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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4장 ‘연암체’, 연암체의 실체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4장 ‘연암체’, 연암체의 실체

건방진방랑자 2021. 7. 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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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체의 실체

 

 

그럼 과연 연암체란 어떤 것일까.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암의 문장에 대해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없는 리좀(rhizome)’ 같은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리좀은 덩이줄기라는 뜻으로, 수목(樹木)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이 수목이라면, 리좀은 뿌리라는 중심이 없을 뿐 아니라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는 특성을 지닌다. 연암의 문체적 특이성을 이 개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흔히 연암의 문장론에 대해 다음의 글을 주목한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로운 영물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지초(芝草)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초정집서(楚亭集序)

苟能法古而知變, 刱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博, 旨意各殊. 故飛潛走躍, 或未著名; 山川草木, 必有秘靈. 朽壤蒸芝, 腐草化螢.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조한다!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연암의 특이성은 변증법적 조화와 통일로 오인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과연 의 조화에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고문이든 아니든, 언어가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날마다 그 광휘가 새로운그래서 썩은 흙에서 기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하는삼라만상의 무상한 흐름을 등동적으로 절단, 채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그 핵심이 있다.

 

그가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자신의 조카 종선의 시를 평하면서, “한 가지 법도에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不纏一法, 百體俱該]” “성당의 시인가 하면 어느새 한위의 시가 되고 또 송명의 시가 된다[視爲盛唐, 則忽焉漢, 而忽焉宋明. 纔謂宋明]”고 극찬한 데서 보듯이,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이의 능력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논점을 변증법으로 영토화하는 순간 종횡무진하는 이 게릴라적인담론은 고상하고 평온한 질서로 평정되고 만다.

 

오히려 연암체의 진수는 대상과 소재에 따라 변화무쌍한 변이 능력에 있다.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 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중략)

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題目者, 敵國也; 掌故者, 戰場墟壘也. 束字爲句, 團句成章, 猶隊伍行陣也; 韻以聲之, 詞以耀之, 猶金皷旌旗也. 照應者, 烽埈也; 譬喩者, 遊騎也.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貴含蓄者, 不禽二毛也; 有餘音者, 振旅而凱旋也.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중략)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중략)

故善爲兵者, 無可棄之卒; 善爲文者, 無可擇之字. (중략) 故文之不工, 非字之罪也. 彼評字句之雅俗, 論篇章之高下者, 皆不識合變之機, 而制勝之權者也.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則所以合變之權, 其又在時而不在法也.

 

 

글쓰기를 전쟁의 수사학에 빗대고 있는 이 글이야말로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단연 독보적인 문장론이다. 소단적치인이란 제목도 흥미롭다. ‘소단(騷壇)’은 문단이란 의미고, ‘적치(赤織)’는 붉은 깃발이란 뜻이니, 우리 말로 옮기면 문단의 붉은 깃발을 논함정도가 된다. 병법에는 고정된 룰이 따로 없다. 병법을 달달 왼다고 전투에 승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러다 망한 케이스가 더 많다. 승패를 좌우하는 건 병법이 아니라, ‘()’를 파악하는 능력일 뿐이다. 글을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에 어떤 종류의 규범이나 초월적 체계가 있을 리 없다. ‘합하여 변하는 기미’, 곧 때에 맞는 용법이 있을 뿐이고,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 곧 효과와 울림이 있을 뿐이다.

 

연암체가 과연 그러하다. 그의 글은 소설과 소품, 고문과 변려문 등이 자유자재로 섞이는 한편, 천고의 흥망성쇠를 다룬 거대담론과 시정의 우스갯소리, 잡다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하나로 분류되는 순간, 그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곤 한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버리는 변검처럼, 그리고 그 변화무쌍한 얼굴들의 각축장이 바로 열하일기.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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