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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프롤로그 - 여행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프롤로그 - 여행

건방진방랑자 2021. 7. 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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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여행ㆍ편력ㆍ유목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맹혹은 공간치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방향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웬만큼 멋진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기념비를 봐서는 도통 감동을 받지 않는 쿨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간지각력이 제로에 가까운 편인데, 거기다 남한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함백 탄광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여행이란 늘 기차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것이었을 뿐, 이국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 변화무쌍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아쉬워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살던 그곳이 바로 도시인들이 꿈꾸는 이국적 공간이었던 셈이다. 도시인이 된 지 꽤나 오래되었건만, 지금도 여름이면 계곡으로, 바닷가로 혹은 해외 휴양지로 피서를 떠나는 휴가풍속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하기야 이런 건 사소한 핑계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행에 대해 냉소적인 진짜 이유는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노라마식 관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파노라마란 무엇인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퍼레이드다. 거기에는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얼굴과 액션(action)이 지워져 있다. , 그때 풍경은 자연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생명의 거친 호흡과 약동이 생략된 침묵의 소묘일 따름이다. 이런 구도에선 오직 주체의 나른한 시선만이 특권적 지위를 확보한다. 시선이 클로즈 업되는 순간, 대상은 전적으로 거기에 종속될 뿐.

 

도시인들이 보는 전원,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구, 서구가 발견한 동양. 사실 이런 건 모두 외부자가 낯선 땅을 흘깃바라보고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던가. 그 허상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한 시대와 사회를 주름잡는 표상이 되면 모두 그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엔 그것을 대상에 위압적으로 덧씌우는 식의 악순환을 얼마나 반복했던지.

 

내가 아는 한 여행이란 이런 수준을 넘기가 어렵다. 하긴, 그런 건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신체적 체험과 삶의 낯선 경계가 펼쳐질 수 있다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바야흐로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이 한눈에 조망되는 시대가 아닌가.

 

2002년 초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간 적이 있다. 마흔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 몇몇 후배들에 의한 강제출국(?)이었다. 특별한 기대를 하지도 않았건만, 나는 비행기가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옹색한 데 정말 놀랐다. 기차 여행이 주는 쾌적함, 설레임, 비전(vision) 따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꽉 끼는 의자와 좁은 통로, 고공(高空)을 오를 때의 기괴한 소음, 양식ㆍ한식ㆍ간식이 뒤섞인 국적불명 (혹은 인터내셔널?)의 식사. 오직 폼나는 건(?) 지독하게 복잡한 출입국 통과 절차뿐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여행지에서였다. 그 유명한 천안문과 자금성 앞에 섰을 때, 나는 여행의 감격은커녕 허탈감을 금할 수 없었다. ‘이건 뭐, 티브이나 영화에서 본 것과 똑같잖아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천안문과 자금성의 규모가 별볼일 없어서가 아니라, 그 엄청난 스케일이 평범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이미 영상이 실물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천안문뿐 아니라, 이름난 고적지일수록 그런 허전함은 피할 길이 없었다. 뭔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건 뻥과자장사, 만두가게 등이 늘어선 ‘70년대형뒷골목이거나 지난 시대에는 흥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서적의 거리 유리창(琉璃廠)’ 같은 곳을 배회할 때뿐이었다. 그런 데서 뭔가 찐한 감흥을 느낀 건 풍경의 이질성 때문이라기보다 그 공간들이 지닌 시간적 낙차, 혹은 무상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3부를 펼치면, 내가 왜 유리창에서 벅찬 감격을 느꼈는지 눈치채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짧은 중국여행 이후 여행에 대한 원초적 냉소는 더더욱 치유할 길이 없어진 셈이다.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떤 화려한 여행도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패션혹은 레저이상이 되기 어렵다. 하나의 문턱을 넘는 체험이 되지 않는 여행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는 대충 이렇다.

 

그런 내가 어떻게 열하일기라는 여행기의 열광적(fan)이 되어 그것을 안내하는 글을 쓰게 되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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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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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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