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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 경허의 보임과 1880년대 조선민중의 처참한 생활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 경허의 보임과 1880년대 조선민중의 처참한 생활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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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보임과 1880년대 조선민중의 처참한 생활

 

 

자아! 다음의 보다 사회적인 맥락이 있는 고사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경허가 천장사에 간 것은 일차적으로 보임(保任, 보림이라고도 말함)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임 혹은 보림이라는 것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인데, 대오를 한 후에 그 경지를 보호하고 지속시키기 위하여 당분간(보통 1년 동안) 특별한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하는 연암산 지장암이라는 토굴로 들어가 손수 솜을 놓아 두툼한 누더기옷 한 벌을 지어 입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꼬박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1년을 지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오줌, , 밥 먹는 것, 자는 것, 세부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원칙이 있었을 것이지만 경허 스님이 신체를 컨트롤 하는 능력은 현재 우리나라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북조시대 때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을 면벽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전설적인 얘기일 뿐이고, 실제로 경허의 1년 보임은 달마의 9년 면벽보다도 더 극심한 것이었다라고 그의 제자 만공은 말합니다. 보임 1년 동안 씻지도 않고 갈아입지도 않아 땀에 찌든 누더기옷에서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으니 이때가 몸을 덮은 것이 두부 짠 비지를 온몸에 문질러놓은 것 같았다고 합니다. 온몸이 부스럼으로 덮였어도 손대어 한 번도 긁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보임을 끝낸 후에 천장사를 근거지로 해서 다양하게 주변 사찰, 즉 덕숭산(德崇山) 수덕사, 정혜사(定慧寺), 상왕산(象王山) 개심사(開心寺), 문수사, 도비산(都飛山) 부석사(浮石寺),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천비산(天庇山) 중암(中庵) 묘각사(妙覺寺), 칠갑산(七甲山) 장곡사(長谷寺), 예산 대련사(大蓮寺), 아산(牙山) 봉곡사(鳳谷寺), 금산(錦山) 보석사(寶石寺), 태고사(太古寺), 백마강변 영은사(靈隱寺), 면천(沔川) 영탑사(靈塔寺), 계룡산 갑사(甲寺), 동학사, 신원사(新元寺),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등 호서 일대에 새로운 선풍을 진작하고 승려들의 고식적인 수행방편을 개혁시키고 민중들의 불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가 기거한 천장사는 매우 초라하고 빈한한 사찰이었으나 대각자인 경허가 살게 되면서 자연히 소음도 많았지만 또 그만큼 사찰운영이 조금은 넉넉해졌습니다. 주지로 있는 형님과 공양주보살인 엄마는 결코 경허의 혁신적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조금씩은 경허의 도력에 감화를 입어간 것 같습니다. 그가 천장사에 기거하던 1880년대의 조선은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천진으로 납치되어 가고, 제물포조약이 맺어지는 등 조선왕조의 국권이 무너져가는 시기였으며, 그만큼 민중의 삶은 여러 가지 시련에 노출되어 빈궁함을 극하였고, 관원들의 탐학은 날로 거세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정황 속에서도 경허는 거침없는 언변과 기행으로 관헌들을 제압하고 경복시켜 민중의 삶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인용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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