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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1부, 1장 젊은 날의 초상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1부, 1장 젊은 날의 초상

건방진방랑자 2021. 7. 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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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는 너고, 너는 나다

 

 

1장 젊은 날의 초상

 

 

신체적 특징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 원제는 과정록過庭錄)에는 대략 이런 인상을 풍기는 한 선비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1부 전체의 내용은 이 책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힌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략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 그림 역시 연암다운’(?) 분위기를 선명하게 포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연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본다면, 그저 절의가 곧고 기상이 드높은 유학자 정도로 기억할 터이다.

 

그러나 마음을 크게 먹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연암의 신체적 특징 몇 가지가 감지되기는 한다. ‘훤칠한 풍채’, ‘윤기 흐르는 안색, 쌍꺼풀진 눈, 크고 흰 귀’, ‘수십 보 떨어진 담장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고 우렁찬 목소리’, ‘말술을 마시고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일단 논쟁이 붙으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았다는 다혈질적 기질등등.

 

한마디로 연암 박지원은 넘치는 활력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인물인데, 한 지인은 그러한 기질을 순양의 기품을 타고나 음기가 섞이지 않았다는 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요즘 유행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빗대 말하자면, 소위 태양인에 해당하는 셈이다. 물론 사상의학을 체계화한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1900년이나 되어야 비로소 완성되니 연암 당시엔 그런 식의 체

질 분류가 정착되지는 않았을 터이나, 중국 고대의 의학서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전통에 따르더라도 연암은 태양증이라 분류될 정도로 양기(陽氣)가 강했던 모양이다.

 

 

 연암 박지원 초상

박지원의 손자인 박주수(朴珠壽)의 그림으로, 후손 박찬우가 소장하고 있다. 매서운 눈매와 우람한 몸집이 인상적이다. 이 몸으로 그 무더운 8월에 열하에 갔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그것도 무박나흘, 그런데도 몸져 눕지 않은 걸 보면, 정말 건강한 체질이었던 것 같다. 순양의 기품을 타고 났다는 태양인 박지원의 힘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초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단지 한 거인의 카리스마만을 본다면, 당신은 아직 연암을 온전히 이해한 게 아니다. 그의 신체 곳곳에 (특히 수염) 출렁이는 유머와 빛나는 패러독스를 감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당신은 연암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부탁건대, 독자들은 부디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 이 초상을 거듭 음미해주시기를, 계속 그의 얼굴이, 신체가 다르게 느껴지는 변화를 체험하게 될 터이니.

 

 

 

 

태양인

 

 

그와 관련해 과정록過庭錄4에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만년에 면천군수를 지내던 시절, 성 동문에 올라 앞이 훤히 트여 가슴속의 찌꺼기를 씻어낼 만하구나[眼界稍豁, 可以盪胸]”하며, 밤늦도록 달구경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날 밤 귀신이 그 동리의 한 여자에게 들러붙었다. 귀신이 그 여자를 통해 말하기를, “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 오자 그 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군수가 동문에 와서 달을 구경하니 나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한테 붙어 살아야겠다[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고 했다. 발광하여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인을 남편이 붙들어다 관아 문밖에 데려다 놓았는데, 관아의 업무가 시작되어 일을 집행하는 연암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듣자 놀라 울부 짖으며 달아났다. 그 이후 병이 싹 나았음은 물론이다.

 

귀신을 질리게 할 정도의 양기(陽氣)’?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시대와 불화한 지식인들이 숙명처럼 끌고 다니는 어두운 그림자가 전혀 없다. 그는 고독함조차도 밝고 경쾌하게 변화시킨다.

 

 

사흘 낮을 이어 비가 내리니 가련하게도 필운동(弼雲洞)의 번성하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붉은 진흙으로 변하고 말았네. (……)

雨雨三晝, 可憐弼雲繁杏, 銷作紅泥.

 

긴긴 날 무료히 앉아 홀로 쌍륙(雙六)을 즐기자니, 바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를 부르고 백()을 부르는 사이에 그래도 피아의 구분이 있어 승부에 마음을 쏟게 되고 번갈아 가며 적수가 되니, 나도 정말 모를 일이지,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하여도 역시 편애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어졌다면 어엿한 일물(一物)이라 이를 수 있으며 나는 그들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이를 수 있는데, 오히려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편들거나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永日悄坐, 獨弄雙陸, 右手爲甲, 左手爲乙, 而呼五呼百之際, 猶有物我之間, 勝負關心, 翻成對頭. 吾未知, 吾於吾兩手, 亦有所私焉歟. 彼兩手者, 旣分彼此, 則可以謂物, 而吾於彼, 亦可謂造物者, 猶不勝私, 扶抑如此?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를 일이지,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들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남수에게 답함[答南壽]

昨日之雨, 杏雖衰落, 桃則夭好. 吾又未知, 彼大造物者, 扶桃抑杏, 亦有所私於彼者歟.

 

 

여기에 담긴 심오한 철학적 내용은 일단 덮어두기로 하자. 그저 비가 주룩주룩 오는 봄날,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양손을 갑과 을로 나누어 쌍륙놀이를 하는 광경만을 떠올려보자. 게다가 승부에 집착하여 한쪽 손을 편들 정도로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이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유쾌해지지 않는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불평지기와 고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 빛나는 명랑성!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는 태양인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타고난 바탕은 막힘이 없이 통하는[疏通] 장점이 있고, 재주와 국량은 교우(交遇)에 능하다.”

 

이 구절은 기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연암의 기질과 일치한다. 그는 진정 지식과 일상, 글쓰기에서 막힘이 없었으며, 우정이 지상목표였을 정도로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탁월했다. 물론 태양인은 한 고을의 인구를 1,000으로 잡을 때 불과 3~4명에서 10명에 불과할 정도로 드문 체질이다. 그것은 그만큼 세상을 평탄하게 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암이 바로 그러했다. 화통하여 막힘이 없었지만, 위선적이거나 명리를 따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컨대 그는 담소를 좋아하여 누구하고나 격의없이 며칠이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말 중간에 끼여들기라도 하면 그만 기분이 상해 하루 종일 그 사람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도 이런 기질을 잘 알아서, “이것은 내 기질에서 연유하는 병통이라 고쳐보려고 한 지 오래지만 끝내 고칠 수 없었다. 내가 일생 동안 험난한 일을 많이 겪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此吾氣質之病, 矯揉之久, 終莫能改. 一生備經險巇, 未嘗不由於此](과정록過庭錄3)”고 토로하기도 했다. 스스로 질병이라 여길 정도의 이 투명한 열정이 그의 삶을 계속 주류의 사이클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리라. 하지만 그로 하여금 인식과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추동한 힘 역시 바로 그 투명한 열정의 소산일 터, 이 또한 생의 역설이라면 역설인 셈이다.

 

 

신윤복 그림 쌍륙: 쌍륙삼매(雙六三昧)

한량으로 보이는 선비들이 기생들과 쌍륙놀이에 빠져 있다. 쌍륙놀이란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두 편이 15개씩의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굴려 던져나온 숫자의 합만큼 말을 움직여서 자신의 모든 말을 판 밖으로 내보내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조선시대 때 특히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 식민지 시기에 화투에 밀려 사라졌다고 한다.

 

 

우울증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영조 13) 2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에서 박사유(朴師愈)와 함평 이씨 사이의 2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뒷날 집안 사람이 어느 북경의 점쟁이에게 그의 사주를 물었더니, “이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에 속한다. 한유(韓愈)소식(蘇軾)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班固)사마천(司馬遷)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此命磨蝎宮, 韓昌黎蘇文忠以此故窮, 馬文章, 無事致謗](과정록過庭錄1).”고 했다나.

 

소급해서 적용해보자면, 이 사주풀이는 비교적 적중한 편이다. 한유와 소식, 반고와 사마천에 견줄 만한 불후의 문장가가 되었고, 명성에 비례하여(?) 갖은 구설수와 비난에 시달렸으니.

 

그의 집안인 반남박씨가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 때 사간(司諫)을 지낸 박소(朴紹) 이후 명문 거족이었다. 연암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과 소론이 분열될 당시, 집안의 당론을 노론으로 이끄는 한편, 영조 즉위 후 정계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출신 성분으로 보면 조선 후기 권력의 핵심부인 노론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일원인 셈이다.

 

처가쪽 역시 마찬가지다. 연암은 16세 때 전주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 이보천과 그 아우인 이양천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업에 정진했는데, 이들은 송시열(宋時烈)에서 김창협(金昌協)으로 이어지는 노론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산림처사(山林處士)였다. 이 집안은 대대로 청렴함을 자랑했기 때문에 명망에 걸맞은 부를 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돈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을지언정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 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중세 지식인들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있어 꼭 새겨두어야 할 사안이다. 가난하지만 언제든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는 계보에 속하는 인물과 비록 권력의 중심부에 있다 해도 평생 출신의 멍에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물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천양(天壤)의 거리[天壤之差]’가 있기 때문이다.

 

주류 가문의 촉망받는 천재가 밟아야 할 코스란 명약관화하다.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세상을 경륜하는, 이른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 연암 또한 처음에는 이 길을 그대로 밟아나간다. 스무 살 무렵부터 몇몇 벗들과 팀을 짜서 요즘의 고시생들처럼 근교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에 몰두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난다. 우울증이 몸을 덮친 것이다.

 

 

계유ㆍ갑술년 간 내 나이 17~8세 즈음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을 때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서화, 옛 칼, 거문고, 이기(彛器, 골동품)와 여러 잡물들에 취미를 붙이고, 더욱더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갯소리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하였다. 민옹전(閔翁傳)

歲癸酉甲戌之間, 余年十七八, 病久困劣, 留好聲歌, 書畵古釖, 琴彛器諸雜物, 益致客, 俳諧古譚, 慰心萬方, 無所開其幽鬱.

 

 

귀신까지 쫓아버릴 정도의 양기와 ‘마갈궁의 사주를 타고난 인물이 우울증에 빠졌다? 그것도 한창 기운생동(氣運生動)’는 청년기에? 아직 산전수전을 겪지도 않았고, 권력투쟁의 뜨거운 맛경험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마 그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의기소침한 경우는 이때가 유일할 듯싶다.

 

이 우울증은 사나흘씩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에다 음식만 보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거식증까지 동반하는, 한마디로 중증이었다. 음악, 서화, , 거문고 등에 탐닉하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달래보아도 별반 효과가 없을 정도로 병의 뿌리가 깊었다. 사춘기의 통과제의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젊은 날의 이유 없는 방황이었을까. 원인이 뭐든 중요한 건 청년 연암의 내부에 참을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입신양명이라는 제도적 코스와의 격렬한 마찰음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질병은 다른 삶을 살라는, 문턱을 넘으라는 몸의 신호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마이너리그방경각외전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명의를 찾아 몸을 의탁하거나 약이나 침, 혹은 특별한 양생술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곳을 찾아 요양을 하거나.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택한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글로 옮기는 ’(!)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그렇다 치고, 글의 소재들이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이라는 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현자의 지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다니. 이런 발상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내막을 좀더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가 민옹전(閔翁傳)김신선전(金神仙傳)이다. 민옹전의 주인공 민옹(閔翁)’은 말 그대로 이야기꾼이다. 어릴 때부터 옛사람의 기이한 절개나 거룩한 역사를 그리워하여 때로는 의기에 북받쳐 흥분하기도 했던 괴짜인데, 그의 이야기는 참으로 활발코, 괴이코, 황당무계하고, 걸찍걸찍해서 듣는 자치고 누구나 마음이 상쾌하게 열리지 않는 이가 없다[善譚辨, 俶恠譎恢, 聽者人無不爽然意豁也]’.

 

연암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를 불러들인다. ‘나는 특히 음식 먹기를 싫어할뿐더러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병이 되었나봐요[吾特厭食, 夜失睡, 是爲病也]’ 하자, 민옹은 곧 몸을 일으켜 치하(致賀)를 올린다. 당황하는 연암. 민옹의 진단은 이렇다. “당신은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음식을 싫어하신다니 그렇다면 살림살이가 여유있지 않겠우, 그리고 졸음이 없으시다니 낮밤을 겸해서 나이를 곱절 사시는 게 아니우, 살림살이가 늘어가고 나이를 곱절 사신다면 그야말로 수()와 부()를 함께 누리는 게 아니시우[君家貧, 幸厭食, 財可羡也; 不寐則兼夜, 幸倍年. 財羡而年倍, 壽且富也]” 병을 고통이 아니라, 삶의 능력 혹은 행운으로 변환시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

 

그런가 하면 김신선전(金神仙傳)의 주인공 김홍기는 도가(道家) 수련자다. 그는 나이 열여섯에 장가를 들었으나 한 번 관계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는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어 해 만에 몸이 별안간 가벼워 국내의 명산에 골고루 놀아서 늘 한숨에 수백 리를 달린 뒤에야 해가 이르고 늦음을 따졌다. 밥을 먹지 않고, 겨울이 되어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를 흔들지 않았다. 머물 때에 일정한 주인이 없고, 다닐 때도 일정한 곳이 없을뿐더러, 올 때도 미리 기일을 알리지 않고, 갈 때에도 약속을 남기는 법이 없다. ‘무협지풍으로 말하면, ‘바람의 아들이라고나 할까.

 

청년 박지원은 그의 자취를 찾아서 전국을 헤맨다. 김홍기는 가는 곳마다 강렬하고도 깊은 흔적을 남기지만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 장면들을 열심히 따라가다보면, 문득 김홍기라는 기인(奇人)보다 그 기인을 찾아 헤매는 청년 박지원이 더욱 기이하게 느껴진다.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김홍기의 흔적을 뒤쫓고 있는 것일까. 혹 그는 김홍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맨 것이 아니었을까. 특히 결말부에서 신선이란 벽곡(辟穀, 곡식은 안 먹고 솔잎 등을 조금씩 먹고 사는 것)하는 자가 아니라 울울히 뜻을 얻지 못하는 자[辟糓者 未必仙也 其鬱鬱不得志者也]’라고 하는 데 이르면, 김홍기와 청년 연암의 얼굴은 그대로 오버랩된다.

 

민옹이든 김신선이든 둘 다 세상의 주류적 가치나 표상 외부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배적 코드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유롭다! 연암이 이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위안을 얻는 것은 그의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얼마간 짐작케해준다. 그는 자신이 이제 밟아가야 할 홈 파인 공간이 주는 무거움 때문에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그런 중력장치에서 벗어난 존재들과 접속함으로써 치유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지.

 

 

 

 

그런 점에서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일종의 마이너(minor)들의 보고서다. 민옹과 김신선은 특히 튀는인물들이고, 그 밖의 경우도 대략 유사한 계열에 속한다. 마장전(馬駔傳)에 나오는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 등은 거리를 떠도는 광사들이고, 광문자전(廣文者傳)의 주인공 광문이는 비렁뱅이이며,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의 주인공 엄항수(嚴行首)는 서울 변두리에서 똥을 져다주면서 먹고사는 분뇨장수, 우상전(虞裳傳)의 주인공인 우상 이언진(李彦眞)은 역관 신분인 탓에 국내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불우한 문장가다.

 

직업도 신분도 다르지만, 이들은 주류(major)에서 벗어난 소수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을 묘사하는 연암의 언어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똥을 져 나르는 엄항수가 정신적으로는 가장 고결하다고 하는 것이나 양반이 되려고 그토록 갈망하던 정선부자가 양반문서를 보고서는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유[將使我爲盜耶]’하며 달아나는 것, 송욱(宋旭)이나 광문자(廣文者) 같은 거리의 자식들도 군자들의 위선적인 사귐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등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의 이야기는 온통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역설로 흘러넘친다. 이를테면, 언더그라운드에서 웅성거리던 마이너들의 목소리가 연암의 입을 빌려 지상을 활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흥미로운 건 아주 뒷날 탄생된 소위 허생전(許生傳)역시 탄생의 경로가 방경각외전과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편에 실려 있는데, 하루는 연암이 옥갑에서 비장들과 머리를 맞대고 밤 드리(밤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역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예전에 윤영(尹映)이란 이에게 들은 거부(巨富) 변씨(卞氏)와 허생(許生)의 이야기를 풀어 놓게 되는데, 그게 바로 허생전(許生傳)이다. 그 과정을 조금 살펴보기로

 

 

내 나이 스무 살(1756) 무렵, 봉원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한 손님이 있었는데, 그는 식사를 아주 조금밖에 하지 않았으며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도인법(導引法, 도가에서 선인이 되기 위한 양생법의 하나)을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문득 벽에 기대앉아서 약간 눈을 감고 용호교(龍虎交, 도가의 양생법)를 하였다. 연배가 상당히 높았으므로 나는 그에게 공손히 대하였다.

余年二十時, 讀書奉元寺, 有一客能少食, 終夜不寐, 爲導引法, 至日中, 輒倚壁坐, 少合眼爲龍虎交, 年頗老, 故貌敬之.

 

그때 그가 나에게 허생의 일과 염시도ㆍ배시황ㆍ완흥군부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몇만 마디 말이 계속 이어지면서 몇날 밤을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기괴하고 신기하여 모두 들을 만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윤영이라고 했다. 이때가 바로 병자년(1756) 겨울이다.

時爲余談許生事, 及廉時道裵時晃見完興君夫人, 亹亹數萬言, 數夜不絕, 詭奇怪譎, 皆可足聽, 其時自言姓: 名爲尹映,此丙子冬也.

 

 

그로부터 18년 뒤, 연암은 다시 그를 만난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얼굴은 그대로였고 발걸음 또한 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윤영임을 부인하였다. 이름을 숨기고 속세를 유희하며 구름에 달 가듯이 떠도는 존재였던 것. 결국 창작의 시공간은 다르지만 허생전(許生傳)역시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의 텍스트 구성법과 동일한 패턴을 밟고 있다.

 

소설사의 선구로 칭송받는 문제적 텍스트들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훗날 그는 이 작품들을 습작 혹은 유희문자 정도로 치부하고, 그 가운데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같은 작품은 스스로 없애버리기도 했지만, 마이너리그는 문학사적 성취 여부와는 별개로, 연암의 글쓰기가 향하는 방향 및 잠재적 폭발력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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