗들과 함께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 여정마다에서 새로운 마주침들이 일어나기를! 그 마주침 자체가 또 하나의 유목이 될 수 있기를!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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