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기계의 발랄함
자, 워밍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 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두 사람의 비평적 관점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사항이다. 먼저, 연암 비평의 핵심은 주어진 언표의 배치를 변환하는 데 있다. 당대 고문이 지닌 경직된 코드를 거부하고 우주와 생의 약동하는 리듬을 포착하는 것이 ‘연암체’의 핵심이었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4권
常以爲文無古無今. (中略) 惟自爲吾文而已. 擧耳目之所睹聞, 而無不能曲盡其形聲, 畢究其情狀, 則文之道極也.
그가 보기에 당대의 문체는 경직된 코드화를 통해 생동하는 흐름을 가두고 질식시키는 기제이다. 중요한 건 삼라만상에 흘러넘치는 ‘생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을 위해서는 고문의 전범적 지위는 와해되어야 한다. ‘옛날, 거기’라는 초월적 허공에서 ‘지금, 여기’라는 지상으로의 착지! —— 이것이 연암이 시도한 담론적 실험의 요체이다. 그러한 욕망이 패사소품체와 접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암의 문체적 실힘이 소품체로만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열하일기』가 잘 보여주듯이, 그는 고문과 소품체, 소설 등 다양한 문체들을 종횡했던바, 연암의 특이성은 고문과 다른 문체들을 절충하거나 중도적으로 활용한 데 있다기보다 그러한 유연한 ‘횡단성’ 자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대상 및 소재, 주제 혹은 의미 등 배치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능동성이야말로 ‘표현기계’로서의 연암의 우뚝한 경지인 셈이다. 그는 스스로 문장을 이렇게 자부하였다.
나의 문장은 좌구명, 공양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사마천(司馬遷), 반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을 따른 것이 있으며, 원굉도, 김성탄을 따른 것이 있다. 사람들은 사마천이나 한유를 본뜬 글을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을 청하려 하지만, 원굉도, 김성탄을 본뜬 글에 대해서는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시원하여 전파해 마지않는다. 이에 나의 글을 원굉도, 김성탄 소품으로 일컬으니, 이것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유만주, 『흠영(欽英)』
그의 문체실험은 이렇게 고문이 매너리즘에 빠져 어떤 촉발도 일으키지 못한 반면, 소품문의 발랄함에 열광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긴밀히 유착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문장이란 신체적 촉발(혹은 공명)을 야기하는 정동(情動, affection)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주어진 기표체계에 새로운 내용을 담는 식으로가 아니라, 아예 표현체계의 전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그 전복적 여정 속에서 고문이 구축한 견고한 의미화의 장은 파열된다. 주어진 언표배치를 비틀고 변환함으로써 기존의 의미망들은 무력해지는 한편 그 자리에 생의 도저한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